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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 (76)화 (77/401)

제76화

헬무트의 딸 엘리스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하굣길에 나섰다.

엘리스의 곁에는 기사 하나가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그는 엘리스의 호위기사로서, 1년 365일 24시간 그녀와 함께했다.

말이 호위지, 사실 엘리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감시자였지만….

그래도 교내에서는 좀 나았다.

원칙상 왕립 아카데미의 교내에는 단 한 명의 호위기사만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카데미의 정문을 나서서 마차에 타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5명이 추가로 달라붙기에, 총 6명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감시를 당해야만 했다.

‘제발.’

엘리스는 조금 전 은밀하게 건네받은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오늘 하굣길에 아가씨를 구출할 예정입니다.

부디 무슨 일이 벌어지든 놀라지 마시고, 침착하게 행동하십시오.

아버님의 의지입니다.

만약 탈출에 실패했다가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불안한 마음이 컸다.

또한, 구출 작전이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가문과 왕실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이 숨 막히는 삶에서 벗어나는 거야.’

한편으로는 이 지옥 같은 생활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한 줄기 희망을 본 기분이었다.

볼모로 잡힌 발데마르의 인생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볼모가 된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고향에 가려는 것을 온갖 이유로 거절당했으며, 그 누구와도 친분을 나누거나 교류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

새로운 볼모가 생길 때까지.

발데마르 가문의 볼모들은 왕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름하에 그런 퍽퍽한 삶을 살아야 했고, 그건 엘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가씨,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늘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는 기사가 그녀를 안내했다.

마차 주변에는 풀 플레이트 메일에 투구까지 눌러쓴 기사 넷이 말에 올라탄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마부 역시 중무장을 한 기사였다.

엘리스는 아무런 생각 없이 늘 타던, 그 숨 막히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누, 누구… 세요?”

엘리스는 마차 안에 웬 금발의 미남자가 타고 있는 걸 보고 크게 당황했다.

“쉿.”

금발의 미남자가 검지를 세워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버님의 명령을 수행 중입니다.”

“아…!”

“조용히 가시죠.”

“아, 알겠어요.”

엘리스는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금발의 미남자가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출발한 마차는, 어느 순간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덜컹덜컹!

마차가 쉴 새 없이 흔들리던 중.

“으악!”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금발의 미남자가 놀란 엘리스를 진정시켰다.

“누가 졸다가 마차에서 떨어지기라고 했나 보죠. 아마도?”

“네…?”

“학교 안까지 졸졸 따라다니던 놈 있잖아요.”

금발의 미남자.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 * *

엘리스가 사라진 지 정확히 2시간 뒤.

“성문을 걸어 잠가라!”

“마차를 수색하라!”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에 비상이 걸렸다.

아카데미 수업이 끝난 뒤 한참이 지나서도 엘리스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자, 곧바로 수배령이 내려진 것이다.

“헬무트, 네놈이 기어코!”

마그리트 왕국의 국왕은 엘리스가 사라졌단 보고를 받자마자 극도로 분노했다.

볼모인 엘리스가 사라졌다는 것은, 헬무트가 작정하고 왕가에 반기를 들었다는 증거.

헬무트의 반란은 가장 우려하던 것이었으므로, 국왕의 분노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엘리스, 그 빌어먹을 계집을 반드시 생포하라!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알겠는가!”

“예, 전하.”

“또한, 즉시 군대를 일으켜 동쪽 국경으로 배치하라. 헬무트가 그 계집을 빼내려고 시도한 이상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응은 매우 빨랐다.

수도에 봉쇄령이 내려지고, 군대가 움직였다.

한편, 당황한 건 마그리트 국왕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엘리스의 구출 작전을 담당했던 기사들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구출 작전을 맡은 기사단장은 한발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했다.

“도대체 누가 아가씨를 구출해냈단 말인가?”

누가, 왜.

그것도 예정된 날짜보다 이틀이나 앞당겨서?

구출 작전을 실행할 또 다른 부대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건만….

“어떻게 합니까? 이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주군께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알린단 말이냐?”

기사는 부하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도가 봉쇄되었다. 우리 역시 발이 묶인 상태다. 무슨 수로 주군께 보고를 한다는 말인가?”

“하, 하지만….”

“우선은 최대한 몸을 숨긴 채 수도를 탈출할 기회를 엿본다. 탈출을 강행했다간 몰살당할 뿐이다.”

“알겠습니다.”

결국, 헬무트의 부하들은 수도에서 발이 묶인 채 쥐새끼처럼 숨어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목숨을 걸고 탈출해 헬무트에게 이 사실을 알릴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수도 전체가 봉쇄되고 거리 곳곳에 병사들과 기사들이 쫙 깔려 있는 상황인지라, 어떻게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몸을 숨길 수밖에….

* * *

봉쇄령이 내려졌지만, 엘리스를 태운 마차는 어느새 수도를 빠져나간 뒤였다.

“이랴!”

“히이이이이이잉!”

오토 일행은 마차를 버리자마자 숨겨놓았던 말을 타고 하브르 초원이 자리한 동쪽으로 질주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하브르 초원의 특산품인 타타르 품종의 말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리며 마그리트 왕국군을 순식간에 따돌려버렸다.

아니, 애초에 너무 빨라서 마그리트 왕국군은 오토 일행의 그림자조차 뒤쫓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오토의 품에 안겨 달리던 엘리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명령을 따르는 분이라지만…. 저는 당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아버님의 기사가 아닙니다.”

“맞아요. 저는 아버님의 부하는 아닙니다.”

“그럼… 용병이신 건가요?”

솔직히, 엘리스는 오토를 용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용병 특유의 거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아. 그리고 저 얼굴… 저렇게 고귀하고 잘생긴 사람은 처음이야. 이런 사람이 용병일 리 없어.’

지금의 오토는 대륙 최고의 미남자를 다툴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 도저히 용병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용병이라….”

오토가 엘리스의 등 뒤에서 미소를 지었다.

“아뇨. 저는 용병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시죠? 아버님의 명령을 따르는 분이라고 하셨지만…. 당신은 아버님의 기사도 아니고 용병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납치범입니다.”

“네에?”

“엘리스 드 발데마르. 당신은 제게 납치되셨습니다.”

“……!”

“저는 납치범으로서, 당신의 아버지인 헬무트 변경백에게 합당한 몸값을 요구할 예정입니다. 단, 일이 틀어지더라도 당신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을 걸 약속드리겠습니다.”

“아.”

엘리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렇게도 원하던 자유의 몸이 되나 했더니, 탈출시켜준 이 금발의 미남자가 납치범이라니?

탈출이 사실 진짜 탈출이 아닌 또 다른 감옥이었을 줄이야….

엘리스는 엄습하는 절망감에 몸서리치면서도,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저를 납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계신 건가요?”

“마그리트 국왕과 헬무트 후작의 사이가 극도로 험악해지겠죠. 아니, 내전이 벌어지는 걸 험악하다고 표현하긴 좀 그렇긴 하네요.”

“당신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당신의 아버지. 변경백 헬무트 후작은 이미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브르 초원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케레이트 부족과 손을 잡았죠.”

“……!”

“그러니까, 당신의 납치와는 상관없이, 어차피 전쟁은 벌어질 거였단 얘기죠.”

“아버님께서… 반란을 일으키실 예정이라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마그리트 왕가에 충성을 다한 충신이에요!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들과는….”

“그게 노예지 충신입니까?”

“그, 그건….”

“충신 두 번 했다간 왕 죽을 때도 산 채로 같이 묻히겠네.”

오토가 빈정거림에 엘리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어쨌든 일은 이미 벌어졌고, 당신의 납치 여부는 전쟁이 벌어지는 거랑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럼 왜 굳이 저를 납치하신 거죠? 아버님께서 정말로 반란을 일으키시려고 결단을 내리신 거라면, 제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님께서는 절대 멈추지 않으실 테니까.”

“아뇨.”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헬무트 후작을 협박할 생각은 있지만, 반란을 포기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의 의도가 뭔가요?”

“헬무트 후작이 케레이트 부족과 맺은 동맹을 파기하는 것. 그리고 케레이트 부족 대신 콩기라트 부족과 동맹을 맺는 것.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 * *

같은 시각.

“가자! 용맹한 콩기라트 전사들이여!”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무칸은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지난밤 살짝 과음한 건 사실이었지만, 전투를 치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카이로스 아무칸은 술 대결까지 펼치지 않았다.

만약 어젯밤에도 그때처럼 술 대결을 펼쳤다면… 승부가 어떻게 나든 아무칸이나 카이로스 둘 다 술병이 나서 3일은 족히 앓아누웠을 테니까.

두 사람 모두 전쟁통에 술 대결을 펼칠 만큼 머저리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적이다! 놈들을 쓸어버려라!”

아무칸이 저 멀리 케레이트 부족의 기병대를 발견하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

“나 아무칸이 왔다! 버러지 같은 케레이트 부족이여!”

아무칸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케레이트 부족의 기병대들을 쓸어버리며, 자신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크핫핫핫!”

“우리 족장이 돌아온 이상, 네놈들은 모두 늑대 밥에 불과하다!”

사기가 한껏 올라간 콩기라트 부족의 전사들 역시 며칠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선보였다.

“으르르렁!”

“컹! 커어엉! 컹!”

아무칸이 소환한 늑대정령들도 사나운 맹수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며, 케레이트 부족 기병대들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그러나 전투의 주인공은 아무칸도,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도 아니었다.

“마, 맙소사.”

아무칸은 카이로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수백 년 만에 제대로 된 전투에 나선 카이로스의 전투력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콰앙!

카이로스가 휘두른 철퇴 한 방에, 케레이트 부족 전사가 타고 있던 말의 머리통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으악!”

낙마한 케레이트 부족 전사.

퍼억!

카이로스의 발길질이 쓰러져 있던 케레이트 부족 전사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참혹하게도, 그 케레이트 부족 전사는 얼굴뿐 아니라, 머리통까지 으깨져 즉사하고 말았다.

카이로스의 먹잇감이 된 적들은 대부분 그런 최후를 맞이했다.

“단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리라.”

카이로스는 그렇게 선언하고는, 케레이트 부족 전사들과 그들이 탄 말을 닥치는 대로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카이로스의 철퇴는 마치 필살의 의지라도 담긴 듯 사람과 말을 가리지 않고 적들을 단 한 방에 잠재웠다.

전생에 수천 번, 어쩌면 만 번이 넘도록 전장을 누볐던, 절대자의 전투 경험이 고스란히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전신[戰神].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전쟁의 신이 다시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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