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조, 좆됐다.”
오토는 엘리제가 방문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수련 하나도 못했는데….”
물론 오토가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르곤 대제의 무덤을 털고, 쿤타치 가문을 오가고, 쿠란을 보살피는 등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너무 바빴다.
국왕 노릇을 하느라 개인 수련을 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엘리제가 그런 오토의 상황을 정상참작 해 줄 리가 없었다는 것.
“왜 그러십니까?”
카미유는 오토의 이마에 땀이 실시간으로 송골송골 맺히는 걸 보곤 걱정스레 물었다.
부르르…!!!
심지어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까지 하니, 갑자기 독감이라도 걸린 사람 같아 보였다.
“어디 아프십니까?”
“그, 그게 아니라.”
“……?”
“3일 있으면… 엘리제 님이 오셔.”
“아.”
카미유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또 개처럼 처맞으시는 겁니까?”
“…죽을지도?”
“예?”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죽이겠대.”
카미유는 오토의 말뜻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다.
‘정력이 약하면 죽인다니. 이 무슨.’
카미유가 그렇게 오해한 이유는, 엘리제가 오토의 침실에 침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황상 엘리제가 오토를 잡아먹은 것이 확실했으므로, 오토가 말하는 <만족>이 그렇고 그런 쪽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건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도 없고. 일단은….”
카미유가 오토에게 이오타 제국의 특산품이자 효자 상품인 <로이드 포션>을 건넸다.
“일단 드십시오.”
“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엘리제 아가씨가 오실 때까지 매시간마다 계속 드십시오.”
“……?”
“저는 시종들에게 정력에 좋은 음식들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장어, 마늘, 굴, 말린 오우거의 생식기, 미노타우로스의 고환….”
“으응?”
“제가 잘은 알지 못하지만, 정력에 좋은 음식들이라도 드셔야 어떻게든 해 볼 거 아닙니까. 정력이 약하다고 너무 의기소침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음식 잘 챙겨 드시고, 하체 운동의 강도를 늘리신다면….”
“뭔 개소리야!”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빽! 소리쳤다.
“갑자기 정력 얘기가 왜 나와!”
“정력 얘기 아닙니까?”
“뭐?”
“방금 아가씨를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시면 죽는다고 하셨잖습니까.”
“야 이! 정력 아니고 무력!”
“아?”
“무려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오토가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한 달에 한 번씩… 내 실력을 체크해서 실망스러우면 죽이겠대.”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진짜 죽여.”
“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해. 가차 없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 줘야지, 안 그러면 진짜 죽는다고.”
오토가 아는 엘리제는 사악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세계관 최강자인 그녀는, 시나리오상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대륙을 지켜내기 위해 제 한 몸을 아낌없이 내던지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강함에 대해서만큼은 일말의 자비나 타협이 없었다.
약혼자인 오토에게는 더더욱.
이 세계를 게임으로 접했을 당시에는 엘리제를 어떻게든 내 편으로 만들어 보려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게임과 현실이 100퍼센트 맞아떨어지지는 않아서, 정말 죽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짱을 부릴 순 없었다.
게임과 현실이 100퍼센트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카이로스, 카이로스 어딨어!”
“지금쯤이면 왕궁 밖 선술집에서 한잔하고 있을 겁니다.”
“당장 데려와… 가 아니라. 가자.”
“직접 가십니까?”
“부른다고 오겠냐?”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
카미유는 오토의 말뜻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 황제 카이로스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서,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전령을 보내 봤자 씹힐 확률이 매우 높았고, 귀찮게 군다며 애꿎은 전령이 두들겨 맞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즉, 카이로스를 움직이려면 오토가 직접 가서 데려오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 * *
카이로스는 왕궁에서 가장 가까운 뒷골목에 자리한 허름한 선술집에서 옛 부하들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 고주망태가 되도록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술자리 자체가 매우 기이했다는 것.
카이로스의 부하들.
그러니까 육체 없이 갑옷에 깃든 언데드인 영혼기사들은, 당연하게도 술을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콸콸콸!
그들은 투구의 빈틈으로 술을 통째로 퍼부어 대었고, 술은 그대로 흘러 갑옷의 이음새 사이로 고스란히 줄줄줄! 흘러내렸다.
덕분에 영혼기사들의 발밑은 흘러내린 술로 인해 축축이 젖어 있었고, 주변에는 싸한 알콜 향이 진동했다.
물론 그 광경을 지켜본 선술집의 종업원과 주인의 바지춤도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평생을 술장사를 하며 살아왔지만, 이런 미친놈들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윽! 이, 이게 뭐야!”
오죽했으면 근처를 지나던 행인이 훅! 하고 끼쳐 오는 술 냄새에 취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을까.
이쯤 되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땅바닥에 퍼붓는 꼴밖엔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영혼기사들은 투구 안으로 술을 들이붓기를 멈추지 않았다.
“크으! 향 좋다! 크으으으!”
“이렇게라도 느낄 수 있는 게 어디냐!”
“젠장! 취하고 싶은데 취하질 않잖아! 어이! 주인장! 술 더 가져와! 제일 독하고 양 많은 걸로!”
망령기사였을 때에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었던 카이로스의 부하들.
하지만 영혼기사가 되니 약간의 술 냄새 정도는 느낄 수가 있게 된 모양이었다.
카이로스와 마찬가지로, 영혼기사들 역시 살아생전 거친 용병의 삶을 살아오며 심심하면 폭음을 해 댔던 중증 알콜중독자들인지라 술에 대한 갈망이 엄청 났던 것이다.
“소, 손님들! 그렇게 드시면 큰 탈이 납니다요! 게다가 드시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으시질 않습니까!”
선술집의 주인은 카이로스 일당의 행패 아닌 행패에 어지간히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갑옷이라도 벗고 편하게, 천천히 드십시오. 그리고 술이 다 떨어져 가서….”
“없으면 구해 오면 될 것이 아니냐! 근처 다른 술집에 가서 가진 술을 몽땅 사 오면 되지!”
“예에?”
“옜다.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술이나 구해 오너라. 우린 상관 말고.”
카이로스가 술값으로 1킬로그램짜리 금괴 하나를 선술집 주인장에게 툭! 던져주었다.
“헉! 아, 아이고오! 나으리! 술은 얼마든지 대령하겠습니다요! 뭣하냐! 빨리 근처 가게 가서 술을 빌려 와!”
선술집 주인이 하나밖에 없는 직원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자 직원이 허둥지둥 술을 빌리러 달려갔다.
“…이 미친놈들이 진짜.”
오토는 그런 카이로스 일당의 행태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혀를 내둘렀다.
“저럴 거면 차라리 수영장에 물 대신 술 채워 놓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낫지 않냐?”
“동의합니다.”
카미유가 오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대장이란 놈이나 부하들이나 머리 나쁜 건 알아줘야 돼. 이 돌대가리들.”
오토는 카이로스의 책사였다던 오그마가 살아생전 얼마나 고생했을지 공감하면서, 카이로스에게 다가갔다.
“야, 일어나.”
“뭐냐? 뺀질이?”
“나 좀 도와줘.”
“음?”
“나 수련해야 하니까 좀 도와달라고.”
“이 야심한 밤에 수련을 도와달랍시고 짐의 흥을 깨겠다는 것이냐? 감히?”
얼마나 퍼마셔 댔는지, 카이로스가 반쯤 풀린 눈으로 오토에게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감히는 개뿔. 좋게 가자. 짜증나게 하지 말고.”
“뭐라? 뺀질이 네놈이 정녕….”
“오그마.”
“……!”
“오그마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네놈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며칠 전에 가이우스의 심문이 끝났거든. 정보를 좀 얻었지.”
“다, 당장 말해 봐라! 어서!”
그러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오, 오그마?!”
“히익?!”
“이런 젠장! 잊고 있었는데!”
영혼기사들이 마치 못 들을 이름이라도 들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아무래도 영혼기사들에게 있어 오그마란 이름은 금기어나 다름없는 게 분명했다.
“오그마 그 자식에 대한 정보를 어서 말해 봐라! 뺀질이!”
“맨입으로?”
“이놈이?”
“수련 도와주면 정보를 주지. 니가 나를 도와야, 나도 너를 돕지? 안 그래?”
“크흠!”
“곱게 가자.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미유와 함께 말을 타고 왕궁을 향해 내달렸다.
“기, 기다려라! 뺀질이! 같이 가자!”
화악!
말을 마치자마자 카이로스의 주변으로 일순간 바람이 일더니, 이내 코를 찌르는 알코올 향이 풍겨져 나왔다.
늘 그렇듯 마나를 운용해 술기운을 한번에 몰아낸 것이다.
카이로스가 다급히 소리치며 오토와 카미유를 뒤쫓았다.
* * *
“…그러니까 오그마 그 자식이 검은 십자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저항했단 말이냐? 끝끝내 안 잡히고?”
“그렇다니까.”
오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이우스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카이로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적어도 비참한 최후는 안 맞고 잘 살다 간 거 같은데? 검은 십자회가 크라레스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완전히 소탕당하지 않은 걸 보면?”
“허어.”
“아직까지도 활동한대잖아. 대를 이어서 황가를 괴롭히면서. 근성 하나는 알아줘야 돼. 어떻게 대를 이어서까지 비밀결사 활동을 하면서 황가를 괴롭히지?”
솔직히 오토도 그게 의문이었다.
“한 몇십 년 지나면 지칠 만도 하지 않나? 오그마도 죽고, 간부들도 죽을 텐데.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저항활동을 계속하는 건 너무 집착 같은데. 후손들한테 딱히 그 명분이 와 닿는 것도 아닐 테고.”
“으음.”
“크라레스 제국이 건재할 때야 이런저런 불만 세력, 반란 세력을 모아서 활동할 수 있다 쳐. 근데 크라레스 제국이 멸망한 지도 꽤 됐잖아. 근데 아직까지도 활동하는 건 너무 나갔다 싶어.”
원한을 대대로 물려준다는 것.
그게 후손들에게 얼마나 못할 짓인지 떠올려 보면, 상식적으로 검은 십자회의 활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어쨌거나 너도 부활했고, 아르곤 그 새끼도 환생했잖아. 그러니까 검은 십자회도 더는 독자적으로 활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동의한다.”
“가이우스한테 정보를 좀 더 캐볼 테니까, 기회가 닿으면 검은 십자회랑 접선 한번 해 보자. 같은 적을 둔 동료잖아. 니 최측근 오그마가 만든 집단이기도 하고.”
“좋은 생각이다, 뺀질이.”
“하여간 니가 제일 문제야.”
“음?”
“옛날에 오그마가 너한테 잔소리 존나 했지? 술 좀 작작 퍼마셔라, 일 좀 해라, 장가들어라, 공부 좀 해라, 체통 좀 지켜라. 뭐 이런 것들로?”
“…….”
“아르곤 그 새끼도 확 숙청해 버리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겠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한두 번쯤은 니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도 움직였을 것 같은데?”
“그, 그 자식이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일을 꾸민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지. 괘씸한 놈 같으니. 황제 알기를 개똥으로 알고.”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때 오그마 말 들었으면 이 사단이 나지도 않았을 거잖아. 황제가 개똥같이 구니까 개똥으로 아는 거 아냐.”
“크, 크윽!”
또다시 아픈 곳을 찔린 카이로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못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찔려서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술이나 깨고 이거나 받아라.”
오토가 카이로스를 향해 목검을 툭! 내던졌다.
엘리제 님 방문까지 D-3.
약혼녀의 손에 죽기는 싫었으므로, 남은 시간 동안 벼락치기라도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