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다음 날 오후.
동이 틀 때까지 수련한 덕분에, 오토는 늦잠을 잤다.
맘 같아선 어떻게든 일찍 일어나서 체력단련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주제에 수련까지 했더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잠들기 직전 포션을 한 병 더 털어 넣었더니, 약 기운이 돌아 완전히 기절해 버린 것이다.
“으으.”
오토는 반쯤 헤롱헤롱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전하, 여기 있습니다.”
시종이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가져다주었다.
“전 괜찮습니다. 앞으로 따뜻한 물은 굳이 준비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예?”
“하루 첫 과업의 승리를 날로 먹을 순 없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직접 수도꼭지를 열어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직접 받은 물로 세수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 우워어어어으어으갸갸갸갹!”
오토는 호기롭게 세면대에 얼굴을 담갔다가, 괴성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때는 겨울.
잠에서 깨자마자 차디찬 찬물에 얼굴을 담갔더니 너무 차가워서 화들짝 놀란 것이다.
“…….”
시종은 그런 오토의 한심한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따뜻한 물을 준비했던 게 아닌데.
“어푸! 어푸! 어푸푸푸푸푸! 으어어어어어!”
오토는 찬물에 호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만 오두방정을 떨면서 끝끝내 세수를 끝마쳤다.
“후! 정신이 번쩍 드네!”
막상 세수를 끝내고 나니 상쾌한 기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어? 잠깐!”
“예?”
“멈춰!”
오토가 침대를 정리하려던 시종들을 황급히 뜯어말렸다.
“앞으로 이부자리는 제가 직접 정리하겠습니다.”
“하오나 전하….”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필요한 건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예, 전하.”
슥슥.
이불을 바로 펴 정리하고, 베개를 가지런히 놓았다.
‘좋은데?’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아침 일찍 일어나 모포를 개고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건 하루의 첫 과업을 승리로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직접 하도록.’
엘리제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늦게 일어났으니까 오늘은 일찍 자야지.’
오토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빙그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뒤늦은 하루를 시작했다.
* * *
“어? 가셨다고? 벌써?”
오토는 엘리제가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다는 걸 듣고 놀랐다.
“장벽 너머 전선이 급해서 오래 시간을 비우실 수 없다 하셨습니다.”
“하긴.”
오토는 장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방벽.
카이로스가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한 시점부터 쌓기 시작한 높이 100미터 / 길이 1,200킬로미터짜리 성벽.
장벽은 카이로스의 최대 업적이자 최대의 실책이었다.
당대에는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인 탓에 국력이 약해지고, 나라 경제가 크게 휘청이었으니 명백한 실책이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북쪽의 사납고 강인한 야만부족들과 북부제국으로부터 이 대륙을 지켜주는 거대한 방패막이로서, 그 사회적 안보적 기능이 가히 어마어마했다.
카이로스의 무리한 공사가 훗날에 이르러서는 대륙 전체에 은총을 내려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장벽 너머가 많이 빡세지. 하루가 멀다고 전투가 벌어지고. 첩보전은 더 치열하고. 북부제국도 호시탐탐 남진을 노리고 있으니까.’
엘리제는 그런 대륙 최전방에서 매일 같이 전투를 치르며 작전을 수행하는, 대륙의 수호신 같은 존재.
그래서 엘리제로서는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 그리고.”
카미유가 오토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아가씨께서 전하께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거울이잖아?”
엘리제가 오토에게 남기고 간 선물은 그저 투박하고 작은 원형 손거울이었다.
귀퉁이 부분의 금속이 닳고 닳은 걸 보면, 얼마나 오래 썼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게다가 군데군데 찍혀 있기도 했고, 자잘한 흠집과 함께 살짝 금이 가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1년 365일을 험한 전쟁터에서 구르는 엘리제이다 보니, 거울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했지만….
“뭐지? 특별한 아이템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손거울이잖아. 엘리제 님이 쓰던 거 같은데?”
“마냥 평범한 물건은 아닙니다.”
“응?”
“아카데미에 있을 때 여기사들이 쓰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강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어지간한 충격에는 작은 흠집조차 안 나는 물건입니다.”
“군용 거울이라는 건가? 여군이나 여기사들을 위한?”
“맞습니다.”
“그래도 거울은 거울인 거잖아. 딱히 특별한 기능 같은 건 없는.”
“그것도 맞습니다.”
“흠.”
오토는 어째서 엘리제가 자신이 쓰던 군용 손거울을 선물로 주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특별하긴 특별하네.”
“예?”
“엘리제 님이 쓰던 거잖아. 그럼 특별한 거지 뭐.”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거울을 품속 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엘리제가 아무런 의미 없이 쓰던 손거울을 선물로 남겨 놓고 갔을 리는 없을 터.
분명히 어떠한 의미가 있을 테니, 소중하게 잘 간직하기로 했다.
‘나도 다음번엔 선물이라도 챙겨드려야겠네. 그간 너무 받기만 했어. 가르침까지 받았는데.’
어떤 선물을 해 줘야 그간 받았던 가르침에 대한 보답이 될지, 오토는 곰곰이 한번 생각을 해 보기로 했다.
* * *
그날 저녁.
“내년 봄에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것이냐?”
“예, 전하.”
오토는 와지르 대공과 더불어 향후 국정 과제에 대해 의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와지르는 행정업무를 총책임지는 존재.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더라도, 사실상 이오타 왕국의 핵심 중의 핵심 인물이었다.
아무리 비밀이 많은 오토라 할지라도, 중요한 사안은 와지르와 논의를 함이 마땅했다.
“대륙 진출이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무턱대고 침공이라도 하려고?”
와지르 대공의 표정이 살짝 싸늘해졌다.
변방에 자리한 이오타 왕국이 대륙으로 진출하려거든 반드시 어느 나라든 침략해야 할 터.
그건 명분 없는 전쟁이었고, 정복의 야욕이었다.
“에이.”
오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 했다.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나라에 쳐들어가봤자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무지성으로 쳐들어갑니까? 그런 뜬금없는 전쟁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닌데.”
“흐음.”
“그리고 그런 짓을 했다간 국제적으로 이목이 끌릴 테고, 강대국들한테 찍히겠죠? 악의 축이 될 게 뻔하죠. 외교적으로 자살행위라고요.”
“그걸 잘 알고 있다면 뭔가 계획이 있다는 얘기인데….”
“지도를 잘 보면 명분 있게 먼저 쳐들어갈 만한 나라가 서너 군데쯤 있겠죠.”
오토가 지도를 가리키며 이오타 왕국과 그나마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라를 가리켰다.
“예를 들면… 왕이 폭군이라서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는 나라라든가. 아니면 작년 농사를 망쳐서 대기근이 든 나라라거나. 뭐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커다란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나라가 쑥대밭이 됐다거나.”
“오호라.”
와지르 대공이 살짝 굳어졌던 얼굴을 풀고 씩 웃었다.
“나름 생각이 있단 말이렷다?”
“다 아시면서 괜히 표정 굳히고 그러지 마세요.”
오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무슨 전쟁광도 아니고. 명분 없는 침략은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것도 모를까요. 게다가 아직 세계대전이 불붙지도 않았는데.”
“껄껄껄!”
“아무튼, 그래서 당분간은 전쟁 물자, 구호품, 식량 비축에 주력할 테니까 결재해 주세요.”
오토가 와지르 대공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전하, 에고 상단의 에고 님이 전하를 뵙기를 청하옵니다.”
“그래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세요.”
오토는 와지르 대공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즉시 에고를 만나러 갔다.
에고는 오토를 보자마자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상황이 여의치가 않습니다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오버하우저 상단이 골동품들을 사들인답시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있습니다요.”
“아.”
이유야 뻔했다.
시장에 풀린 무덤 안 골동품들을 추적해서 배후를 캐내려는 수작이었다.
‘하긴. 어지간히 열 받았겠지. 어떻게든 배후를 캐내서 복수하려 할 테고.’
오토는 아르곤 대제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는, 에고에게 물었다.
“그럼 방법이 없을까요?”
“해상무역 쪽으로 방향을 튼다면 칼리프 왕국과 거래를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요.”
“으음. 칼리프 왕국이라.”
칼리프 왕국은 대륙 남부에 자리한 국가로서, 사실 대륙과는 별개로 치는 곳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 혹은 산악지대인지라 현실로 따지자면 중동지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었다.
지형적으로도 대륙의 중심부와는 동떨어져 있어서, 독자적인 문화와 사상이 뿌리내린 곳이기도 했다.
“칼리프 왕국이 무역 쪽으로는 꽤 좋은 거래 상대죠.”
“예, 전하.”
“해상무역은 물류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어려우니까 우리가 골동품을 팔아치우든, 전쟁물자와 식량을 구매하든 오버하우저 상단에서 추적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역시 현명하십니다요.”
에고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고블린 상인 에고는 전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는 거상[巨商].
오토는 에고의 말을 아주 찰떡같이 알아듣고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인물.
에고의 입장에서는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에 오토만큼 즐거운 사람도 몇 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칼리프 왕국과의 무역이 어렵다는 거죠?”
“그렇습니다요.”
“보자….”
오토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우리 왕국과 서쪽 바다 사이에 최단 거리가 150킬로미터. 문제는 산악지형인 데다가 몬스터도 많아서 무역로를 개발하기가 어렵고.”
“맞습니다요.”
“일단 무역로를 뚫어낸다고 해도 거리가 워낙 멀어서 중간 거점이 필요하겠네요. 중간에 해적들한테 물건이 털릴 가능성도 높고.”
“이래저래 지금 당장은 물건을 처분하기가 여의치가 않사옵니다요.”
“그래도 해야죠.”
“예에?”
에고가 그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해상무역을 하실 생각이십니까요?”
“어차피 나중에는 전 대륙 물류가 개판 날 거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그런 게 있어요.”
오토는 굳이 다가올 세계 대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얘기해 줘 봤자 말만 길어지고 서로 피곤할 뿐이고, 지금 이 시기에는 그저 허황된 망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상무역은 한번 뚫어 놓으면 활용할 여지도 많으니까요. 대륙 남쪽 바다를 우리 새로운 교역로로 개발해 보죠.”
“괜찮으시겠습니까요?”
“해야죠. 봄이 오기 전에 뭐라도 해 놔야 돼요.”
오토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바닷길을 뚫는 걸 서두르기로 했다.
오토가 아는 역사와 현실이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 이상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수가 터질지 모르는 일.
그렇기에 미래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여 보기로 한 것이다.
“에고 님은 배를 좀 섭외해 주세요. 배 만들 기술자도 없고. 조선소도 없으니까. 사 오는 수밖에 없겠죠.”
“예, 전하. 그럼 그리하겠습니다요.”
그렇게 오토의 다음 행보가 정해졌다.
무역로 개발, 해운업 시작, 해군 창설.
그리고 칼리프 왕국과의 무역.
대륙으로 진출하기 전 오토의 마지막 국정과제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