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콘라드는 전투가 끝나자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쿤타치 공국의 군대는 전투지속력이 매우 뛰어났단 점이었다.
쿤타치 가문의 마검사들은 모두 마법을 익힌 마법사들이었기에, 기초적인 회복 마법 정도는 누구나가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마검사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군 병사들을 치료해 주었고, 그 덕분에 군대는 반나절 만에 어느 정도 전투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법사들의 숫자 또한 꽤 많기도 했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오토의 예상대로, 오후가 되도록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몇 날 며칠이고 안개가 자욱할 테고, 그러면 망령기사들이 대낮에도 나타나 학살을 벌일 게 분명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콘라드는 가문의 원로들, 그리고 가신들을 소집해 대책회의에 나섰다.
“…….”
“…….”
“…….”
하지만 누구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킬 뿐 이렇다 할 대책을 내어놓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책이 있었으면 35년이나 이 짓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간 수없이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부활하는 유령들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망령의 숲으로 마검사들을 보내 정찰활동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모두 실종되어 소식이 끊기기 일쑤.
이제는 안개가 짙게 깔린 날이면 늘 아예 계엄령을 내리고 오직 방어만을 하는 게 현실이었다.
“우선.”
오토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지원군을 요청했으니까, 며칠 내로 지원군이 도착하긴 할 겁니다.”
“역시 내 손주밖에 없구나. 고맙다.”
“별말씀을….”
“그리고 미안하구나. 할아비가 되어서 손주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리 도움이나 받고 있으니. 내 면목이 없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님께서 보내 주셨던 병력과 지원금 덕분에 저희 이오타 왕국도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는걸요. 게다가 저희 이오타 왕국과 쿤타치 가문이 남입니까? 저는 이오타의 왕이기도 하지만 쿤타치 가문의 소가주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도와야죠.”
“이런 기특한 녀석 같으니. 과연 내 손주로다.”
“우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방법밖에 없으니, 전투준비나 하는 게 어떨까요. 지원군이 오기 전에 안개가 걷힐지도 모르고요.”
“알겠다. 네 뜻에 따르마.”
그렇게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기로 하고, 회의가 끝났다.
별다른 소득 없이, 지난 2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 * *
오토는 서쪽 성벽 위에 올라 저 멀리 망령의 숲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워낙 짙어 숲이 잘 보이지 않았다.
스으으!
숲속에서는 소름 끼치는 귀기[鬼氣]와 차디찬 한기가 끊임없이 흘러 나와서, 성벽 위에 있는 오토의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정말 방법이 없는 겁니까?”
“없지, 지금은.”
카미유의 물음에 오토가 대답했다.
‘큰일이네. 망령의 숲을 토벌하려면 아직 이른데.’
망령의 숲을 완전히 토벌하기 위해서는 무적황제의 세 번째 권능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 번째 권능만 있다면, 이렇게 방어만 할 게 아니라 망령의 숲으로 쳐들어가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적황제의 세 번째 권능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 200레벨은 되어야 했다.
지금 오토의 레벨이 140.
60레벨을 단기간에 올리는 방법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사실상 뾰족한 수가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게다가 지금 사태도 오토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오토가 200레벨을 찍을 때까지 망령의 숲은 잠잠해야 했건만….
“복수… 복수를 원한다.”
“배신자를… 처단할 것이다.”
숲에서 망령기사들의 음산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그만해. 그만하라고.”
“으으으으으으으으.”
성벽 위 병사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다… 이런 빌어먹을!”
철푸덕!
성벽 위를 지키던 한 병사가 스스로 뛰어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고.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기에 홀린 거야.”
오토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신력이 약하거나 몸이 지쳐 있으면 홀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지.”
“이대로라면 위험합니다.”
“나도 알아. 근데 지금은 답이 없어. 그리고.”
“예?”
“아니야, 됐어.”
오토는 굳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았다.
‘귀기가 뿜어져 나오고 목소리까지 들려올 정도라고? 숲속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인데… 바깥에서까지 들리는 건 사태가 더 심각하다는 거 아닌가?’
그때였다.
“망령들의 습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기사단장이 걱정스레 말했다.
“네? 저번에도요? 최근에 또 언제 이랬죠?”
“소가주님께서 처음 이곳에 방문하셨다가 돌아가신 뒤로 며칠쯤 지나서도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피해가 상당했지요.”
“음.”
“다행히도 안개가 빨리 걷혀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보통 한번 안개가 끼기 시작하면 3일에서 1주일 정도 가죠?”
“예, 소가주님.”
“그럼 이제 시작이라는 거네요.”
“예….”
“이거 큰일인데.”
오토는 답답한 마음에 <투시> 스킬을 켜고 숲속을 한번 관찰해보기로 했다.
이번에 레벨업하면서 <투시> 스킬의 레벨도 많이 올랐기에, 탐지능력이 더욱 올라간 상태.
멀리서도 숲속을 어느 정도 들여다보는 게 가능했다.
‘어디 보자….’
과연 <투시> 스킬은 자욱한 안개를 뚫고 멀리서도 숲속을 들여다보게끔 해 주었다.
그러던 중.
‘어?’
오토의 눈앞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그건 과거의 기억이었다.
망령의 숲을 배회하는 원한 서린 악령들.
망령기사들이 살아생전 지니고 있던 단편적인 기억들이 오토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 * *
반란이 일어났다.
폐하께서 북부 장벽을 시찰하러 나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역적들은 준비를 오랜 시간 아주 철저히 했음이 분명했다.
역적들은 고작 하룻밤 만에 수도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모조리 척살당하거나 체포되었다.
수도를 장악한 것만큼이나 빠르게 군권을 장악한 역적들은, 즉시 군대를 일으켜 폐하께 충성하는 부대들을 무력화시켰다.
역적들은 북부 장벽을 시찰하고 돌아오시는 폐하를 습격했고, 이후 추격전이 벌어졌다.
폐하께서는 역적들을 피해 대륙을 벗어나 서쪽으로 피신하셨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역적들이 나라를 집어삼켰다.
폐하를 배신한 역적들의 우두머리가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후 몇 년 동안이나 폐하께서는 강림하지 않으셨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피신 중 승하하신 것인지, 아니면 패주로서 세상을 등지시고 은거하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폐하께서 돌아오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폐하를 기다리기로 했다.
폐하께서 돌아오실 날을 손꼽아, 간절히 기다리며 항쟁을 이어나갔다.
몇 년에 걸친 항쟁 끝에, 우리는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패잔병들이 된 우리는, 역적들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역적들은 집요했다.
산속까지 쫓아와 우리를 사냥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둘 쓰러져 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항쟁의 끝은 아닐 것이다.
역적들이여.
비열한 배신자여.
비록 몸뚱이는 여기서 쓰러져 백골이 될지언정, 우리의 정신만은 여기 이 땅에 고스란히 남아 불멸할 것이니.
이승을 떠도는 망자가 되어서라도 반드시 복수하리라….
우린 정처 없이 산 속을 헤맸다.
기억이 희미하다.
우리가 누구였는지.
왜 이곳을 배회하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느껴졌다.
배신자.
그가 왔다.
복수, 복수를 해야 한다.
배신자를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배신자여….
어디 있는가….
배신자를 찾아야 한다….
역적을 찾아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헉!”
오토는 순간 헤일처럼 밀려들었던 망령기사들의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괜찮으신 겁니까?”
“괘, 괜찮아. 헉, 허억.”
“뭘 보신 겁니까?”
“기억….”
오토가 카미유의 물음에 대답했다.
“망령기사들의 기억을 봤어.”
“예…?”
“잠깐만.”
오토는 카미유에 그렇게 말하고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망령기사들이 나타난 게 35년 전. 율리우스가 올해로 딱 35살 정도 됐지. 시기가 맞아. 그리고 기사단장의 말. 내가 여기 처음 방문했을 때 율리우스도 여기 있었어. 그리고 이번에도 율리우스가 여기 있다가 떠났고. 망령들이 평소보다 더 미쳐 날뛰는 이유가….’
오토의 머릿속에서 마치 퍼즐처럼 흩어져 있던 정황 증거들이 하나로 맞춰졌다.
“이제 알겠네.”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응.”
“뭘 알아내신 겁니까?”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지금 당장 본국에 전령을 보내. 카이로스를 불러오라고.”
“……?”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카이로스야. 그 양반밖에 없어.”
오토는 확신했다.
카이로스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적임자라고.
* * *
오토의 명령을 받은 이오타 왕국군은 즉시 출동준비에 나섰다.
쿤타치 가문까지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출동 지역이 쿤타치 공국이었으므로, 전쟁 물자를 챙길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오토가 최소한의 물자만 챙겨서 최대한 빠르게 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하지만 출동 명령은 불과 2시간 만에 갑자기 취소되었다.
카이로스를 최대한 빠르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데려올 것.
만약 카이로스가 움직이길 거부한다면… (중략)
- 오토 드 스쿠데리아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