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하브르 초원에서 복귀한 오토는 이오타 왕국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오토의 정책 핵심은 바로 성물이었다.
오토는 <화합의 성서>를 통해 백성들을 끊임없이 교화시켜 나갔다.
또한, 헬무트를 동쪽 국경지대의 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변경백의 결의>를 설치해 철옹성을 쌓았다.
그리고 거대한 목장을 지은 뒤 <프리아모스 테라코타>를 설치하고, 그곳에 하브르 초원의 특산품인 타타르 품종의 말들을 데려와 기르기 시작했다.
그런 뒤 콩기라트 부족의 전사들을 데려와 기병 교관으로서 이오타 왕국군의 기병들을 훈련시키도록 했다.
성물을 통해 백성들을 단결시키고, 국경을 튼튼히 하고, 기병을 육성해 군사력을 향상시킨 것이다.
그게 바로 성물이 가진 힘이었다. 게임 <영지전쟁>의 핵심 컨텐츠는 자신이 경영하는 세력을 성장시키는 것.
성물은 세력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 엄청난 도움을 주기에, 핵심 아이템이라는 걸 부정하기 힘들었다.
성물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세력의 특정 부분을 성장시키는 데 들어가는 노력이 엄청나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기초적인 기반은 다 닦은 셈이고.’
오토는 이오타 왕국이 어느 정도 국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걸 확인하고,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했다.
수련.
토그릴과의 대결에서 한 차례 위기를 겪은 것을 계기로, 스스로의 무력을 갈고닦는 데 힘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게임을 통해 이 세계를 경험했을 때에는 캐릭터를 조작하면 그만.
그러나 막상 캐릭터가 되어 싸운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기에, 오토 스스로가 경험을 쌓고 강해지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오토는 오래간만에 쿤타치 가문을 방문하기로 했다.
마침 겨울이라 딱히 할 일도 없고, 레벨이 올라 무적황제의 두 번째 권능 습득이 가능해졌기에 이참에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가자, 카미유.”
“예, 전하.”
오토는 오직 카미유만을 데리고 몰래 이오타 왕국을 빠져나가 쿤타치 가문으로 향했다.
쿤타치 가문으로 가는 길.
“왜 쥐새끼처럼 야반도주를 하시는 겁니까?”
“뭐? 쥐새끼이?”
오토가 눈을 부라렸다.
“전하께서는 명색이 일국의 왕이십니다. 그러신 분이 이 야심한 밤에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외갓집에 가시는 게 정상적이라고 보십니까? 그렇다고 백성들의 민생을 살피기 위해서 시찰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
“왜 조용히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그야 조용히 다녀와야 되니까 그렇지.”
“이유가 뭡니까?”
“대놓고 가면 외조부가 귀찮게 굴 게 뻔하잖아.”
“아?”
“아예 붙잡아 두려고 할걸? 으으. 생각만 해도 피곤해.”
현재 콘라드는 오토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커서,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콘라드에게 있어 오토는 쿤타치 가문의 미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오죽 했으면, 콘라드는 이오타 왕국에 파견한 마검사들을 통해 오토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보고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전하, 콘라드 대공 전하께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콘라드 대공 전하께서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 좀 부탁드린다고 전하셨습니다.’
‘전하, 콘라드 대공 전하께서….’
콘라드는 거의 매주 오토에게 편지를 보내 언제 쿤타치 가문에 방문할 것이냐며 닦달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오토로서는 카미유의 말마따나 쥐새끼처럼 이오타 왕국을 빠져나가 몰래 쿤타치 가문으로 향할 수밖에.
“우리가 쿤타치 가문에 가는 건 비밀이야. 알겠지? 쥐도 새도 모르게 갔다 오는 거야.”
“그럴 거면 저는 왜 데려가시는 겁니까?”
카미유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혼자 조용히 다녀오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심심하잖아.”
“…….”
“중간 중간 내 시중 들어줄 사람도 필요하고.”
순간 카미유는 욕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야만 했다.
‘이 인간이 진짜.’
이오타 왕국 근위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카미유가 할 일이 매우 많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사람을 고작 심심하다는 이유 겸 심부름꾼으로 쓰려고 불러내다니….
“왜 접니까? 카이로스 어르신 같이 할 일 없이 매일 술이나 퍼마시는 사람도 있는 판국에?”
“걔는 시끄럽잖아. 조용히 움직일 인간이냐? 걔가? 나 왔소, 하고 깽판이나 치고 다닐 줄이나 알지.”
“아.”
카미유는 오토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카이로스는 기습작전과 암살작전에 나설 때도 매우 요란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적들에게 들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 * *
오토와 카미유는 손쉽게 쿤타치 공국의 왕궁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투시>의 스킬레벨이 올라간 덕분에 벽과 벽 너머를 꿰뚫어보는 게 가능해져서, 경비병들의 눈을 손쉽게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역>의 입구가 자리한 곳으로 나아가던 중.
“그럼, 좋은 밤 보내게. 끌끌.”
“예, 대공 전하. 푹 쉬시지요.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알겠네. 내 기다리지.”
오토는 외조부인 콘라드가 아르곤 대제의 후손 율리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걸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쟤가 왜 여기 있어?”
오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뜬금없이 나타난 율리우스가 이상했다.
물론 율리우스는 평범한 상인이 아닌 전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는 거상[巨商]이었다.
현실로 따지자면 글로벌기업의 총수인 것이다.
그래서 율리우스가 콘라드와 만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전 대륙에 걸쳐서 드넓은 인맥과 친분을 자랑하기 마련일 테니까.
그러나 오토가 가진 경험과 지식 안에서는 율리우스와 콘라드는 그렇게까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율리우스가 외조부랑 만난 모양인데?”
“율리우스라면… 그때 그 상인 말씀이십니까? 아르곤 대제의 후손이라던?”
“응.”
“만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런데. 율리우스가 워낙 뒤가 구린 놈이니까 그렇지.”
율리우스는 게임 <영지전쟁>에서 가장 이름 높은 빌런이자 악명 높은 빌런이었다.
율리우스는 조상인 아르곤을 빼닮아서, 게임 실력이 중수 이상 되는 게이머들에게 접근해 이런저런 지원을 해 주며 호의를 베푼다.
그런 뒤 신하가 되어 충성을 바치는 척하며 서서히 세력을 잠식해 나간다.
그러다가 게이머가 대륙의 패권을 거머쥘 후보가 될 정도로 성장하면, 반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게이머라면 율리우스에게 이를 갈기 마련.
오토 역시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율리우스에게 당해 본 기억이 있었으므로, 경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만 있어 봐.”
“어디 가십니까?”
“어디 가긴 어디 가. 율리우스 감시하러 가지. 뭔 꿍꿍이인지 확인 좀 해 봐야겠어.”
“저, 전하!”
카미유가 다급히 불러 세웠지만, 오토는 이미 복도를 돌아나가 사라진 뒤였다.
“…나더러 들키라는 건가.”
카미유는 오토가 자신을 버리자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카미유에게는 야시경은 있었어도 <투시> 스킬이 없어서, 벽 뒤까지 꿰뚫어보는 게 불가능했다.
즉, 이곳 쿤타치 공국의 왕궁 내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 * *
카미유를 버린 오토는 즉시 율리우스가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뒤 천장 위로 숨어들어서 율리우스의 방 바로 위쪽에 자리를 잡았다.
‘소리까지는 안 들리니까. 귀 붙이고.’
오토는 천장 속 공간에서 바닥에 귀를 딱 붙인 채 율리우스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다녀오셨습니까, 폐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웬 폐하?’
오토는 <폐하>라는 표현이 의아했다.
폐하란 오직 황제에게만 붙이는 호칭.
아무나 그렇게 부를 수 없고, 설령 부른다 한들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적어도 대륙의 3분의 1 정도는 차지한 제국의 황제쯤 되어야 붙일 수 있는 호칭이 아니던가?
“콘라드와의 이야기는 잘 끝났다.”
율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우리 상단과 거래를 트기로 했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폐하.”
“이오타 왕국의 동향은?”
“현재 내정에 집중하면서 군사력을 키우는 데 힘쓰고 있다고 합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매일 같이 체력단련에 힘쓰면서 수련 중인 것으로 파악됩니다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기사단장 카미유가 워낙에 깐깐하고 철두철미한 자라서, 왕궁의 보안이 생각 외로 철저하답니다.”
“그렇군. 정보원에게 정보 수집 활동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라고 이르라.”
“예, 폐하.”
“어차피 조급해할 것은 없다. 일단 쿤타치 가문에 줄을 대놓았으니, 앞으로 오토 드 스쿠데리아와 접점이 늘어났을 터. 천천히 지켜보도록 한다. 아직은 우리의 그릇 후보 중 하나에 불과하니,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알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검은 십자회 놈들의 동향은?”
“잠잠합니다.”
“나의 후손이여.”
“예, 초대 황제이시여.”
오토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폐하라 불린 걸로도 모자라서 초대 황제이시여? 아르곤은 자기 친동생한테 후손이라고? 이게 뭔 개소리야? 개족보도 아니고. 설마 암호 같은 건가?’
하지만 암호라기엔 어딘가 좀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초대 황제는 또 뭐고?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건가? 아닌데. 오버하우저 가문이 이렇게 김칫국이나 들이켜면서 자화자찬할 정도로 나사 빠진 놈들은 절대 아니지. 초대 황제라… 초대 황제라 불릴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초대 황제면 아르곤 대제밖에 없을 텐데?’
그때.
“대제국 크라레스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짐과 황가의 안위가 최우선일 것이다. 검은 십자회 놈들에게 우리의 정체가 들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 또 명심하라.”
“예, 폐하.”
“짐이 크라레스의 재건에 성공한다면, 가장 먼저 검은 십자회 놈들부터 뿌리를 뽑아 이 세상에 존재했는지조차 모르게 할 것이다. 짐이 살아생전에도 그리 골치 아프게 굴던 역적 놈들이 대를 이어 짐의 후손들까지 위협할 줄은 미처 몰랐도다. 다 짐의 불찰이니라.”
“그게 어찌 초대 황제 폐하의 불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패주 카이로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광신도, 추종자들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뿌리 뽑지 못하고, 오랜 세월 위협을 당한 저희 후손들의 불찰이 더 큽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시지 마십시오. 검은 십자회는 저희들이 알아서 잘 해결하겠습니다.”
“차라리 패주 카이로스가 나았구나. 비록 도망쳐 생사가 불분명했으나, 끝끝내 구차하게 굴지는 않았노라.”
“검은 십자회가 패주가 만든 비밀결사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후손들이 명맥을 이어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 없다.”
율리우스가 딱 잘라 말했다.
“카이로스는 그렇게 구질구질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사내 중의 사내다. 짐이 형님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웅이었다. 짐에게 배신당한 걸 원통해 했을지언정, 황위에 미련이 남아 구질구질하게 저항할 자는 아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검은 십자회 같은 단체를 만드는 대신 대놓고 반란군을 결성해서 짐에게 대항했을 것이다.”
그 순간.
‘헉!’
오토는 너무나도 놀라서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