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1. 오토가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고 서쪽 바닷가까지 진격해 몬스터들을 토벌하고, 운송로를 개척한다.
2. 에고가 구해 준 배들에 아르곤 대제의 무덤을 도굴해서 획득한 골동품들과 사치품들을 싣는다.
3. 이오타 왕국군은 남아서 항구를 건설한다.
4. 해상무역의 거점이 될 섬을 점령한다.
5. 칼리프 왕국으로 가 골동품들과 사치품들을 팔고, 그 돈으로 전쟁물자·구호품·식량을 사 온다.
문제는 시간.
오토의 계획은 여름이 오기 전에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이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오토는 급히 병력을 소집하고, 원정에 나섰다.
“전하! 저희도 데려가십시오!”
“전하! 저희가 같이 가겠습니다!”
놀랍게도, 때마침 이오타 왕국의 수도를 방문했던 붉은 모루 부족의 드워프들 수십여 명이 원정에 자원했다.
“오오.”
오토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드워프들은 벌목과 토목공사에 일가견이 있는 종족.
이번 원정에는 운송로 개척과 항구 역할을 해 줄 선착장 건설이 중요했으므로, 드워프들의 합류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함께 가 주신다면 제 입장에선 정말정말 감사할 테지만, 괜찮으시겠어요? 힘든 여정이 될 텐데요.”
“별말씀을! 전하께 받은 은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힘을 보태게 해 주십시오!”
부족에서 추방당했다가 오토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던 드워프 에릭슨이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고생을 자처했다.
다른 드워프들 역시 마찬가지.
“노가다 하면 우리 드워프가 근본 아니겠습니까!”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워낙에 은혜를 갚는 데 진심인 종족이 드워프인지라, 그 세다는 자존심과 고집이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협조적이었다.
고생을 자처하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염치없지만 도움 좀 받겠습니다.”
그렇게 드워프들이 원정대에 합류했다.
“전하, 에고 상단에서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약속된 장소에 배들을 정박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어.”
오토는 카미유의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송로를 뚫는 건 처음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이오타 왕국에서부터 운송로를 뚫고, 해상무역을 진행하는 일은 게임에서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아르곤 대제의 무덤을 털었던 것부터가 계획에 없던 일.
그러니 도굴한 골동품들과 사치품들을 팔아치우기 위한 운송로 개발 및 해상무역 진출 역시 처음일 수밖에.
“전하.”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이번에 개척하는 운송로와 선착장 말입니다.”
“으응?”
“아무리 해상무역이라 한들 거리가 너무 멉니다.”
“어렵게 개척해 봤자 별로 득될 게 없는 것 같다고?”
“예.”
“그건 아냐.”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지도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는데, 기존에 있던 교역로를 이용해서 서쪽 변방에 있는 특산품들을 모을 수가 있거든.”
“기존에 있던 교역로와 연계되는 겁니까?”
“그렇지.”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변방에는 꽤 괜찮은 특산품들이 많단 말이야? 근데 이걸 육로를 이용해서 대륙 남쪽으로 공급하는 건 너무 길어. 근데 바다를 이용하면 길긴 해도 상대적으로 편하게 운송이 가능하고.”
“아.”
“그리고 여기.”
오토가 대륙의 남쪽에 외딴 섬 하나를 가리켰다.
“무인도거든? 여기를 거점 삼아서 물류창고로 쓰는 거야. 그럼 대륙 남쪽의 해안 도시들부터 칼리프 왕국까지 우리 물건을 내다 팔 수 있는 거고.”
“맙소사.”
오토가 가리킨 섬.
현실로 따지자면 제주도의 약 2분의 1 크기로, 무인도치곤 상당히 큰 섬이었다.
“사소하고 앙증맞은 문제들이 좀 있긴 한데, 일단 이 섬은 무조건 먹어 둬야 돼. 이 섬이 앞으로 남쪽 바다 물류의 중심지가 될 거거든.”
오토가 씩 웃으며 말했다.
* * *
약 500명 규모로 구성된 원정대는, 서쪽 바닷가를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거칠고 험한 산악지형.
길도 거의 없어 원시림에 가까운 숲을 뚫고 지나가야 했지만, 원정대는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길을 뚫어냈다.
눈이 허리까지 올 정도로 쌓여 있었음에도, 원정대의 속도는 빨랐다.
두두두두두두두두!!!
하브르 초원 최고의 특산품이자 대륙에서도 인정받는 명마인 타타르 품종의 말들은, 그 무지막지한 힘과 덩치를 이용해서 쌓인 눈덩이들을 아예 부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 벌목 시작!”
“우어어어어어어어어!”
이번 원정에 참여한 50명의 드워프들은, 앞길을 가로막은 아름드리나무들을 무슨 잔디 깎듯이 베어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드워프들은 벌목, 채굴, 제련, 야금 등등등 육체노동에 속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하는 종목.
앞길을 가로막은 나무들을 벌목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원정대는 불과 1주일 만에 서쪽 바다에 도착했다.
그것도 길을 만들어 내면서….
“어우야.”
해안에 도착한 오토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서쪽 해안은 지대가 높아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절벽으로 빙 둘러쳐진 지형이었다.
즉, 배를 정박시키거나 해상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걸 떠나 애초에 인적이 너무나도 드물어서, 이 근처까지 사람이 오는 경우는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기도 했고.
“어떡합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이런 높은 절벽에서 화물을 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파도도 세서 배를 절벽 가까이 붙이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 보입니다.”
“그러게. 난감하네.”
막상 오긴 했지만, 지형이 너무나도 험준했다.
에고가 보내준 배들이 도착한다 한들 화물 선적조차 제대로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껄껄껄! 전하! 저희에게 맡겨 주시지요!”
드워프 에릭슨이 나섰다.
“선착장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작업 환경이 너무 위험한데요?”
“저희 종족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건 아니고요. 위험해 보이니까 그렇죠.”
“보여 드리겠습니다. 쉬고 계시지요.”
50명의 드워프들이 나섰다.
뚝딱뚝딱!
드워프들은 벌목한 아름드리나무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잘라내 통나무로 만들고, 절벽과 땅에 지지대를 박고, 밧줄로 나무를 묶는 등 작업을 시작했다.
“어어? 어어어?”
드워프들의 작업을 지켜보던 오토는, 그들의 경이로운 작업 속도와 실력에 경악했다.
잠깐 눈을 다른 데 돌렸다가 다시 보면 무언가 만들어져 있고, 다시 보면 또 무언가가 만들어져 있고.
이게 마법인지 육체노동을 통한 작업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음 날.
“이게 된다고?”
수십 미터 절벽 위에서 저 아래 파도가 몰아치는 수면 아래까지.
화물을 내릴 도르래가 완성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워프들은 절벽 바로 밑과 곳곳에 불쑥 솟아 있는 바위에 커다란 말뚝을 박아 놓고, 그 위에 나무를 올려서 그럴싸한 선착장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노동자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마법이 펼쳐진 것이다.
“이게… 드워프???”
오토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며, 이 믿지 못할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드워프들이란 얼마나 강인하고 신비로운 종족인가?
그 추운 바닷바람이 몸을 할퀴고.
차디찬 파도가 쉴 새 없이 때려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않고 순식간에 작업을 끝낸 걸 보면, 확실히 인간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종족이었다.
그러는 사이.
“전하, 저기 옵니다.”
다섯 척의 배가 절벽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에고가 보낸 배들이 분명했다.
“저게 뭐야.”
오토는 배들의 상태를 보고 어이가 없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다섯 척의 배들은 덩치만 컸지, 난파선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심지어 대포와 같은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다.
혹시 해적들을 만나 함포라도 한 발 맞는다거나, 혹은 태풍에 의한 풍랑을 만나면 무조건 침몰할 것 같았다.
“뺀질아, 설마 저 통통배들이 우리가 탈 배냐?”
“…그런 거 같은데?”
“항해는 개뿔. 다 같이 물고기밥이 되는 것 아니냐?”
“기다려 봐.”
오토는 절벽 밑으로 기어 내려가서, 배에 올라타 책임자를 만나보기로 했다.
* * *
“전하를 뵙습니다. 에고 상단에서 일하는 칼드웰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칼드웰은 에고의 밑에서 일하는 상인으로, 일처리가 철두철미하고 꼼꼼하기로 유명한 인물.
훗날 에고 상단에서 독립해 자신만의 상단을 꾸리고, 남쪽 바다를 아우르는 거상으로 거듭나는 인재이기도 했다.
“어떻게 된 일이죠? 배들이 상태가 영 좋지 않은데요? 설마 원가절감 같은 건 아니죠?”
오토가 반농담조로 칼드웰에게 물었다.
결코 진담은 아니었다.
에고가 일부러 이런 허름한 배들을 보냈을 리 없었으니까.
오토의 질문에 칼드웰이 고개를 조아렸다.
“절대로 아니옵니다. 전하, 송구하오나 오버하우저 상단이 남쪽 항구도시들을 돌면서 선박들의 동향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선박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정도라고요?”
오토는 칼드웰의 말을 듣고 아르곤 대제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 집요함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깨닫고 질린단 표정을 지었다.
항구도시들의 선박을 조사할 정도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후를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단 의지의 표현 아니겠는가?
‘하긴. 어지간히 빡쳤겠지. 그래 봤자 넌 내 손바닥 안이야.’
오토는 피식 코웃음을 치고는, 칼드웰에게 말했다.
“에고 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아니옵니다. 에고 님은 전하께 좋은 배들을 제공해 드리지 못한 것을 엄청나게 죄송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에이, 뭘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배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이겠어요. 수완과 인맥이 없으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게 뻔한데.”
오토는 어째서 에고가 난파선이나 다름없는 배들을 보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고가 신뢰를 생명과 같이, 아니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고블린이라는 걸 알았기에….
“마침 겨울이라 태풍이 불어 닥칠 염려는 없으니, 칼리프 왕국까지만 도착한다면 거기서 좋은 배를 구입해 갈아타시게 될 겁니다.”
“그럼요. 그래야죠.”
오토도 저런 낡아빠진 배들을 계속 탈 생각이 없었으므로, 칼리프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배들로 갈아탈 생각이었다.
엘리제의 손에 죽었으면 죽었지, 침몰하는 배와 함께 물고기밥이 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자자! 다들 화물부터 싣죠!”
그렇게 오토가 이끄는 원정대는 에고가 어렵사리 구해 온 낡아빠진 불법 선박들에 가지고 온 골동품들과 사치품들을 가득 싣고 항해에 나섰다.
* * *
그날 밤.
‘에고 님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며칠만 참자.’
오토는 그런 생각으로, 애써 잠을 청했다.
쥐와 고양이―쥐를 잡을 목적으로 데리고 다니는―의 추격전으로 인한 소음.
불규칙적인 흔들림.
끼익! 끼이익!
배가 워낙 낡은 덕분에 곳곳에서 들려오는 잡소리.
시퍼렇게 슬어 있는 곰팡이로 인한 퀴퀴한 냄새까지.
이런저런 사소하고도 앙증맞은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배 멀미를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눈을 붙일 수는 있었다.
그래도 첫날이니만큼 항해는 별문제 없이 잘 진행…… 되기는 개뿔!
“으응?”
선실에서 잠들었던 오토는, 문득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을 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침대와 맞닿아 있는 몸 전체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뭐지?’
오토가 슬쩍 눈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결과.
콸콸콸콸콸!
선실 벽에 난 구멍으로부터 차디찬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어느새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 거의 무릎까지 물이 차 있었다.
쉽게 말해서 배에 구멍이 나서 침몰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비, 비사아아아아앙!”
상황을 파악한 오토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