제75화
헬무트의 군대가 아무리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왕국 전체와 맞설 순 없는 법.
그래서 헬무트는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인 케레이트 부족과 손을 잡기로 했다.
케레이트 부족이 콩기라트 부족을 쳐부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신, 반란에 필요한 지원군을 얻기로 한 것이다.
“변경백 헬무트가 그렇게 야심에 찬 사람이었습니까?”
카미유는 오토가 헬무트의 반란을 언급하자 놀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발데마르 가문은 꽤 이름이 알려진 유서 깊은 명문가.
사나운 유목민들 상대로 대대로 국경을 지키고 있는 가문인지라, 국가에 충성하는 기사도 정신의 표본으로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던 것이다.
“그가 대대로 쌓아온 가문의 명예를 져버리면서까지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권력욕이 센 사람일 줄은….”
“응, 아니야.”
오토가 딱 잘라 말했다.
“헬무트는 야심가가 아니야.”
“예…?”
“야심을 품으려면 아직 일러. 몇 년쯤 지나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오토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헬무트는 생계형 반란이야.”
“그게 뭔 개소립니까?”
“야, 이.”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말했잖아. 생계형 반란이라고.”
“생계형 비리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생계형 반란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봐서 그런 겁니다.”
“반란의 절반은 생계형 반란이지 뭐.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게 권력욕 때문이야? 먹고 살기 힘드니까 그런 거잖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이판사판이다 싶어서 들이받는 거 아냐.”
“우리 백성들이 전하의 머리를 성벽 위에 내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입니까?”
“맞지. 딱 그거지. 우리 백성들은 늘 내 머리를 성벽 위에… 뭐라고?”
오토는 카미유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야, 이! 우리 백성들이 왜 내 머리를 성벽 위에 내걸고 싶어 하는데!”
“옛날엔 많이 그랬습니다.”
오토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카미유가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냐는 듯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가 지나가도 반란을 일으켜서 전하의 목을 따자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을 정도입니다만.”
“그, 그랬어?”
“아이들 사이에서 전하의 멱을 따 쇠꼬챙이로 찌른다는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진 동요가 유행하기도 했었습니다.”
“그거 나 아니라고….”
오토가 우울하다는 듯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나 억울해…. 그땐 내가… 그 일종의… 심신미약? 같은 거였어….”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무튼 아니야!”
“개과천선했다고 과거 저질렀던 악행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만.”
“아니야! 아니라고!”
그렇게 잠시 동안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간 후.
“헬무트는 착취당하다 지쳐서 들고 일어난 거야. 정확히는 발데마르 가문이 몇 대에 걸쳐서 마그리트 왕국의 착취를 당했던 거고. 가족들을 볼모로 잡혀가면서. 그게 무슨 군신 관계야? 노예지.”
“아.”
오토의 설명을 들은 카미유가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 이거지. 웬만하면 유목민들이랑 손잡지는 않았을 텐데. 어지간히도 쪼아댔나 봐.”
“그런 일이….”
카미유는 기사 아카데미의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발데마르 가문 충성심의 이면에 그러한 어두움 면이 있었던 게 씁쓸했던 모양이었다.
“일단 여기서 찢어지자. 거기 다섯 명. 저랑 갑시다.”
“예, 전하.”
오토가 마검사 다섯을 데리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칸.”
“예, 전하.”
“넌 여기 남아서 콩기라트 부족을 지휘해. 쟤한테 도와달라고 해.”
오토가 카이로스를 가리켰다.
“카미유도 여기 남아서 마검사들이랑 같이 아무칸을 도와줘. 어르신 잘 모시고.”
“어디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헬무트의 딸이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에서 유학 중이야. 말이 유학이지, 볼모로 붙잡혀 있는 거지만. 헬무트는 어떻게 해서든 딸을 탈출시키려고 할 거야. 딸이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딸의 목이 뎅겅 날아갈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선수 쳐야 돼. 그래야 헬무트를 컨트롤할 수 있어.”
“딸을 인질로 활용하시려는 겁니까?”
“그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그건 너무 비겁한….”
“전쟁과 정치에 비겁한 게 어딨어? 이건 죽고 사는 문제야. 우리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백성들까지. 교역로를 잃으면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될지 알지? 그렇게 되면 화가 난 백성들이 내 머리를 성벽 위에 내걸겠지?”
“그건 꽤 끌리는 이야기….”
“뭐?”
“아닙니다.”
“간다. 이랴!”
오토가 뱀눈을 뜨고 카미유를 노려보고는, 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히이이이이이이잉!!!”
그러자 놀란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날뛰었고.
“어어? 얘 왜 이래? 야! 으아악!”
철푸덕!
오토가 낙마했다.
아직은 승마에 익숙하지 않아서, 말의 갑작스러운 몸부림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고삐를 놓친 것이다.
* * *
아무칸이 복귀하자 콩기라트 부족의 사기는 엄청나게 올라갔다.
“족장이 돌아오셨다!”
“족장! 왜 이제야 오십니까!”
“드디어 케레이트 부족 놈들에게 복수를 해줄 수 있겠군!”
콩기라트 부족에게 있어 아무칸의 존재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비록 오토에게 패배했을지언정, 아무칸은 매우 유능한 족장이었다.
특히나 군사적 역량이 매우 뛰어나서, 그가 기병대를 이끌고 초원을 질주할 때면 제아무리 케레이트 부족의 전사들이라 할지라도 꼬리를 말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괜히 토그릴이 헬무트와 손을 잡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전투에서 연전연패한데다가, 부족의 이인자였던 카이세이마저 전사하는 바람에 사기가 바닥이었던 상황.
그런 와중에 아무칸이 돌아왔으니,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꽃피는 건 당연했다.
“내 아들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왜 이제야 온 것이냐?”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여인이 아무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이름은 메르키트.
남편을 잃고 아무칸을 홀로 키워낸 그녀는, 스스로도 뛰어난 전사이자 족장이었다.
아무칸이 장성하여 족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녀 덕분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아무칸이 어머니 메르키트에게 무릎을 꿇었다.
“못난 아들이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저는….”
그때.
“부족의 어머니시여.”
카이로스가 슬쩍 나서서 메르키트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이름은 카이로스. 대륙에서 아무칸을 만나 안다의 인연을 맺은 자입니다.”
[안다]란 하브르 초원에서 형제의 맹약을 맺은 사이를 뜻하는 말이었다.
“……!”
아무칸은 카이로스가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자 크게 놀랐다.
‘조용히 있어라.’
그때, 카이로스의 음성이 아무칸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짐이 언제 네놈 따위의 체면을 세워줄 일이 있겠느냐? 지금은 전시상황이고, 네놈의 부족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그러니 입 닥치고 있도록 하여라.’
아무칸은 카이로스의 말에 울컥 감동했지만, 어머니 앞에서 티를 내지 않았다.
왜?
카이로스의 말대로, 지금은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쳤다가 반등한 상황.
아무칸이 대륙인에게 패배해 부하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기껏 올라갔던 사기가 다시 바닥을 칠 테니까.
“그대가 내 아들과 안다의 인연을 맺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대는 내 아들의 첫 안다입니다. 여의치 않은 상황이나, 아들이 첫 안다를 맞이했으니 마땅히 대접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들 들어라. 여기 아무칸의 안다가 오셨다. 내일 전장에서 죽을지언정, 오늘 밤만큼은 마음껏 먹고 마실 것이다.”
메르키트가 환영 행사를 선언하자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이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한동안 기뻐할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이제 아무칸도 돌아온 이상 오늘만큼은 긴장을 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카이로스, 카미유, 그리고 마검사들은 콩기라트 부족의 전사들과 더불어 삶은 양고기와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인 마유주를 먹고 마셨다.
“으헤헤헤헤! 초원의 전사들이라 그런지 아주 화끈하구먼! 으헤헤헤헤헤!”
카이로스는 특유의 화통하고 사내다운 기질 덕분에, 거칠고 호전적인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오오!”
“대륙에서 저런 사내다운 자가 있었다니!”
“도대체 벌써 몇 병째란 말인가?”
사내다움에 대한 덕목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곳 하브르 초원에서는 술을 잘 마시는 게 매우 중요했다.
전투력이 아무리 세다 할지라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하면 사내 중의 사내라고 인정받을 수가 없을 정도.
그러니 근육질의 큰 덩치에 호탕하고 술도 잘 마셔서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카이로스는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을 호감을 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래서 카이로스 어르신에게 이곳을 맡긴 건가?’
카미유는 어쩌면 오토가 인원 배치를 아주 훌륭하게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의도된 거라면….
‘용병술까지?’
오토가 어떤 사람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여태 보여준 것 이상으로 더 뛰어난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 * *
두두두두두두두두!
한편, 오토는 마검사 셋을 데리고 초원을 내달려 국경을 넘어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더 달려! 더! 더 빠르게!”
오토는 말을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왜?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헬무트가 반란의 불씨를 지핀 이상 하루라도 빨리 그의 딸을 확보하려고 할 테고, 지금쯤이면 물밑작업이 다 끝나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늦었을 수도 있겠지만….’
헬무트가 이미 딸을 구출해버렸다면, 일은 꼬인다.
헬무트의 군대와 케레이트 부족의 연합군을 상대해야 한다.
그건 아무리 오토로서도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그러면 매우 불리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
어쩌면 교역로를 아예 포기하고 하브르 초원의 패권을 넘겨줘야 하는, 이오타 왕국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즉, 헬무트의 딸을 확보하느냐 마느냐가 이번 사건을 쉽게 해결하느냐 마느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급한 마음을 안고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에 도착한 오토 일행은, 즉시 왕립 아카데미로 향했다.
“휴. 다행이다. 안 늦었어.”
오토는 왕립 아카데미 정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급한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만약 헬무트의 딸이 이미 구출되었다면 아카데미 주변뿐 아니라 수도 전체가 난리가 나 있을 테니까.
잠잠한 걸 보면 구출 작전이 시작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됐어.’
오토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구출 작전이 시작되지 않는 이상 헬무트의 딸은 이미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반란을 일으키든, 딸을 구출하는 작전은 항상 똑같은 패턴이었지.’
오토는 헬무트의 딸 구출 작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즉, 헬무트의 부하들을 따돌리고 딸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도 얼마든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