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오토의 예상대로, 드레이크는 모드레드를 쏘지 못했다.
애꿎은 갑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뿐.
“…가둬 놔.”
“예, 선장.”
드레이크가 꼴 보기 싫다는 듯 휘하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만 같았기에….
“이 쓰레기 같은 놈!”
“감히 우리 모두를 배신해? 그러고도 네놈이 사람이냐!”
“이 씨발놈아!”
“절대 곱게 죽이지 않을 거다!”
모드레드를 향한 선원들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돛새치 해적단>의 선원 대부분은 과거 <콧수염 해적단>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이거나, 에이버리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해적단 전체가 에이버리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모인 집단이기에, 모드레드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큰 것은 당연한 일.
“그래, 잘했다. 남자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하느니라.”
카이로스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힘들겠지만, 잘 추슬러 보도록 해라.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 아니겠느냐.”
“뭐가 다행이라는 겁니까.”
드레이크가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삼촌이라 부르며 믿고 따랐던 자가 아버지를 배신한….”
“적어도 네 녀석 잘못은 아니지 않으냐.”
“……?”
“네 녀석이 저 쓰레기를 계속해서 믿고 따랐다면, 그래서 지금 네놈뿐만 아니라 밑에 있는 부하들까지 뒈지게 됐다면. 그럼 어땠을 것 같으냐.”
순간 드레이크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카이로스의 말대로 계속 에이버리의 손에 놀아나다가, 어느 순간 함정에 빠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 죄책감과 분노가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짐이 반백 년 이상 세상을 살아보니, 인간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감정이 무엇인 줄 아느냐? 바로 후회다. 뼈아픈 후회야말로 영혼에 각인되는 상처이니라.”
배신도 당해 본 사람이 잘 아는 법.
부부사기단 아르곤 대제·베아트리체에게 제대로 공사를 당해 본 카이로스로서는, 드레이크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드레이크에게 조언을 해 주었던 거였다.
받아들이는 드레이크의 입장에선 꼰대의 훈수질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네 녀석은 적어도 후회할 일은 없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라. 네놈이 진정한 바다사나이라면.”
카이로스는 그 말을 남기고 드레이크의 곁을 떠났다.
“그나마 다행은 다행인 건가….”
카이로스의 진심이 닿았기 때문일까?
드레이크는 한동안 우두커니 선 채로 카이로스의 조언을 곱씹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반백 년 이상을 살아…?”
겉보기에는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주제에 스스로 반백 년 이상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설마 날 가지고 논 건가?’
드레이크는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카심은 뭔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마치 얼음장 위에 누워 있는 기분.
하지만 정작 카심을 깨운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찰싹! 찰싹찰싹!
“악! 그, 그만! 그만 때려! 그만!”
카심은 누군가 뺨을 세차게, 그것도 연타로 때린 덕분에 의식을 깨었다.
“일어났으니까 그만… 헉!”
카심은 뭔가 시커먼 것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미끄덩!
미끄러진 카심이 쭉 미끄러졌다.
‘왜 미끄러져?’
분명 넘어졌는데.
‘얼음?’
알고 보니 카심이 딛고 있던 땅은 사실 바닥이 아니라, 꽁꽁 얼어붙은 빙판이었다.
‘내가 왜 얼음 위에 있지?’
아니, 그보다.
“너, 넌 뭐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 카심은, 웬 커다란 펭귄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귀익?”
거대한 펭귄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부리를 열었다.
“뭐긴 뭐냐. 널 살려 준 펭족이다. 귁.”
“펭족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저 멀리 <툰드리아>라 불리는 북부 극지방에는 인간을 포함한 여러 이종족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말하는 곰.
말하는 펭귄.
설인.
북부 원주민.
기타 등등등….
그중 <펭족>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거대 펭귄으로서 마법에 능한 종족이라고 했던가?
“펭족이 여긴 왜?”
“귁. 사고가 좀 있었다. 귁귁.”
펭귄이 대답했다.
“갑자기 빙하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여기까지 떠내려 왔다. 귁귁귁. 한두 달쯤 온 모양이다. 귁귁.”
“그럼 네가 날 구해 준 거냐?”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냐. 귁귁.”
“고맙다.”
카심이 펭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덕분에 살았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귁. 별말씀을. 귁귁.”
“이름이 뭐냐. 생명의 은인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귁. 내 이름은. 귁. 귀귀귁. 귀귀귁. 귀귀귁. 귁귁귁. 귁귁. 귀귀귀귀귀귀귁. 귀귁. 귀귁. 귀귀익. 귁귁귁. 귁귁귁. 이다. 귁.”
“에에?”
“귁. 귀귀귁. 귀귀귁. 귀귀귁. 귁귁귁. 귁귁. 귀귀귀귀귀귀귁. 귀귁. 귀귁. 귀귀익. 귁귁귁. 귁귁귁. 이다. 귁.”
“그러니까 니 이름이. 귁, 귀귀귁, 귀귀귁, 귀귀… 어. 음. 으음.”
카심은 펭귄의 이름이 너무 어려워 제대로 기억하지도, 발음하지도 못했다.
“그냥… 편하게 부르면 안 되겠냐?”
“귀익?”
“이름이 너무 어렵다. 편하게 그냥… 펭이라고 불러도 될까?”
“귀이이이이익?!”
“안 되는 건가? 무례를 저질렀다면 내가 사과….”
“귀익? 지금 내 이름을 지어 준 거냐? 귁?”
“으응?”
“귀익! 우리 펭족은 이름을 지어 준 자와 진한 우정을 나누는 전통이 있다! 귁!”
“아?”
“귁! 그럼 이제부터 너와 난 친구다! 귀익! 친구 이름은 뭐냐! 귁!”
“나는 카심이라고 한다.”
“귁! 카심! 펭이 친구 카심! 귀익!”
“그, 그래. 우리 친구하자. 구해 줘서 고맙다, 친구야.”
카심이 악수를 청하자 펭이가 앙증맞은 날개를 슥 내밀어 그 손을 맞잡았다.
“잠깐.”
카심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빙하를 타고 여기까지 떠내려 왔다고? 대륙 남부까지?”
“그렇다. 귁.”
“왜?”
“귀익?”
“빙하가 떨어져 나갔으면 그냥 수영해서 탈출하면 되잖아.”
“…귀익.”
펭이가 카심의 시선을 피했다.
“뭐야? 왜 그래? 펭족은 수영 못해?”
“펭족… 수영 잘한다. 수영 못하는 펭족이 어디 있냐. 귀익.”
“근데?”
“펭이….”
펭이가 고개를 떨궜다.
“수영… 못한다. 귀익.”
“수영을 못해?”
“물 공포증. 귁. 심해서. 귁. 수영 해 본 적 없다. 귀익.”
“헐.”
카심은 어이가 없었다.
펭귄.
아니, 펭족이 물 공포증이 심해 수영을 못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드레이크는 예상보다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엄청난 배신감에 크게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모드레드 따위에게 분노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이버리에게 복수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오토의 말 덕분에 활활 타오르던 분노를 차갑게 식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드레이크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장 오토를 찾아갔다.
“아까 복수할 절호의 기회라고 했지?”
“물론.”
오토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모드레드를 이용하면 에이버리에게 역정보를 흘리는 게 가능하니까.”
“좋아. 해 볼게.”
드레이크가 결정을 내렸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지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말했잖아.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아.”
“난 이미 널 한번 살려 줬어. 에이버리에게 복수하는 걸 도와주면, 두 번 살리는 셈 아냐?”
“맞아.”
드레이크는 오토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모드레드가 비열한 배신자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내 신하가 되는 건? 설마 입 닦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드레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충성을 맹세하는 건 에이버리에게 복수한 다음에.”
“음.”
“복수를 끝마치지 않고 마음 편히 누군가를 모실 자신이 없어서 그래.”
“그건 인정.”
오토는 드레이크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하기야, 마음에 콩밭에 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모시겠는가?
게다가 드레이크 역시 100인의 군주 중 하나.
등용이 쉬우면 그게 더 이상했다.
“좋아. 충성 맹세를 받는 건 에이버리를 박살 낸 후에 받지.”
“이해해 줘서 고맙다.”
“고맙긴.”
오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더 고맙지.’
오토는 드레이크가 해전에서 얼마나 큰 활약을 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까다로운 등용 조건이 딱히 싫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에이버리를 잡아 보자고.”
“어떻게?”
“에이버리를 어떻게 조질 거냐면….”
그때.
“선장! 큰일 났습니다!”
선원이 다급히 선실로 들어와 드레이크에게 보고했다.
“큰일?”
“예, 선장. 화물칸에 있던 전리품 상자에서 금괴 50킬로그램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움찔!
오토가 흠칫 몸을 떨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봐. 그런 거금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날 이후로 아직 육지에 들른 적도 없는데.”
“예, 선장.”
“뭔가 착오가 있는 거겠지. 중간에 사라진 사람도 없고. 이 좁은 배 안에 금괴를 숨길 만한 장소가 있어 봐야 어디 있겠어. 조용히 찾아봐. 안 그래도 어수선한데 우리끼리 의심하지 말자고.”
드레이크는 그런 거금이 없어졌다는 것에도 크게 굴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 맞추어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
그런 드레이크의 선장다운 모습에 카미유가 오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보시고 제발 좀 본받으십시오, 제발.”
“조용히 하자? 엉?”
오토가 카미유에게 눈을 부라렸다.
“뭐야.”
고개를 돌린 드레이크가 오토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어디 아파?”
“하하. 하하하.”
오토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오토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할 수가 없었다.
모드레드가 사실 아버지를 배신한 자였으며, 에이버리가 심어 놓은 스파이였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이 금괴를 도둑질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사실 오토가 베푼 은혜가 워낙에 커서, 그냥 달라고 했어도 흔쾌히 줬을 테지만.
“그래서 어떻게 한다고?”
“우선.”
오토가 입을 열었다.
* * *
그날 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오타 왕국의 선단은 <붉은 여신>을 앞세워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아갔다.
지금까지의 항해와는 몇 배나 빠른 속도였는데, 그 비결은 <붉은 여신> 덕분이었다.
드레이크의 기함 <붉은 여신>은 평범한 해적선 따위가 결코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신비한 아이템이자 군주를 상징하는 아이템인 <성물>이었다.
함께 항해하는 아군 선박들의 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주어 어마어마한 기동성을 갖게 해 주는, 그야말로 해전에 최적화된 군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