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아가토·힐데가르트·막시무스가 나서서 카이로스를 부축했다.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진정하세요! 좀!”
“아이고, 폐하!”
카미유는 카이로스가 쓰러지자 당황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어르신! 왜 그러십니까!”
“그으으으으윽! 그으으으으윽!”
“어르신!”
“혀, 혈압이… 크윽!”
“혈압 말씀이십니까? 어르신한테 고혈압이 있었습니까?”
“그게… 아니라. 크윽.”
카이로스가 눈을 하얗게 까뒤집으며 괴로워했다.
“화, 화가 너무 나서. 크윽!”
“어르신!”
“저 꼴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으어어어어어어어!”
카이로스가 게거품을 물고 자지러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금대검>으로 해적선을 두 동강 내 버린 오토를 보고 있노라니 과거 아르곤 대제와의 추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르곤 대제의 가문은 대대로 해상무역에 종사해 온 지방 호족―귀족―으로서 해전에 매우 능했다.
아르곤 대제 역시 그러한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아 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카이로스에게 연전연승을 선물해 주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형님 폐하,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여기 적장의 목이 있사옵니다.’
<황금대검>으로 적 함대의 대장선을 두 동강 내 버린 뒤 복귀한 아르곤이 적장의 머리통을 바치던 모습이….
그런데 오토가 그때 아르곤 대제의 활약을 고스란히 재현해내었으니, 카이로스의 PTSD가 도지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토는 그저 오래간만에 자신의 무력을 드러내며 활약한 것뿐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기억폭행(?)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멀쩡히 있던 카이로스는 혈압이 올라 쓰러져 버렸던 것이고.
“…….”
카미유는 카이로스가 혈압 때문에 전투불능에 빠지자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그렇고.
‘에라이, 이 자본주의의 돼지 같은 검 같으니. 유전승리 무전패배. 이 더러운 세상! 캬악, 퉤!’
카미유는 오토가 <황금대검>에 금괴를 열심히 바르며 투덜거리던 걸 떠올렸다.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하려고. 이 검은 황금을 먹이면 강해지거든.’
황금을 먹이면 강해지는 검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검이 마치 여의봉처럼 쭉 늘어나 해적선 한 척을 두 동강 내 버릴 줄이야….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바른 금괴가 무려 50킬로그램인데….’
금괴 1킬로그램의 가치를 떠올려 보면, 오토가 이번 전투에서 얼마나 큰 금액을 지불했는지 대략 계산이 나왔다.
한 번 전투에 금괴 50킬로그램이라면….
‘매번 저렇게 저 검을 휘두르다 보면 파산할지도.’
아무 때고 <황금대검>을 휘둘렀다간 제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잔고가 남아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빈말로도 가성비가 좋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속 시원하다.”
해적선을 두 동강 낸 오토가 홀가분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뭐야? 쟤 왜 저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나 봅니다.”
“하여간 가지가지 하네.”
오토는 카미유의 대답을 듣고 카이로스를 향해 눈을 흘기곤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해적선들을 나포한다. 나포에 성공하면, 백기를 내걸고 전장에서 이탈하도록.”
“예! 전하!”
오토의 목표는 해적선들을 모조리 침몰시켜 버리는 게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연히 모든 해적선을 나포할 순 없다.
하지만 <붉은 여신>의 빠른 기동성과 마검사들, 그리고 영혼기사들의 강력한 무력이 있다면 상당수의 해적선을 나포하는 게 가능할 터.
‘아깝게 왜 침몰시켜? 다 내 배가 될 텐데.’
해적선들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게 오토의 목표였다.
* * *
한편, 오토로부터 <검은 함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드레이크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해군 제독이었던 것처럼 능숙하게 함대를 지휘해 나갔다.
“다섯 척, 좌측으로. 다섯 척, 우측으로. 해적선들의 퇴로를 막는다. 굳이 침몰시킬 필요는 없다. 백기를 내건 해적선은 쏘지 마라. 포격은 최대한 자제한다. 나머지 한 척은 폭군을 엄호한다.”
드레이크는 <검은 함대>의 압도적인 체급을 바탕으로, 해적선들을 광범위하게 압박해 나갔다.
드르륵! 드르르르륵!
열두 척의 군함은 그런 드레이크의 명령에 따라 저절로 움직였다.
<검은 함대>엔 선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함 <폭군>을 포함해 열두 척의 군함 모두 마찬가지였다.
왜?
해적왕 바르도의 보물인 <검은 함대>는 오직 선장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마법선들이었으니까.
적어도 해전을 치를 때만큼은 인력이 아예 들어가지 않는, 무인 자동화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에이버리. 절대 도망치지 못할 거다. 네놈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드레이크는 기함 <폭군>을 움직여 에이버리의 해적선 <뱀의 혀>을 압박했다.
당하는 에이버리의 입장에서 <폭군>의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폭군>과 <뱀의 혀>의 체급 차이는 족히 3배 이상.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뱀의 혀> 입장에선 기가 누를 수밖에 없었다.
“쏴라! 쏘란 말이다!”
에이버리는 <폭군>이 다가오는 걸 보고 부하들에게 일제사격을 명령했다.
펑펑! 펑! 펑! 펑펑! 펑! 펑! 펑! 펑!
<뱀의 혀>에 탑재된 함포들이 불을 뿜었다.
그러나….
텅! 터엉! 텅! 텅! 텅!
<검은 함대>의 기함 <폭군>은 포탄을 모조리 튕겨내면서, 자신의 방어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보란 듯 과시했다.
“마, 말도 안 돼!!!”
에이버리는 일제사격이 <폭군>의 선체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 걸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40년 가까이 해적영주로서 군림하는 동안 숱한 해전을 치러왔음에도 <폭군>과 같은 괴물은 듣도 보도 못했다.
‘무적함대의 전설이… 진짜였던가.’
에이버리가 놀라는 사이.
두둥.
<폭군>이 어느새 <뱀의 혀>의 코앞까지 다가와 그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했다.
<폭군>의 그림자가 만들어 낸 암운이 에이버리를 짓눌렀다.
“……!”
에이버리는 <폭군>의 어마어마한 체급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무적함대의 기함 앞에서는 해적영주인 에이버리 역시 한낱 늙고 병든 노인이었을 뿐….
“에이버리.”
<폭군>의 뱃머리 위.
붉은 노을을 등진 드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감히!”
에이버리가 버럭 소리쳤다.
그 모습이 마치 주눅 들지 않으려 애써 발악하는 작은 짐승과 같았다.
“윌리엄 그 멍청한 놈의 자식 따위가 해적영주인 나 에이버리에게 원수를 갚는다? 크하하하하! 네놈이 아무리 함정을 파고 날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들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으냐!”
“…뭐라?”
“윌리엄 그놈이나 네놈이나! 결국엔 부자가 이 에이버리의 손에 뒈질 것이다! 네놈도 네 아비처럼! 네놈의 어미와 누이들처럼! 비참하게 뒈질 거란 말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이 개새끼가!”
화가 난 드레이크의 눈에 시퍼런 살기가 맺혔다.
에이버리가 가족들을 언급하자 참고 있던 분노와 증오가 폭발한 건 당연한 일.
“가루로 만들어 주마.”
드레이크는 즉시 <폭군>의 뱃머리를 돌리며 함포를 방열했다.
일제사격을 통해 에이버리와 그의 해적선 <뱀의 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작정으로….
“오냐!”
에이버리가 이를 악물고 악다구니를 써 댔다.
“이 에이버리가! 왜 내가 해적영주인지! 다른 해적영주들이 왜 나를 건드리지 못하는지! 네놈에게 똑똑히 보여 주마!”
“보여 주마! 보여 주마!”
에이버리가 품속에서 맥주병만 한 크기의 유리병 세 개를 꺼내 바다에 던졌다.
그로부터 약 5초 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바다괴수가 세 마리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며,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드러내었다.
커다란 머리와 여덟 개의 다리.
그리고 칼날과 같이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하게 돋아난 입.
“……!”
드레이크는 에이버리가 불러낸 바다괴수들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함 <폭군>에 맞먹는 덩치를 가진 그 생명체들은, 전 세계 모든 바다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의 바다괴수였다.
“크라켄…!”
드레이크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같은 시각.
“세 마리라고?!”
열심히 해적선들을 나포하던 오토는, 바다괴수 크라켄들이 나타난 걸 보고 경악했다.
에이버리의 크라켄 소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마리나 될 줄은 몰랐다.
‘왜??????’
머리가 복잡해졌다.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간 변수.
물론 시기상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드레이크의 시나리오가 갓 시작되고, 에이버리의 시나리오는 아직 시작하기 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크라켄 세 마리는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
에이버리가 크라켄을 세 마리나 소환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오토는 결코 이번 작전을 이런 식으로 전개하지 않았을 터였다.
왜?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도 있듯이, 크라켄을 무시하고 에이버리의 해적선을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일 테니까.
하지만 세 마리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크라켄들은 그 어마어마한 덩치를 앞세워 에이버리를 보호하는 한편 <검은 함대>와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중 가장 거대한 개체는 기함 <폭군>을 완전히 휘감아 버린 뒤였다.
펑펑! 펑펑! 펑! 펑! 펑! 펑! 펑펑! 펑! 펑!
심지어 <폭군>의 무시무시한 포격을 몸으로 버텨내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촤라라락!
콰앙!
크라켄이 촉수로 <폭군>의 갑판을 내리쳐 드레이크를 공격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드레이가 크라켄에 맞서는 건 어불성설.
‘드레이크부터 구해야 돼. 폭군이 자유로워져야 싸움이 돼.’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쪽으로!”
쏴아아아아!
<붉은 여신>이 오토가 올라타 있던 해적선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속도를 높여라! 전속력으로!”
<붉은 여신>이 <폭군>을 휘감은 크라켄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슥슥, 슥슥슥.
오토는 화물칸의 전리품 상자를 열어 안에 든 금괴들을 닥치는 대로 <황금대검>에 문질러 댔다.
금괴가 마치 눈 녹듯 살살 녹았다.
그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은 금괴가 녹아내렸는지, 계산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
스으으으으으으!
금괴를 먹이면 먹일수록 <황금대검>의 검신은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전하! 거의 다 왔습니다!”
“갑니다!”
오토는 즉시 화물칸을 뛰쳐나갔다.
쿵! 콰아아앙!
꽈아아아악!
첨벙첨벙!
갑판 위로 올라가 보니 <폭군>과 크라켄이 뒤엉켜 있는 장관이 펼쳐졌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니겠지만….
쒜에에에에에에에에엑!
크라켄의 촉수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아!
촉수가 간발의 차이로 <붉은 여신>을 빗겨 나가며 수면을 때리자 큰 파도가 일어났다.
쒜에에에에에에엑!
크라켄의 거대한 촉수가 재차 <붉은 여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맞으면 다 죽어.’
이대로라면 <붉은 여신>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날 터.
휘청대는 <붉은 여신>의 선체.
타핫!
오토가 그 반동을 이용해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내 부하들은 내가 지켜.’
<붉은 여신>에 탄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커져라.’
<황금대검>이 마치 여의봉처럼 쭉 늘어났다.
‘벤다.’
촤라락!
<황금대검>이 크라켄의 촉수를 갈랐다.
서걱!
잘린 촉수가 저 멀리 떨어져 나갔다.
‘성ㄱ….’
그 순간.
콰앙!
크라켄의 또 다른 촉수가 공중에 떠 있던 오토를 후려쳤다.
“악!”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오토는, 그대로 수면에 곤두박질친 뒤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크라켄의 촉수에 맞은 것도 맞은 것이지만, 그 높은 곳에서 강한 힘에 의해 추락한 만큼 엄청난 충격을 입었을 터.
그리고 오토는…….
“전하!!!”
카미유가 버럭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