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꾹꾹!
가슴이 아팠다.
‘크윽!’
무언가 강한 힘이 가슴을 계속해서 짓누르고 있었다.
‘그, 그만. 갈비뼈가. 크윽.’
고통은 잠시.
입에서 무언가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훅! 하고 느껴지는 숨결이 따스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커헉!”
오토는 바다에 빠졌던 당시 먹었던 물을 뱉어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긴 어디… 헉!”
오토는 엘리제가 얼굴을 슥 닦고 있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털썩!
오토가 다시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기절한 척했다.
정황상 엘리제의 얼굴에 바닷물을 토해낸 게 확실했으므로….
‘아 씨. 내가 미쳤지, 내가 미친놈이지! 오토 이 흘러 빠진 머저리 같은 놈아! 아무리 의식이 없었기로서니 엘리제 님 얼굴에 물을 뱉어? 차라리 자살을 해라! 자살을!’
잠깐.
‘근데 엘리제 님이 왜 여기 있어? 벌써 한 달이 지났나?’
최근 상태창이 들쭉날쭉해서 <숙제검사> 퀘스트의 알림창이 떠오르지 않은 건가 싶었다.
항해가 길어지다 보니 날짜 감각이 둔해져 있기도 했고.
하지만 아니었다.
[알림: 숙제검사까지 앞으로 91시간 24초!]
[알림: 91시간 23초!]
흐릿하긴 했지만, 상태창을 열어 보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오토의 성격상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고 한들 <숙제검사>까지 까맣게 잊어버릴 리도 만무했고.
그저 엘리제가 일찍 온 것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카미유가 날 구해 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 기억이 없어.’
그때.
“일어나라.”
엘리제의 목소리가 오토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기절하지 않은 거, 다 안다.”
“…….”
“나는 괜찮으니, 겁먹을 필요 없다.”
“…정말요?”
오토가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뜨고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다. 난 괜찮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토가 엘리제를 향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럴 수 있다. 이곳은 전장이다. 삶과 죽음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곳에서, 물을 조금 토한 게 뭐가 잘못이라는 건가.”
“아.”
“그보다.”
엘리제가 덧붙였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엘리제 님….”
“눈앞에서 약혼자가 죽었다면, 나는 견딜 수 없었을 거다.”
오토는 엘리제의 말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엘리제 님….”
“일어나라. 싸움이 급하다.”
“예.”
오토는 엘리제가 내민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욱신욱신!
왜인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손으로 더듬어 보니 커다란 혹이 불쑥 솟아 있었다.
‘뭐에 맞았나?’
오토는 자신이 왜 기절했는지조차 몰랐다.
알면 그게 더 이상했다.
머리 위에 제3의 눈이라도 달려 있지 않은 이상.
‘상황이….’
전장을 둘러보았다.
기함 <폭군>은 여전히 가장 거대한 크라켄에 의해 휘감겨 있었고.
나머지 크라켄 한 마리가 <검은 함대>로부터 에이버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
오토는 저 멀리 크라켄 한 마리가 두 동강이 난 채로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오토가 알기에 크라켄을 두 동강 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엘리제 님.”
오토가 고개를 홱! 돌려 엘리제를 돌아보았다.
“설마… 전력을 다하신 겁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엘리제가 부정했다.
하지만 오토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순 있다.
하지만 크라켄 한 마리를 두 동강 내 버릴 정도라면,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을 사용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허락된 힘 이상을 썼어.’
오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시면 안 된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가.”
“허락된 힘 이상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실 텐데요.”
엘리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오토의 말에 동요한 게 분명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
* * *
그걸 어떻게 아냐는 엘리제의 말에, 오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제를 몰아붙였다.
“왜 그러셨어요, 왜.”
“왜냐니.”
“함부로 힘을 쓰시면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난 단지….”
엘리제가 대답했다.
“화가 났을 뿐이다.”
“화가 났다고요?”
“내 눈앞에서, 내 약혼자를 괴롭히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게 전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턱대고 허락된 힘 이상을….”
“한 마리면 몰라도 세 마리면 어렵다는 거, 알지 않나.”
“그, 그건.”
이번에는 오토가 말문이 막혔다.
엘리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크라켄 세 마리는 오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
만약 엘리제가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승리는커녕 <붉은 여신>이 침몰하면서 다 같이 물고기 밥이 되었을 확률이 컸다.
<검은 함대>도 버티고 버티다 도주하거나, 혹은 침몰했을 테고.
“하아.”
오토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엘리제 님의 힘은 이렇게 쓰여서는 안 돼. 나 하나 살리자고 쓰이기에는 너무나도….’
엘리제는 군주는 아니었지만 게임 <영지전쟁>에 미치는 영향력이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단일 캐릭터로서의 중요도를 따지자면, 이 세계관 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런 엘리제의 시나리오를 너무나도 잘 아는 오토로서는, 지금 상황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토는 처음부터 엘리제와 엮이지 않으려 했다.
왜?
엘리제에게는 역할이 있었으니까.
세계관 최강자인 엘리제의 힘은…….
“생각은 나중에 해라.”
엘리제의 목소리가 오토를 일깨웠다.
“전투가 한창이다. 집중해라.”
“…예.”
오토가 <황금대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만신창이.
갈비뼈 대여섯 개는 부러진 것 같았고, 쇄골은 아예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있었으며, 왼쪽 종아리도 비틀려 있었다.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
‘어차피 많이 맞아 봤잖아. 이따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냐.’
으적으적!
오토는 품속에서 젤리를 꺼내 입 안에 털어놓고, 철근 같이 씹으며 의지를 불태웠다.
으득, 으드득!
약효가 돌기 시작하자 너덜너덜 걸레짝이었던 몸이 빠르게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가라, 내가 돕겠다.”
“아뇨.”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제 싸움입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엘리제 님은….”
“허락된 것 이상의 힘을 쓸 생각은 없다. 단지 싸울 수 있게끔 도와주겠다는 말이다.”
“싸울 수 있게끔…?”
“타라.”
엘리제가 자신의 검을 띄워 올렸다.
“타라고요? 이걸?”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다. 무서워 마라.”
“아, 알겠습니다.”
오토는 속는 셈치고 엘리제의 검을 밟고 섰다.
마치 스노보드 위에 올라선 느낌.
우웅!
그와 동시에 공명이 일어나 오토의 의지와 엘리제의 검이 동기화되었다.
‘뭐지? 이 느낌은?’
오토는 자신의 의지가 엘리제의 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우웅!
엘리제의 의지 역시 검과 동기화하며 공명을 일으켰다.
‘들리나?’
엘리제의 목소리가 오토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검이 일종의 공유기 역할을 해 오토와 엘리제의 의식을 연결시켜 준 모양이었다.
즉, 엘리제가 오토의 의지를 실시간으로 반영해 검을 제어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예, 들립니다.’
‘나를 믿고, 가라. 네 의지대로 검이 움직일 거다.’
‘믿겠습니다.’
오토는 엘리제의 말을 믿고, 검을 움직여 보았다.
슈우우우우우우!
그러자 검이 오토의 의지대로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조작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생각대로 검이 움직여 주었으니, 그저 싸우기만 하면 되었다.
‘가 보자.’
오토가 속도를 높였다.
쏴아아아아아!
오토를 태운 검이 마치 제트기와 같은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접착제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발이 검신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이 또한 엘리제의 권능이리라….
“어, 어검비행!”
카이로스가 그 광경을 보고 소리쳤다.
어검비행.
어검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절대자들만의 유희.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검비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어검비행은 아주 소수의 특별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특권.
카이로스의 시대에도 어검비행의 신기[神技]를 선보일 수 있었던 사람은 카이로스 본인을 포함해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니….
“허허허.”
카이로스가 허탈하다는 듯 웃으며 혼잣말했다.
“거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다. 약혼한 사이끼리 전설을 써내려 가는구먼. 허나….”
카이로스의 표정에 불현듯 안타까움이 스쳤다.
“강한 힘을 가진 자의 등장은 난세의 징조일지니. 난세가 재림하니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혼란스러운 세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의 혼잣말이었다.
* * *
전투가 재개되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전투기처럼 날아간 엘리제의 검은, 오토를 눈 깜짝할 사이에 <폭군>까지 데려다 놓았다.
‘기동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오토가 <황금대검>을 움켜쥐었다.
꽈아아아악!
<폭군>을 휘감은 크라켄의 촉수가 보였다.
‘벤다.’
오토가 <황금대검>을 휘둘렀다.
촤라라락!
쭉 늘어난 <황금대검>이 황금색 섬광을 흩뿌리며 크라켄의 촉수를 갈랐다.
싹둑!
<폭군>을 휘감았던 촉수 하나가 두 동강이 났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라켄이 비명을 지르며 <폭군>을 놓아주더니, 수면 아래로 풍덩! 잠수했다.
“일어나!”
오토가 기절해 있던 드레이크를 깨웠다.
“어서! 일어나!”
“크윽!”
“여긴 내가 맡는다. 함대를 지휘해.”
“지금 상황이….”
“설명해 줄 시간 없어! 어서 정신 차리고 움직여!”
오토는 말을 마치고는 다시 엘리제의 검을 타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내가 뭘 본 거지.”
드레이크는 오토가 검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을 본 것 같아서,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검을 움켜쥐었다.
오토의 말마따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함대, 기동.”
손에 쥔 검에 드레이크의 의지가 전달되고 <검은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촤아아아아아아아아!
촉수가 잘렸던 크라켄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화가 난 크라켄이 남은 7개의 촉수를 미친 듯 휘둘러 대었지만, 오토를 잡을 순 없었다.
오토는 빨랐다.
검을 타고 하늘을 나는 오토의 기동력이란, 크라켄이 촉수를 휘둘러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급강하… 선회. 그리고… 벤다.’
쭉 늘어난 <황금대검>이 크라켄의 촉수 두 개를 한꺼번에 잘라 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크라켄.
“회를 쳐 줄게.”
오토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 <황금대검>으로 크라켄의 머리를 30미터쯤 쭉 긋고 지나갔다.
푸화아아아아악!
허연 뇌수와 새카만 먹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는 사이.
펑펑! 펑! 펑펑펑! 펑펑! 펑! 펑! 펑펑펑! 펑! 펑펑! 펑펑펑! 펑! 펑펑펑! 펑! 펑! 펑! 펑펑펑! 펑! 펑펑! 펑!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검은 함대>가 에이버리를 보호하는 크라켄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어 대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수백 발의 포탄이 일제히 쏟아지자 크라켄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어디 그뿐인가?
“꺄아아아악!”
“죽음… 죽음으로….”
“심해의 괴수여… 이제 무저갱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원혼귀갑>에서 튀어나온 수천 마리의 망령들도 크라켄에게 덤벼들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어 대었다.
그렇게 전투 구도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가장 덩치가 크고 강력한 개체는 오토가.
그리고 에이버리를 보호하는 개체는 드레이크의 <검은 함대>와 카이로스의 망령군단이 상대하는 그림이 연출된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던 중.
‘지금이다.’
엘리제의 목소리가 오토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예, 갑니다.’
오토가 <황금대검>의 출력을 완전히 개방했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이글이글 타오르는 <황금대검>이 거의 100미터 가까이 늘어났다.
촤라라락!
오토가 <황금대검>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서걱!
가장 강력한 크라켄이 세로로 쪼개지며 허물어졌다.
‘더!’
오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촤라라락!
<황금대검>을 좌에서 우로, 크게 휘둘렀다.
촤라라락!
<검은 함대>와 카이로스의 망령들에 의해 벌집이 되어 가던 크라켄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두 동강 난 크라켄들의 몸뚱이가 허물어지며 물보라를 피워 올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오토의 계략으로 시작했던 전투는, 오토의 검 끝에서 막을 내렸다.
훗날 <해골섬 해전>이라 불릴, <꼬르륵 군도>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을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