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조, 좋소이다.”
총사령관은 오토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대신 조건이 있소. 지금은 우리 병사들이 많이 지쳐 있으니, 수도로 들어가 쉬게 해주시오. 휴식을 취하고….”
푹!
포크가 국왕의 엉덩이를 찔렀다.
“뀌이이이이이이익!”
또 다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는 국왕.
“아, 아니! 왜 또 국왕 전하의 엉덩이를 포크로 찌르는 것이오!”
“개수작부리지 마라.”
오토가 같잖다는 듯 총사령관을 향해 눈을 흘겼다.
“선수 앞에서 기술 쓰다가 뒈지는 수가 있어?”
“…….”
“내가 미쳤냐? 니네를 수도로 들이게? 왜? 수도로 들어와서 쉬는 척하면서 한바탕하게? 얕을 수를 써도 유분수지, 누굴 원숭이로 아나.”
“…….”
“허튼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여차하면 얘 멱 따버리고 왕세자를 옹립하는 수가 있어. 니가 내 마음에 안 드는 행동 할 때마다 왕족 한 명이 뒈질 거야.”
“알아들었으니 제발 그러지 마시오.”
“알아들었으면 당장 튀어가.”
오토가 동쪽을 가리켰다.
“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 수퇘지를 포함한 왕족들 운명이 결정되는 거야.”
“명심하겠소이다.”
그렇게 총사령관은 오토의 명령에 따라서,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정찰병을 붙여서 혹시나 개짓거리 하지 않는지 잘 감시하세요. 만약 이상 징후 포착 시 즉시 보고할 수 있도록 하시고요.”
“예, 전하.”
오토는 명령을 내리고는 저 멀리 사라지는 마그리트 왕국군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가죠.”
“네에?”
“이제 아버님 뵈러 가야죠.”
“아?”
“뒤따라갑니다.”
오토는 마그리트 왕국군에게만 콩기라트 부족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 * *
산으로 피난을 간 콩기라트 부족은,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겪었다.
하브르 초원의 산은 그야말로 척박해서, 먹을 게 아예 없었다.
게다가 식수 또한 부족했다.
산을 포위한 케레이트 부족이 물이 흐르는 곳을 점령해버려서, 먹을 물을 구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콩기라트 부족은 피난 때 챙겨뒀던 물과 식량이 떨어지자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풀을 뜯어먹고, 빗물을 받아 마시는 등 극한의 생존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족장, 드십시오.”
한 전사가 바위에 기대앉아 쉬고 있던 아무칸에게 생고기인지 익힌 것인지 모를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산에서 잡은 다람쥐를 대충 구운 고기였다.
“아니다. 네가 먹어라.”
아무칸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며칠째 먹지 못하지 않았는가.”
“아닙니다. 족장이 드십시오.”
“나는 괜찮다.”
아무칸은 족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지 않았다.
‘족장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늘 강인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부족민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래야 부족민들이 날 믿고 따를 것이다.’
아무칸이 지금까지 족장의 지위를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카이로스로부터 배운 리더십 덕분이었다.
본래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들의 추구하는 제일 큰 가치는 오직 생존.
사실 부족민들이 울란바토르를 버리고, 이렇게 피난을 따라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평소 유목민들의 가치관과 행동패턴을 떠올려 보면, 족장인 아무칸을 배신하고 단체로 항복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놈들이 공격해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힘을 비축해두어라. 나는 아직 버틸 만하다.”
“족장….”
“며칠만 더 버티면 된다. 지원군이 올 것이다. 나를 믿고, 조금만 더 참아라. 이 고난의 행군은 머지않아 끝이 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전사는 아무칸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부족의 우두머리인 족장이 확신에 찬 어조로 믿음을 주니,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버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부족민들에게도 전하라.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내에 모든 시련이 끝날 것이라고. 그러니 나 또한 이곳에서 버티는 것이라고.”
“예!”
그러나 막상 아무칸의 속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위기다. 이대로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아무리 우리 부족민들이라 할지라도 산을 뛰쳐나가 놈들에게 항복할 텐데… 전하… 부디 빨리 와주십시오.’
사실 아무칸도 스스로 확신이 있어서 부족민들에게 믿음을 심어준 게 아니었다.
아무칸도 주군인 오토를 믿고 무지성으로 버티는 중이었던 것이다.
* * *
한편,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 토그릴의 기분은 매우 더러웠다.
“호에야스 장군이 시체로 발견되었답니다.”
“쿠칭 장군이 실종되었답니다.”
“적 기병대가 우리 후방을 휘젓고 있습니다. 수는 적으나 전투력이 워낙 강하고, 기동성이 좋아 계속 당하고 있습니다.”
토그릴은 콩기라트 부족이 피난한 산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차피 콩기라트 부족은 독 안에 든 쥐.
굳이 힘들게 산에 들어가서 토벌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케레이트 부족의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자꾸만 후방에서 전해져 오는 나쁜 소식들이 토그릴을 불쾌하게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토그릴은 이를 부득 갈았지만, 지금으로서는 후방을 교란하는 적 소수정예를 토벌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든 병력을 산을 포위하는데 배치해놓았기에, 술래잡기를 할 여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합니까? 족장?”
“그냥 두어라.”
“예…?”
“지금은 쥐새끼들을 쫓아다닐 여력이 없다. 병력을 빼면 포위망이 느슨해진다. 그러면 콩기라트 부족 놈들이 탈출할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그냥 놈들이 날뛰도록 내버려 두어라. 어차피….”
토그릴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하루 이틀이면 콩기라트 부족 놈들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산을 내려와 항복할 것이다. 그럼 아무칸 그놈과 몇몇 충성스러운 전사들만 남을 터. 잔챙이들은 그 뒤에 처리하면 그만이다.”
“알겠습니다.”
“기분을 풀어야겠으니 술과 고기를 대령하라.”
“예, 족장.”
토그릴은 호화롭게 꾸민 텐트 안에서 술과 고기를 마음껏 퍼먹으며, 아리따운 무희들까지 불러다가 유흥을 즐겼다.
콩기라트 부족민들이 제풀에 지쳐 항복해올 때까지 그저 유흥이나 즐기며 시간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 * *
콩기라트 부족이 산에 들어가 버티는 사이 카이로스, 카미유, 마검사들은 엄청난 활약을 했다.
후방교란·요인암살·정찰 등 수없이 많은 특수작전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대세에 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케레이트 부족이 총공세를 펼치고, 콩기라트 부족이 산으로 피난을 간 이상 큰 효과를 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작전이 끝난 후.
“…진작 사표를 냈어야 하는데.”
카미유가 바위에 털썩 등을 기대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사표 한 장씩은 품고 사는 법.
기사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전문직(?)이긴 했지만, 기사 역시 나라에서 월급을 타는 공무원.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악덕 사장(?) 오토에게 혹사당하는, 이 시대의 월급쟁이였던 것이다.
지난 열흘 동안 얼마나 혹사를 당했으면, 평소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갈하고 깔끔한 몸가짐마저 거지꼴이 되어 있을 정도.
“끌끌.”
카이로스가 그런 카미유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고로 군주 잘못 만난 기사는 고생길이 열리는 법이니라.”
“…….”
“튈 수 있을 때 튀었어야지. 여기까지 온 이상 네놈의 어리석음을 탓해라. 끌끌끌.”
“어르신의 기사들도 고생 꽤나 했습니까?”
“으음.”
카이로스는 카미유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못했다.
“고생이라… 끌끌. 그랬지. 그 녀석들이 고생 좀 했지. 군주 잘못 만난 죄로.”
카이로스는 뇌리에 과거 전 대륙을 누비며 함께 제국을 일구었던 부하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백골이 되어버렸을 테지만….
‘기껏 고생했는데 부귀영화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짐이 미안하다. 모든 게 짐의 잘못이다. 그 찢어 죽이고 씹어 먹어도 모자랄 놈에게 배신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네 녀석들이 그리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진 않았을 터인데.’
평생 카이로스를 따라다니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던 부하들은, 결국 아르곤 대제에 의해 숙청당했을 게 분명했다.
고생만 실컷 시켜 놓고 호강시켜주지는 못한 것이다.
“네 녀석은 주군 따라 고생만 하지 마라. 아니다 싶으면….”
“어르신.”
카미유가 카이로스의 말을 끊었다.
“기사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음?”
“기사가 군주에게 충성하는 이유는 기사도 때문이지, 군주를 위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군주가 설령 인두겁을 쓴 악마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충성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이유입니다. 거기에 부와 명예 따위는 없습니다.”
“…그런가.”
“군주가 모실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면, 기사는 그걸로 족한 겁니다. 단언컨대, 기사에게 그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끌끌.”
카이로스가 피식 웃었다.
카미유의 말을 듣고 가슴 속에 맺힌 죄책감을 아주 조금나마 덜어낼 수 있었기에….
‘네 녀석들은 짐과 함께 하면서 즐거웠느냐? 짐은 모실만한 가치가 있었어? 부디 그랬기를 좋으련만. 그건 짐의 욕심이고, 바람에 불과할 테지.’
카이로스는 옛 부하들을 만난다면 그걸 꼭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대답해 줄 부하들은 이미 백골이 되어 버렸으므로….
“하여간에 네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골치 아픈 놈들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뺀질이가 복이 많구나. 네놈 같이 고지식하고 앞뒤 꽉 막힌 기사를 가졌으니.”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끌끌끌!”
카이로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 쉬었노라. 슬슬 가자.”
“또 갑니까?”
카미유는 솔직히 이쯤 했으면 구를 만큼 굴렀다고 생각했다.
수십 번의 특수작전을 성공시켰음에도 전쟁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하고 있었기에, 회의감이 든 것이다.
“왜? 똥개훈련이라서 무의미한 저항 같아서?”
“솔직히 그렇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
“이쯤 후방을 흔들었으면 병력을 좀 뺄 만도 하다. 그러나 우직하게 버티는 걸 보면,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 놈이 이 정도 피해는 감수하기로 했다는 증거일 테지.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다.”
“뭡니까? 그게?”
“곧 뺀질이가 군대를 끌고 올 테니, 우리는….”
카이로스가 씨익 웃었다.
“놈들이 뺀질이가 군대를 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정보망을 차단한다.”
“정보망… 차단!”
“지금부터 놈들의 척후병, 그리고 전령들을 집중적으로 사냥할 것이다. 놈들의 눈과 귀로 흘러들어가는 정보의 흐름을 끊는 것이지. 그럼 놈들은 뺀질이의 군대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기습을 당할 것이다. 으헤헤헤헤헤!”
카이로스는 결코 힘만 센 바보가 아니었다.
본인 말마따나, 카이로스는 철퇴 한 자루와 X알 두 쪽으로 제국을 일구어낸 남자.
그건 단순히 전투만 많이 경험해보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전략·전술·정치·외교·경제 등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양의 경험치를 쌓았기에, 어떠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