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슥, 스윽.
엘리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오토의 몸을 차가운 물수건으로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마저 닦아 주기까지 했다.
“음냐음냐.”
그러자 펄펄 끓던 열이 어느 정도 식었는지, 오토의 표정이 조금은 평온해졌다.
엘리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으으.
엘리제는 푸른 마나가 은은하게 맺힌 손으로, 오토의 몸 구석구석을 주물주물 마사지를 해 주었다.
엘리제의 손을 통해 오토에게 전해진 마나는, 피부와 근육에 스며들어 회복을 도와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관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노폐물을 제거해 주기까지 했다.
“약혼자. 잘 회복하는 것도 훈련이다. 그래야 최상의 컨디션으로 다시 수련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끼이익.
문득 인기척을 느낀 카미유가 침실 문을 열었다가, 오토를 마사지해 주던 엘리제와 눈이 딱 마주쳤다.
“……!”
소스라치게 놀란 카미유.
‘벌써…?’
카미유는 엘리제가 오토를 잡아먹으려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속옷 바람인 오토.
그리고 그런 오토를 주무르는 엘리제.
아무리 봐도 그렇고 그런 장면으로밖에는….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엘리제가 카미유에게 말했다.
“조, 좋은 시간되시길.”
카미유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뒷걸음질 쳐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녀석은 잠들었는가?”
때마침 콘라드가 오토의 침실을 방문했다.
오토가 걱정되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다.
“자네 고생이 많구먼. 그냥 편히 쉬지 그러는가. 어차피 이곳은 우리 기사들이 철통같이 지킬 터인데.”
“아, 예.”
“녀석은 잘 자고 있는가? 끙끙 앓지는 않고? 듣자 하니 약을 타 갔다던데.”
“그것이….”
“우리 손주 녀석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차 들렀다네.”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안에 엘리제 아가씨께서 계십니다.”
“뭐, 뭣이?!”
“그, 그렇게 됐습니다.”
카미유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콘라드의 시선을 피했다.
“허어. 뭐 이리 빠르다는 말인가?”
“요즘 젊은 남녀들은 다 빠르다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이란.”
콘라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한편, 오토는….
“으음. 거, 거긴. 안 돼요. 흐응. 너, 너무. 흐응. 찌릿찌릿. 흐으으응.”
엘리제는 오토가 갑자기 야릇한 신음을 내자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곧 신경을 꺼 버렸다.
그러던 중.
“으음?”
잠에서 깬 오토가 슬며시 눈을 떴다.
“……!”
오토의 눈과 엘리제의 눈이 딱 마주쳤다.
퍼억!
엘리제가 오토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꽥!”
오토는 엘리제의 주먹에 정수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 후 엘리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한참이나 오토의 몸 구석구석을 마사지해 주었다.
그런 엘리제가 가장 집중적으로 마사지해 준 부위는….
“평소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많이 뭉쳐 있군. 이러면 머리가 자주 아플 텐데.”
엘리제는 오토의 머리와 뒷목을 집중적으로 주물러 주었다.
오토의 머리 주변 근육들은 엄청나게 경직되어 있었다.
평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던 중 인상을 쓰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토는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두통을 호소하곤 했다.
“머리 주변 근육이 뭉쳐 있으면 두통이 심할뿐더러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 검술이 더 발전하려면 뇌의 능력이 중요하다. 마나홀. 심장. 그리고 뇌. 이 세 개의 코어가 고루 달달해야 새로운 경지가 열리는 법이다.”
“음냐음냐.”
“차근차근 가르쳐 줄 테니 지금은 푹 자도록.”
엘리제는 오토의 머리 주변 근육들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다시 옷을 입혀 준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홀연히 오토의 침실을 떠났다.
새근새근.
덕분에 오토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더는 끙끙 앓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사실은 엘리제에게 정수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것에 가까웠지만….
* * *
다음 날 아침.
“크으으으으으!”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한 오토는 크게 기지개를 쭉 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
오토가 쾌활하게 카미유에게 인사했다.
“잘 잤더니 몸이 다 개운하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날아갈 것 같아!”
“피곤하셔야 정상 아닙니까?”
“응? 내가 왜?”
“간밤에 큰일을 치르셨는데….”
“뭔 헛소리야.”
오토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게 뭔 개소리냐는 듯 카미유를 흘겨보았다.
“진짜 오랜만에 푹 자서 기분 좋으니까 헛소리하지 마.”
“…….”
“역시 사람은 숙면을 취해야 한다니까?”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뿐사뿐 경쾌한 발걸음으로 아침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로 향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까?”
“아무 일?”
“그러니까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냐고 여쭙는 겁니다.”
“일이 있긴 뭐가 있어. 그냥 푹 잤지.”
“예….”
“꿈을 꾸긴 한 것 같긴 한데.”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엄청난 미녀가 나를 덮치는 꿈? 근데 기억은 잘 안 나. 되게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
“그래도 중간에 끊겨서 다행이지. 이 나이 먹고 몽정하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야.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혼자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몰래 속옷이나 빨고 있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쪽팔리겠어?”
“그거 꿈 아니….”
“으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미유는 <그거 꿈 아닙니다만?>이라고 이야기해 주려다가 꾹 참았다.
‘설마 자면서 당하신 겁니까? 맙소사.’
카미유가 어마어마한 사실에 어질어질해할 때.
“전하, 괜찮으십니까?”
오토의 숙소를 지키는 마검사 중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예? 갑자기 왜요? 저 괜찮은데?”
“다름이 아니라… 간밤에 침입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네?”
“숙소 주변을 경계하던 기사 스무 명이 기절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헉?”
“다행히 전원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머리에 큰 혹이 나 있다는 것 빼면 별문제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경호에 구멍이 뚫린 건 큰일인지라….”
“전 멀쩡한데요? 좀 소름 돋긴 하네요.”
오토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기에 오토를 암살하려는 암살자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경호 인력을 늘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아닙니다. 다들 저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신데요. 부상당한 기사들 치료 잘 해 주세요. 저도 각별히 조심할 테니.”
“소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오토가 카미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밤에 뭔 일 있었어?”
“없었습니다.”
“그래? 이상하네.”
“저도 신경 더 쓰겠습니다.”
…라고 말하긴 했지만 카미유는 솔직히 자신 없었다.
‘그분을 어떻게 막습니까?’
아무리 카미유라 한들 작정하고 오토의 숙소로 밀고 들어오는 엘리제를 막을 자신 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 * *
그날 오후.
엘리제와 지안카를로는 쿤타치 공국을 떠났다.
장벽 너머 야만인들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북부대공과 그의 손녀였기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장벽 너머에서는 아라드 제국군과 야만인들 사이에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기도 했고.
“한 달 뒤에 보자.”
엘리제가 오토에게 재회를 약속했다.
“어… 그게… 제가 이래 봬도 작은 왕국의 왕이라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걱정 마라. 내가 널 찾겠다.”
“네? 하지만 엘리제 님께서도 바쁘시잖아요.”
“휴가를 쓰면 된다.”
“…….”
“안 쓴 포상휴가가 많아서 한 달에 한 번쯤은 널 보러 올 수 있다.”
“하하… 하하하….”
“받아라.”
엘리제가 오토에게 거무튀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고리를 내밀었다.
[쫓기는 자의 발찌]
설명 : 발에 차는 발찌. 착용감이 그리 좋지는 않다.
타입 : 액세서리 (발찌)
등급 : 유니크 (세트 아이템)
내구도 : 1 / 1
효과 : <쫓기는 자의 나침반>과 한 세트를 이루는 발찌. 언제든 위치추적을 당할 수 있다.
주의 : 강제로 해제하려 했다간 폭발이 일어나 발목을 잃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