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제가 그럼 리드할 테니까, 적당히 발만 맞추시면 됩니다.”
“알겠다.”
“자 그럼….”
오토가 엘리제의 허리에 손을 올려놓는 시늉을 했다.
목이 뎅겅 날아갈 게 두려워서, 감히 이 무시무시한 여자의 허리를 휘감지는 못하고 한국식 <매너손>을 한 것이다.
“뭐하나.”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네?”
“왜 내 허리를 감싸지 않는 것이지?”
“그, 그게….”
“설마 나와 춤을 추는 게 싫은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럼 잡아라. 우린 약혼한 사이다. 이 정도쯤은 괜찮다.”
“예!”
오토는 군기가 바짝 들어서, 엘리제의 허리를 팔로 휘감았다.
‘헉.’
엘리제의 허리는 돌처럼 단단한 듯싶다가도 부드러운가 싶다가도 낭창낭창 탄력이 넘치는 기이한 느낌(?)이었다.
“제가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움직이시는 겁니다.”
“알겠다.”
“뭔가를 할 필요는 없으세요. 그냥 흐름에 맞춰서 천천히 걷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명심하겠다.”
“그럼….”
오토는 기억을 더듬어 춤추는 법을 떠올렸다.
사실 오토도 춤을 춰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진짜 오토는 춤을 춰 본 적이 있었고, 교습을 받아 본 적도 있었다.
그러니 기억을 떠올리기만 하면, 춤을 추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하나~ 두울~ 셋~ 쿵짝짝~ 쿵짝짝~”
오토가 엘리제를 리드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그러자 엘리제가 휘청휘청 불안불안한 발걸음으로 오토의 스텝에 발을 맞추었다.
“이, 이게 맞나?”
“네, 잘하고 계세요. 아직 힐에 적응하지 못하셔서 어색한 것뿐이니까 당황하지 마세요.”
“알겠다.”
엘리제가 입을 꽉 다물고 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그런 표정 좀 짓지 마요.’
엘리제의 얼굴은 마치 얼음장처럼 경직돼 있었고, 입은 꽉 다물었으며, 부릅뜬 눈은 마치 살기를 뿜어내는 듯했다.
그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오토는 엘리제의 얼굴을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수련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토는 엘리제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역시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리드하려고 노력했다.
‘시, 실수하면 뒈져.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이게 춤을 추는 건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외줄타기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긴 했지만.
* * *
무도회가 시작된 뒤에도 오토와 엘리제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처음에는 다들 춤을 추느라 파트너에게 집중했지만, 이내 곧 오토·엘리제 커플에게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오토·엘리제 커플은 이내 곧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또각또각!
휘청휘청!
힐에 적응하지 못한데다가 난생처음으로 춤을 춰 본 엘리제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 딴에는 진지하게 임한다고 잔뜩 굳어 있는 표정 역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큭큭큭. 저게 뭐야.”
“교양이라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없군.”
“예쁘면 뭐 해. 살찐 거위처럼 뒤뚱대는 꼴이라니.”
“킥킥킥!”
“나무토막도 아니고 저게 뭐야.”
몇몇 생각 없는 사람들이 소곤소곤 엘리제를 비웃었다.
“쿵짝짝. 쿵짝짝.”
하지만 엘리제는 신발에 적응하고 오토의 스텝을 따라가느라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기에, 미처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토는 달랐다.
‘이 새끼들이.’
오토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았다.
사람이 웃기면 웃을 수 있다.
대놓고 모욕을 준 게 아니라면, 뒤로 속닥속닥 비웃을 수도 있다고 오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일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
‘이것들이 누굴 죽이려고 입을 놀려? 내 목 날아가면 니들이 책임질 거야?’
오토에게 있어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만약 엘리제가 저들이 소곤대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기분이 나빠져서 칼부림이라도 난다면?
오싹!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 좋은 날 파티장이 피바다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미유! 도와줘!’
오토가 카미유에게 눈짓을 보냈다.
‘왜 그러십니까?’
카미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네.’
오토가 슬쩍 눈짓으로 엘리제를 비웃는 이들을 가리켰다.
슥슥!
뒤이어 오토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
정말 다행히도, 눈치 빠른 카미유는 엘리제를 비웃는 자들을 처리하라는 오토의 신호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조취를 취했다.
“전하께서 입을 가볍게 놀리는 자들을 끌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라.”
카미유는 즉시 콘라드에게 보고한 후 기사들을 움직여 엘리제를 비웃은 자들을 조용히 체포했다.
“잠시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음? 무슨 일이지?”
“소가주님의 명령입니다. 잠시 따라오시지요. 무도회가 끝나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오! 그런가? 일단 알겠네.”
그렇게 엘리제를 비웃은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사들에 의해 아주 조용히 파티장에서 내보내졌다.
‘휴. 다행이다.’
오토는 입을 가볍게 놀린 자들이 파티장을 하나둘 떠나는 걸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르륵….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바지를 적셨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사뿐사뿐~
엘리제는 어느새 힐에 적응하고 스텝까지 완벽하게 익혀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몇 분이 지나자 오토만큼이나 춤을 능숙하게 추었고, 몇 분이 더 지나자 평생 춤을 춰온 사람처럼 아주 훌륭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진짜 어마어마하네.’
오토는 음악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서너 가지 춤을 완벽하게 마스터해낸 엘리제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괜히 검술의 천재이자 세계관 최강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엘리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춤 동작들을 마스터한 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움직임이든 한번 스윽 본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현실에서도 수준 높은 댄서들 중에서는 한번 본 안무를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드물지 않았으니, 엘리제가 춤에 익숙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어떤가?”
“훌륭하십니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 잘 추시는데요?”
“그, 그렇군. 칭찬 고맙다.”
뭐야?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알림: 당신에 대한 엘리제의 호감도가 30 올랐습니다!]
[알림: 당신에 대한 엘리제의 호감도 상태가 <이런 얼굴만 번지르르한 쓰레기가 내 약혼자?>에서 <날 칭찬해 준 건 니가 처음이야>로 변경되었습니다!]
‘엥? 갑자기?’
오토는 엘리제가 왜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제의 입장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엘리제는 날 때부터 천재였고, 지금까지 쭉 천재였다.
그러다 보니 엘리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늘 감탄, 존경, 두려움, 경악 등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뛰어나다 보니 오히려 칭찬을 들어볼 기회가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게 춤이라는 건가?”
“예?”
“막상 경험해 보니 즐겁군.”
“그, 그러세요?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하하하하….”
오토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휴우!”
그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제 표정도 좀 여유롭게 푸시는 게 어떨까요?”
“음?”
“너무 집중하셔서 그런지 눈빛도 강렬하시고 표정도 경직돼 계십니다. 좀 부드럽게. 예, 그렇게요.”
“이제 됐나?”
“완벽합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건 그렇고 잠시 쉬실까요.”
“벌써 쉬는 건가.”
“화장실 좀….”
“다녀와라.”
오토는 엘리제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마자 성큼성큼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그건 도망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역시 형밖에 없어. 정말 고마워.”
오토가 파티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미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예?”
“방금 우리 다 뒈질 뻔했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중에 따로 얘기해 줄게. 아참. 그건 그렇고. 아까 웃은 새끼들 어딨어.”
“따로 방에 집합시켜 놨습니다.”
“거기 어디야?”
“저쪽 회랑 끝에 자리한 소규모 연회장입니다.”
“알겠어.”
오토는 카미유가 가리킨 소규모 연회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어 <각성의 부지깽이>를 꺼내들었다.
“이것들이 날 암살하려고 해? 니들 다 뒈졌어.”
오토는 입을 함부로 놀린 사람들을 결코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 * *
“오! 소가주님! 무슨 일로 소인을 부르셨는… 커헉!”
오토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던 시장은, 난데없이 날아온 부지깽이에 주둥이를 얻어맞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우수수!
그런 시장의 입에서 누런 이빨이 마치 옥수수 알갱이처럼 뿜어져 나왔다.
“……!”
“……!”
“……!”
난데없는 폭력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니들 오늘 제삿날인 줄 알아.”
오토는 그렇게 선언하고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지깽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캬악!”
“제, 제발 살려 주… 으악!”
그렇게 한차례 무시무시한 매타작이 지나고 난 뒤.
퍽!
“꺄아아아악!”
“어어? 움직이면 허리 다쳐? 딱 대.”
“저, 전하! 제발 살려 주세요!”
“대라고 했다.”
퍽!
“꺄악!”
퍽!
“어쭈? 엉덩이 내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처맞아야지.”
퍽!
“크아악!”
퍽!
“이것들이 아주 미쳐 가지고.”
오토는 입을 가볍게 놀린 자들을 줄지어 엎드려 뻗치게 해 놓고, 손수 줄빠따를 쳐 그들을 응징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함부로 입을 놀린 덕분에 어떠한 참사가 일어날 뻔했는지를 떠올리면, 봐주고 싶어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 치 혀 놀림으로 대학살을 불러일으킬 뻔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부터 엘리제 님께 주둥이 함부로 놀리는 놈들 있으면, 그땐 빠따 정도로 안 끝날 줄 알아라. 다음에는 구덩이에 파묻은 다음에 얼굴에 꿀을 잔뜩 발라 줄 거야. 달달하게. 그 다음엔 정글에서 서식하는 불개미 수억 마리를 풀어줄 거고.”
오토가 으름장을 놓자 입을 가볍게 놀린 자들은 오싹 소름이 끼쳐서 입을 꽉 다문 채 공포에 떨었다.
오토의 음성에서 결코 협박이 아니라는 감정이 뚝뚝 묻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 * *
“오래 걸렸군.”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온 오토에게 엘리제가 말했다.
“헉! 저, 저는 빨리 온다고 온 건데! 오래 기다리시게 한 거라면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한다. 큰 거라면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으니까.”
“예?”
“혹시나 해서 조언하자면, 큰 걸 볼 때도 주변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그, 그게 무슨 말씀….”
“배변 활동도 인간이 가장 방심하는 때다. 노련한 암살자들은 화장실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는 경우도 있다.”
“…….”
“장벽 너머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아, 예.
똥 싸다가 황천길로 갈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확실히 평범한 여성분으로부터 들은 수 있는 조언은 아니네요.
하하하….
“받아라.”
엘리제가 하필이면 제일 독한 위스키를 잔이 넘치도록 한가득 따라주었다.
뭐야?
마시고 죽으라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아까는 고마웠다. 덕분에 난생처음 춤이라는 걸 춰 봤다. 색다른 경험이더군.”
“즐거우셨으면 다행입니다.”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다.”
“예?”
“문득 내 검술에 춤의 우아함과 부드러움 가미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 그래서요?”
“한 층 더 강해질 길을 본 느낌이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수련에 적용해 볼 계획이다.”
제발 그런 데서 깨달음 좀 얻지 마!
어떤 미친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춤을 추하다 깨달음을 얻어!
‘…진짜 어질어질하네.’
오토는 훅! 하고 끼쳐오는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