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망령기사들을 바라보는 카이로스의 눈빛은 복잡했다.
저들은 450년도 더 전에 카이로스와 함께 대륙을 누비며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이었다.
카이로스가 황제가 되기 전 운영했던 용병단에 속했던 진짜배기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전우들이 이승을 떠도는 망령이 된 꼴을 보니, 카이로스의 속이 썩어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꽈악.
카이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짐이 멍청하게 속지만 않았어도… 네 녀석들이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카이로스는 옛 부하들이 망령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꼈지만, 애써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금은 개인의 감정보다는 옛 부하들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으므로….
씨익.
카이로스가 애써 웃으며 망령기사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 옛날 함께 대륙을 누비던 그때 그 말투로.
“야 이 새끼들아. 미안하다. 내가 좀 늦었다. 많이들 기다렸냐?”
그러자 망령기사들이 내뿜던 그 무시무시한 귀기[鬼氣]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형님.”
“오빠.”
“주군.”
고위급 망령기사인 아가토, 힐데가르트, 막시무스가 카이로스를 향해 다가가 말했다.
“오래간만이다. 다시 볼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이렇게라도 만나서 반갑다.”
카이로스가 자신의 손과 발 같았던 옛 전우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가셨던 겁니까.”
“기다렸어요.”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아가토, 힐데가르트, 막시무스가 카이로스를 책망했다.
“미안하다. 그렇게 됐다. 일단 살아서 복수하자는 생각으로 반란군 놈들을 뿌리치고 도망치다가 꼴사납게 뒈져 버렸다. 늙어서 그런지 상처가 잘 안 낫더라.”
머쓱.
카이로스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근데 니들은 뭐 좋은 두목이라고 아직까지 날 기다리고 그러냐? 뒈진 거 같으면 각자 살길 찾아 떠났어야지. 미련하게 이게 뭐냐?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자식들아.”
그러자 아가토, 힐데가르트, 막시무스가 대답했다.
“주군을 어떻게 안 기다립니까? 언젠간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오라버니를 어떻게 안 기다려요?”
“형님께서 돌아오시지 못하더라도 복수는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카이로스에 대한 망령기사들의 충성심.
그리고 아르곤 대제에 대한 복수심은 죽음조차도 막을 수 없는 것.
비록 육체는 사라졌을지언정….
“그래도 이건 아니다. 죽었으면 곱게 가야지. 이렇게 이승을 떠돌면 되겠냐. 쉴 때는 쉬어야 하는 거다. 그러니까….”
그때.
스으으!
짙은 안개가 걷히며 하늘에서 강렬한 볕이 내리쬐었다.
지난 며칠간 자욱하게 깔렸던 안개가 비로소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스르르….
그러자 망령기사들의 형체가 하나둘 사라져 갔다.
“자, 잠깐! 야 이 자식들아! 어디 가냐! 아직 할 말이 남았단 말이다!”
카이로스는 옛 전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자 엄청나게 당황했다.
어렵게 다시 만나 회포라도 좀 푸나 했더니, 재회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당황하지 마라.”
오토가 카이로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게 정말이냐?”
“숲속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안개가 걷힌 이상 망령기사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망령의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가자.”
“지금 말고. 이따가.”
“짐의 부하들이 망령이 되어서 떠돌고 있는데 가만있으란 말이냐!”
카이로스가 버럭 오토에게 화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이로스로서는 어떻게든 옛 전우들을 달래 영면에 들도록 해 주고 싶었으니까.
“숲속에 니 부하들만 있는 거 아냐.”
“음?”
“들어가려면 군대를 끌고 가야 돼. 그러니까 좀 기다려. 다들 지쳐 있는 거 안 보여?”
오토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지난 이틀간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틀 밤을 꼬박 새워 가며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한 덕분에, 쿤타치 공국의 군대는 매우 지쳐 있었다.
수면 부족으로 인해 너나 할 것 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어서, 도저히 전투를 치를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좀 쉬다가 날씨 좋으면 그때 들어가도 돼.”
“알겠다.”
오토가 상황을 설명하자 카이로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맘 같아선 혼자서 망령의 숲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로스도 전성기 시절 지녔던 힘에 비하면 10분의 1도 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혼자서 망령의 숲에 들어갔다간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오토의 말마따나 잠시 기다렸다가 쿤타치 공국의 군대와 함께 가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 * *
오토는 휴식을 취하는 한편 카이로스에게 자초지종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저 숲에 웬 갑옷이 하나 굴러다니는데, 그게 주변 원혼들을 불러 모은다? 그래서 내 부하 놈들이 근처를 떠돌다가 저 숲에 모여서 망령이 됐고?”
“그래.”
모든 일에는 그 원인이 있는 법.
카이로스의 옛 부하들이 원혼이 되어 떠돌게 된 건 충성심과 복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원혼들이 망령기사가 되어 물리력까지 발휘할 수 있게 된 원인은 <원혼귀갑>이라는 아이템 때문이었다.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 형태의 <원혼귀갑>은 한 많은 원혼들을 끌어당겨서 부리는 권능이 담긴 전설급 아이템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망령의 숲에 버려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로스의 옛 부하들의 영혼이 그 힘에 이끌려 망령기사가 되었던 것이다.
“원혼귀갑 때문에 짐의 부하들뿐만 아니라 다른 악령들도 득실거린다 이 말이냐?”
“그렇지. 그래서 군대가 필요한 거고.”
“이런 빌어먹을! 그런 귀신 들린 고철덩어리 때문에 짐의 부하들이 안식을 못 하고 이승을 떠도는 신세가 되다니!”
“말은 바로 하자. 정확히는 충성심과 복수심 때문이지. 원혼귀갑이 없었어도 숲을 떠돌아다녔을걸?”
“그, 그런 것이냐?”
“아무튼 하루 이틀 정도만 더 기다려. 날이 맑고 화창할수록 숲속에 있는 악령들의 힘이 약해지니까.”
“알아들었다.”
“아, 그리고….”
“음?”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마는 것이냐?”
“나중에 얘기해 줄게. 지금은 신경 꺼.”
“……?”
“나 좀 쉰다.”
오토는 사실 율리우스가 아르곤 대제라는 충격적인 비밀까지는 카이로스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지금 말해 주었다간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뛸 게 뻔했으므로, 망령의 숲 토벌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카이로스 황제 되십니까?”
“음?”
“참으로 반갑습니다. 저는 콘라드 폰 쿤타치라고 합니다. 이 녀석의 할아비 되는 사람이지요.”
“카이로스다.”
카이로스는 나이 지긋한 콘라드에게조차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하기야, 전직 황제 출신에 500년 이상의 세월을 산 카이로스에게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역사서에서나 볼 법한 분을 이리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
“혹여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담소나 좀 나누시지요.”
“짐이 지금은 좀 심란하니….”
“100년산 위스키입니다. 매우 귀한 위스키이지요.”
“한잔하지.”
원래 <지금은 좀 심란하니 꺼져라>라고 퉁명스레 쏘아붙이려던 카이로스는, 콘라드가 꺼낸 뇌물을 보고 흔쾌히 대화를 나누는 걸 허락했다.
‘하여간 술이라면 환장한다니까.’
오토는 그런 카이로스의 중증 알콜중독자 같은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는 딱히 할 일이라는 게 없었으므로, 적당히 컨디션 관리만 한다면 술을 마시든 말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카이로스처럼 마나의 사용에 능숙한 이들은 알콜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했고.
* * *
이틀 후.
언제 짙은 안개가 세상을 뒤덮었느냐는 듯 화창한 날씨가 찾아왔다.
오토는 날씨를 확인하고는 즉시 망령의 숲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소집했다.
망령의 숲 토벌 작전에는 일반 병사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적들이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악령들이었기에, 평범한 병사들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토벌 작전에는 쿤타치 공국의 정예인 마검사, 마법사, 그리고 기사들만이 대거 투입되었다.
오토는 약 500여 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망령의 숲으로 들어갔다.
스으으으!
망령의 숲은 화창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빛의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차가운 한기가 가득했다.
오죽했으면 기온이 매우 낮아서, 허연 입김이 풀풀 새어 나올 정도였다.
“기분 나쁜 숲입니다.”
카미유가 말했다.
“그냥 싹 다 불 질러 버리면 안 되는 거냐?”
카이로스는 특유의 성격답게 과격한 발언을 했다.
“불이 붙어야 불을 지르지. 습기도 많고 온도도 낮아서 불붙여 봤자 얼마 타지도 않아. 숲 전체에 악령들이 내뿜는 귀기가 서려 있어서 기름을 들이부어도 불이 금방 꺼진다고.”
“그러냐?”
“응.”
오토가 불을 질러 모조리 태워 버린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한 해결 방법을 쓰지 않은 이유는, 다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임으로 악령의 숲을 토벌할 당시에도 불을 붙여 보았지만, 불이 붙기는커녕 아까운 기름과 장작만 소모했던 것이다.
“아무튼, 곧 악령들이 나타나서 공격을 퍼부을 테니까 조심해. 한두 마리가 아니….”
그때.
“꺄아아아아아아악!”
“가자… 같이… 저승으로….”
“모두 죽일 것이다….”
곳곳에서 원한 가득한 원귀[冤鬼]들이 튀어나와 오토 일행을 습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아생전에 각자 다른 시대에 다른 삶을 살았던 악령들이었기에, 그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다.
개중에는 쿤타치 가문의 명령을 받고 악령의 숲에 정찰을 왔다가 전사한 마검사, 마법사, 기사도 있었다.
“흐읍!”
오토는 악령들이 나타나자마자 크게 들숨을 들이마셨다가, 확 내뱉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군을 강화시켜 주는 <용맹의 함성>과 적에게 슬로우 효과를 거는 <야만의 함성>을 내질러 버프와 디버프를 동시에 시전한 것이다.
“악령들을 처단하라!”
“당황하지 마라! 우리에겐 소가주님이 계신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아군들은 오토의 버프와 디버프에 힘입어 악령들과 맞서 싸웠다.
“이미 죽은 자를 또 죽일 수는 없는 법….”
“너희들의 최후는 결국 우리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뿐이다….”
하지만 죽이고 죽여도 악령들은 끊임없이 부활해 아군을 공격해 왔다.
이게 망령의 숲이 무서운 이유였다.
악령들이 끊임없이 부활해서 공격해 오기에, 이곳에 발을 들인 사람은 개미지옥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싸우다 지쳐서 결국 악령들의 손에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아주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린 가자.”
오토가 카미유와 카이로스를 돌아보았다.
“전투가 벌어지는데 우리가 빠집니까?”
“그게 뭔 소리냐?”
카미유와 카이로스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전투력이 센 오토 일당이 빠진다면 전투가 많이 불리해지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가 아니던가?
“계속 싸우면 한도 끝도 없어! 우린 아군이 시간을 벌어줄 동안 쭉 가야 돼!”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일 먼저 숲속 깊은 곳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