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117화 (118/401)

117화

‘그럼 쿠란 어르신이 내 영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는 거네?’

물론 고대문헌에 적힌 내용이라 했으니 100퍼센트 사실일 리는 없었다.

왜?

옛날 자료니까.

기술이든 자료든 뭐든 최신의 것이 정확하고 좋은 것이니, 옛날 자료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건 바보 같은 짓 아니겠는가?

게다가 알퐁달 어르신이 본 자료면 드래곤이 직접 쓴 것도 아닐 테고, 어디까지나 인간의 판단하에 쓰인 일종의 추론이나 카더라에 불과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오토의 곁에는 드래곤이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물어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

고대문헌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가 오토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 시간 나면 한번 물어보자. 밑져야 본전이니까.’

어쩌면 무슨 이유로 이 세계로 오게 된 것인지 알아낼 실마리가 되어줄 수도 있을 터.

물론 쿠란이 치매를 앓고 있으므로, 정상적인 대화가 쉽진 않겠지만….

“말씀 감사합니다, 어르신.”

“끌끌끌. 가문의 소가주에게 이 정도 조언쯤이야. 죽을 날을 앞둔 늙은이 주제에 괜한 소리를 지껄여서 마음을 어지럽힌 게 주책인 게야.”

“아닙니다. 어르신 말씀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음?”

“감사드립니다.”

오토는 가문의 어르신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퐁달은 오토가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삐걱! 갸웃거렸지만, 이내 곧 관심을 꺼버렸다.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판국에, 굳이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신경을 쓰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래. 실마리를 얻은 거야. 쿠란 어르신한테 그럴듯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지도.’

오토는 이오타 왕국으로 돌아가면 꼭 쿠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다짐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철컥, 철컥!

카이로스가 정확히 33개의 갑옷을 데리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죽음의 기사가 된 옛 부하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부하들에게는 그 어떠한 사악한 기운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끌끌끌. 죽음의 기사는 사악한 의지와 흑마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심성이 악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내가 만들어 낸 기사들은 순수하게 그 영혼만을 담아낸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오?”

“죽음의 기사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니, 그냥 영혼기사라고 부르면 좋겠구나.”

그렇게 카이로스는 33기의 영혼기사들을 거느린 기사단장이 되었다.

전직 황제에서 일개 기사단장으로 수십 계단이나 강등된 셈이었지만, 카이로스는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으헤헤헤헤헤! 오랜만에 옛 생각도 나고 좋구먼! 으헤헤헤헤!”

비록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함께 걷고 더불어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게다가 이대로 3년 정도만 버티면 새로운 육체로 갈아타 진짜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했으므로,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지금부터 짐은 유령기사단의 기사단장이니라. 끌끌끌.”

카이로스가 기사단장을 자처했다.

“풉.”

오토는 카이로스가 기사와는 거리가 100만 광년이나 동떨어진 인물이라는 걸 알기에, 피식 코웃음을 쳤다.

‘기사는 개뿔. 용병단장이 딱 어울리지. 그래. 용병단장. 나쁘지 않아. 이오타 왕국 소속인 걸 숨기고, 용병단으로 활동시키는 거야.’

오토는 카이로스와 그 일당들을 어떻게 부려 먹을지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마침 카이로스 일당에게 어울리는 임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 * *

“그대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소이다. 내 이리 감사를 드리겠소.”

카이로스가 알퐁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얼씨구?’

오토는 카이로스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고맙단 표현조차 인색한 것을 떠올리며 실소를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알퐁달이 카이로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떠올려 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행동이긴 했다.

“아니오. 덕분에 내 연구를 완성하게 되었으니, 그리 고마워하실 것은 없소이다.”

“음?”

“영혼기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평생을 진행해 왔던 연구의 마지막 실마리를 잡은 듯하오. 나 역시 고맙소이다.”

알퐁달 역시 카이로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연구의 마지막 실마리요…?”

“그렇단다.”

알퐁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 비록 뛰어난 검술과 마법 실력을 일구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한평생 마법을 연구하며 학자로서는 썩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단다. 하지만 큰 업적을 남겨 가문에 이바지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번 기회에 연구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오오?”

“내 가기 전에 연구의 성과를 발표하고 안식에 들 터이니, 너는 꼭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오토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연구를 완성한 걸까? 궁금하네.’

알퐁달은 오토조차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인물이었다.

카이로스 건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만날 기회가 아예 없었을 인물인지라, 알퐁달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알퐁달이 평생에 걸쳐 완성한 연구의 결과물이라니, 뭔지는 몰라도 기대가 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럼, 어서 가 보려무나. 나는 연구를 계속해야겠네.”

“예, 어르신.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끌끌끌.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알퐁달이 미소를 짓고는, 다시 스르륵! 미끄러져 연구실로 향했다.

* * *

다시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한 오토.

“노동자들은 잘 돌려보냈습니다. 전하께서 주신 돈이 많아서, 각자 여비를 넉넉히 챙겨주고도 남았습니다.”

“그래? 잘됐네.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전하께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아시잖습니까.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카미유가 오히려 오토를 위로했다.

“알지. 모두를 구할 순 없지.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답시고 추운 겨울날 집을 나섰던 가장들이잖아.”

“…….”

“죽은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 내가 화가 나는 게 뭐냐면,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일수록 이런 더러운 꼴을 당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거야. 그 사람들이 노가다 길드를 찾은 단순 육체노동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농부라도 됐다면 그런 험한 꼴은 애초에 당할 일도 없었겠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와지르 대공을 만나야겠어.”

오토는 오래간만에 와지르 대공을 만나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좀 나눠 보기로 했다.

내정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는 국왕인 오토가 직접 챙기고 살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와지르 대공은 여느 때처럼 행정업무에 몰두하던 중 오토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자 눈살을 찌푸렸다.

“오버하우저 가문이 그런 사악한 집단이었을 줄이야.”

“앞으로도 계속 사악할 예정이죠.”

“내버려둘 셈이냐?”

“최대한 사악한 짓은 못하게 훼방을 놓으면서, 이용해 먹을 생각입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그런 것이었지. 근데 그런 일로 날 찾아오진 않았을 터인데.”

“노동자들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음?”

“인력 소개 같은 건 그냥 나라에서 직접 챙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노가다 길드가 있긴 하지만, 거긴 그냥 돈 빨아먹는 곳이잖아요.”

<노가다 길드>는 육체노동자들과 일감이 필요한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지라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 벌어진 사건처럼 인신매매에 이용되는 경우가 드물지만 종종 있었고, 일을 소개해 주고 챙기는 수수료도 매우 비싼 편이었다.

노동자들로서는 직접 발로 뛰면서 매번 일감을 찾아 나설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하는 시설이었던 것이다.

“오호라! 네 녀석이 제법 기특한 생각을 했구나!”

“하하하.”

“나 역시 그런 생각은 못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썩 괜찮은 생각이구나. 게다가 세금을 더 걷을 구실도 되고?”

노련한 행정가답게, 와지르 대공은 오토의 제안에서도 세금을 걷을 구실을 아주 귀신같이 찾아내었다.

수수료를 <노가다 길드>보다 더 저렴하게 받는 대신에, 그 수익을 모두 국고로 돌린다면 꽤 훌륭한 수익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죠?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대신에 세금을 걷는 겁니다. 노동자들은 수수료를 싼값에 이용할 수 있고, 안전해서 좋고. 우린 세금을 걷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껄껄껄! 매우 훌륭하구나! 우선 본국에서 미리 시험적으로 운영해 보고, 반응이 좋으면 다른 국가에도 진출시켜서 외화벌이를 해 와도 좋겠지.”

“오오오!”

외화벌이는 언제나 옳은 법.

“그럼 실행할까요?”

“국왕이 그리하겠다는데 행정 관료인 내가 뭘 어쩌겠느냐? 까라면 까야지?”

“하하하….”

“이번에 보니 밖에서 큰 건을 해왔다고 하던데, 예산도 아주 넉넉해지겠구나? 어지간한 왕국의 10년 치 예산을 한꺼번에 벌어왔다고?”

“예, 제가 외화벌이 좀 하죠.”

“껄껄껄! 과연 세계대전을 준비하겠다는 녀석답구나! 껄껄!”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오냐.”

그렇게 와지르 대공과 오래간만에 만난 직후.

띠링!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내정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알림: 이오타 왕국 행정 관료들의 업무 능력이 20% 향상되었습니다!]

새로운 정책을 발굴해서 실행시키겠다고 다짐한 덕분에, 그간 정체되어 있던 내정 능력치가 오르며 모든 유닛들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뭐지?’

오토는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알림: 이오타 왕국 행정 관료들의 업

다시 보니 알림창이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듯 일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글씨도 뭔가 반투명하게 변한 것처럼 희미했다.

‘뭐지? 알림창 왜 이래?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건가?’

오토는 몇 번이나 알림창을 다시 띄워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시스템 자체가 마치 수명이 다한 듯 희미해져 있었다.

‘왜 이래?’

한참 동안이나 시스템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포기했다.

‘이런 현상은 처음인데….’

뭔가 불안했다.

시스템은 오토가 본래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게이머 김도진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일종의 보증 같은 것.

그런데 그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쿠란 어르신한테 가서 물어봐야지.’

생각해 보니 쿠란은 조언을 구하기에 충분한 대상이었다.

드래곤은 매우 지혜로운 존재로서,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경험도 풍부할 터.

안 그래도 알퐁달로부터 용안[龍眼]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으니, 겸사겸사 쿠란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쿠란 어르신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예, 전하. 쿠란 어르신께서는 올리브 시녀장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감사해요.”

시녀장인 올리브는, 왕궁에서 가장 큰 어르신인 쿠란을 책임지고 돌보고 있었다.

오토가 24시간 돌봐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쿠란의 상태를 보니 조언을 구하려던 생각이 싹 사라져버렸다.

“네? 어르신이 드래곤이라고요? 어휴. 또 이러신다. 자자. 밥이나 드세요. 드래곤이니 뭐니 하는 건 나중에 얘기하시고.”

또다시 치매 증세가 도진 것인지, 쿠란은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올리브가 떠먹여 주는 죽을 먹고 있었다.

그것도 죽을 턱받이에 줄줄 흘리면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