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에이버리는 이른바 <꼬르륵 군도>라 불리는 다도해[多島海] 지역 전체를 장악한 해적영주였다.
범죄자 주제에 한 지역을 장악하는 게 가능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 지역의 특징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꼬르륵 군도>는 수십 개의 섬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뿐더러, 수백 개의 암초와 수십 개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지옥이었다.
즉, 지역 특색이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
때문에, 주변국들로선 해군을 투입해 에이버리를 토벌하고 싶어도 손가락만 쪽쪽 빠는 상황이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꼬르륵 군도> 토벌에 나섰던 나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았기에….
괜히 본래 지명이 아닌 <꼬르륵 군도>란 별칭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항해 중.
“에이버리를 어떻게 토벌할 거야? 꼬르륵 군도는 만만한 곳이 아냐. 우리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드레이크가 오토에게 물었다.
“당연히 어림도 없지.”
오토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대꾸했다.
“우리 전력으로 꼬르륵 군도를 어떻게 공략해? 기어 나오게 만들어야지.”
“쉽지 않을 텐데.”
“당연히 쉽지 않지. 에이버리는 무력에 자신이 없어서 꼬르륵 군도를 벗어나길 싫어해. 얼마나 조심성이 많고 의심이 많은데. 괜히 50년 동안 해적영주로 군림하면서 꼬르륵 군도를 지배해 온 게 아냐.”
오토는 드레이크의 시나리오만큼이나 에이버리의 시나리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에이버리가 취향에 맞지 않아 깊게 파고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고 난이도로 두어 번 정도 클리어해 본 경험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당신 말마따나 에이버리는 조심성 많고 의심이 많다면서.”
“그건 맞는데.”
오토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오기 싫어도 나올 수밖에 없게끔 만들면 돼.”
“나오기 싫어도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있잖아.”
오토가 드레이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싹!
순간 드레이크는 오토의 표정을 보고,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뭐야? 이 사람? 여태까지의 느낌과는 다르다.’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위험한 존재와 마주한 기분.
마치 사람을 심연으로 끌어당겨서, 영원한 절망 속에 빠뜨릴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알아? 사람이야. 자기 자신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사람이거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지.”
“음. 맞는 말이네.”
“그럼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건 얼마나 어렵겠어?”
“……!”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사람 마음 움직이는 거야. 타인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 거. 쉽지 않아. 그게 적이라면 더더욱. 근데, 사람을 쉽게 움직이는 방법도 있지.”
“뭐지? 그게? 돈? 명예?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걸 주면 돼. 너처럼.”
오토가 턱 끝으로 슬쩍 드레이크를 가리켰다.
“말했듯이, 나는 널 내 신하로 삼고 싶어. 그래서 니가 가장 원하는 걸 주기로 했어.”
“복수?”
“그래.”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는 복수를 주기로 했고.”
“그럼 에이버리한테는….”
“힘.”
오토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에이버리를 유혹해야지. 그럼 넘어올 거야. 내 의도대로.”
“아!”
드레이크는 오토의 말을 듣고 탄성을 내질렀다.
오토의 말은 정답이었다.
<꼬르륵 군도>에서 에이버리가 가장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이버리는 해적영주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데다가, 무력도 제일 낮아 그 열등감이 엄청났다.
그래서 에이버리가 강한 무력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 강한 힘이 뭐지? 에이버리를 끌어낼?”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 그거라면 에이버리를 낚을 미끼로 충분하지. 두고 봐. 에이버리가 제 발로 꼬르륵 군도를 기어 나오나, 안 나오나.”
오토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 * *
이틀 뒤.
<꼬르륵 군도>에서 열린 해적영주들의 정기모임에 참석했던 에이버리는, 해적영주들이 돌아가자마자 엄청나게 분노했다.
해적영주들의 정기모임이 <꼬르륵 군도>에서 열린 이유는, 에이버리가 이 지역을 벗어나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해적영주들은 거물급 범죄자들이니만큼 보안이 철저하고 안전한 <꼬르륵 군도>를 선호하기도 했고.
“이런 빌어먹을! 이 개 같은 새끼들! 감히 날 무시하다니!”
에이버리의 분노는 가히 무시무시했다.
‘이번에 희귀한 고래를 사냥하러 갈 생각인데, 한번 오시지요? 아? 못 오시나? 큭큭큭!’
‘영감은 너무 오래 해 먹었어. 이제 슬슬 힘에 부칠 텐데. 그만 해 먹고 은퇴하지?’
‘큭큭큭! 이번에 그 해군 제독을 내 손으로 직접 때려잡았지! 에이버리 영감은 이런 거 해 본 적 없지?’
‘무릎은 좀 괜찮으시오? 걸음걸이가 영 힘이 없던데 말이오.’
해적영주들은 툭하면 에이버리를 놀려 대며 심기를 살살 긁곤 했다.
그나마 에이버리가 젊었을 적엔 괜찮았다.
하지만 어느덧 70대 노인이 된 오늘날에는 걸핏하면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그 교활하고 뛰어난 지략으로 <해적연합>에 크게 이바지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에 해적영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으리라.
“이 머저리 같은 놈들! 대가리가 텅텅 빈 돌대가리들 주제에 감히 나를 놀려대? 두고 보자. 내 언젠가 네놈들을 모조리 바다에 수장시켜 버릴 테니!”
“수장시켜 버려! 수장시켜 버려!”
늘 에이버리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앵무새 <존슨>이 꽥꽥거렸다.
‘언젠가는? 풉. 다 늙은 주제에 어느 세월에 강해지려고. 저승에서나 강해지십쇼.’
‘그 나이를 먹고도 권력욕을 못 내려놓고 있는 주제에.’
‘얼른 은퇴나 해라.’
부하들은 에이버리가 열폭하는 걸 보고 속으로 그를 헐뜯었다.
에이버리의 지나친 장기집권에 지친 부하들은, 하루라도 빨리 그가 은퇴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언제라도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에이버리가 얼마나 교활하고 영리한 인간인지를 잘 알기에,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 새끼들! 뒤룩뒤룩 눈깔을 굴리는 걸 보니 네놈들마저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흐으!’
눈치 빠른 에이버리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모두 꼴도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썩 꺼져라.”
부하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뭐 좋을 게 있다고.
에이버리의 꼬장을 들어줄 이유도, 시간도 없는데.
벌컥벌컥!
에이버리는 홧김에 럼주를 들어 병나발을 불고는, 입가를 슥 닦았다.
“내 바르도의 보물을 찾기만 한다면… 네놈들을 모조리 도륙 내줄 것이다.”
최후의 해적왕 <프랜시스 H 바르도>.
200년 전에 해적왕의 함대를 들고 자취를 감춘 인물.
그가 사라진 바람에 해적왕의 자리는 아직까지도 공석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바르도는 해적왕의 함대와 보물들을 모처에 숨겨 놓고 훗날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가 찾아오도록 안배해 놓았다고 했다.
에이버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벌써 20년 전부터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해적왕의 보물이 그렇게 찾기 쉬웠다면, 이미 다른 해적영주들이 찾고도 남았을 터.
“정녕 이렇게 뒷방 늙은이 신세로 밀려나야 하는가….”
그때.
똑똑똑.
부하가 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이냐?”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음?”
“그게….”
부하가 에이버리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뭣이!”
에이버리는 보고를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윌리엄 그놈이 숨겨 놓은 보물이 해적왕 바르도의…?”
“모드레드가 전해 온 바에 의하면, 그렇답니다.”
“그게 정말이냐! 정말 모드레드가 그리 전해왔단 말이냐!”
쿵쾅쿵쾅!
에이버리의 심장이 미친 듯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확실한 정보인 것이냐? 그걸 어떻게 확신한다더냐!”
“모드레드가 말하길….”
뒤이어 부하의 입에서 꽤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르도의 보물이라니… 해적왕의 함대라니… 아아.”
에이버리는 부하의 보고를 듣고 전율했다.
지난 20년 동안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모드레드, 모드레드를 만나 보고 싶구나.”
“모드레드는 지금 드레이크의 곁을 지키느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연락도 어렵게 전한 거라고 했습니다.”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군. 하긴. 모드레드 그놈이 드레이크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어야 내게 정보를 줄 수 있을 테지.”
“예, 선장님. 아시다시피 모드레드가 선장님의 정보원이라는 건 극비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다른 놈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올 순 없었을 겁니다.”
“음! 그것도 그렇지!”
에이버리는 모드레드가 전해 온 정보가 역정보일 가능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모드레드는 감히 에이버리를 배신할 정도로 간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의 에이버리는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이란 말에 판단력이 흐려져 있기도 했다.
왜?
해적왕의 함대와 보물을 얻는다면, 에이버리가 평생토록 갈망하던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언제든 출항할 수 있도록 부하들을 준비시켜라. 지금부터 모드레드가 보내오는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워라. 알겠느냐.”
“예, 선장.”
부하가 나가고.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이라… 바르도의 보물….”
에이버리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바르도! 바르도!”
존슨이 꽥꽥거리며 에이버리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 * *
드레이크는 오토가 이틀째 서쪽으로만 항해하자 의아해했다.
일단 에이버리에게 역정보를 흘렸다고 했으니, 잠자코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오토는 그 뒤로 딱히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뱃머리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동료들과 대련을 하거나.
누가 봐도 에이버리를 사냥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항해의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시간이나 때우는 한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정말로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을 찾으러 가는 건가?”
“그럼 내가 뭐 한다고 서쪽으로 항해를 하겠냐? 여기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인데.”
오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말은… 바르도의 보물이 서쪽에 있다는 거야?”
“대충?”
“대추웅?”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몰라. 서쪽에 어디 즈음에 있다는 것밖에. 정확한 위치는 내가 아니라 니가 아니까.”
“내가? 바르도의 보물을?”
드레이크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대꾸했다.
“알지. 아주 잘 알지.”
“그게 무슨 개소ㄹ….”
“잠깐 실례.”
오토는 번개처럼 드레이크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낚아챘다.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보려는 거지.”
“뭘?”
“이걸 이렇게 하면….”
오토가 이번에는 드레이크가 늘 가지고 다니는 지도를 빼앗아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펜던트를 열어 지도를 비추었다.
스으으으으!
그러자 펜던트가 햇빛을 반사시켜 지도의 숨겨져 있던 부분을 드러내었다.
“이, 이건….”
놀란 드레이크.
“이 펜던트와 지도. 아버지가 남기신 유품이지?”
“그럼 설마….”
“설마가 맞아.”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이 펜던트와 지도가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로 우릴 인도할 거다. 지도 보이지? 이 근처 어디야.”
“아.”
드레이크는 그제야 오토가 서쪽으로만 항해한 이유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