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드레이크가 고개를 조아리며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모습이 어설펐다.
한때 해군을 목표로 했지만, 해적의 아들로 태어나 해적 사냥꾼이 된 탓에 예법에 대해서는 무지했기에….
그러나 뚝뚝 묻어져 나오는 진정성이 어설픔을 덮어 주었다.
스릉.
카미유가 검을 뽑아 오토에게 공손히 바쳤다.
스윽.
오토가 검으로 드레이크의 양 어깨와 머리를 살짝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를 신하로 받아들일 것이며, 백작의 작위와 해군 제독의 계급을 부여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일어나.”
오토가 드레이크를 손수 일으켜 세워 주었다.
[알림: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등용하시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알림: 드레이크의 잠재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알림: 드레이크의 시나리오가 삭제되었습니다!]
흐릿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스르륵 사라졌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좋겠는데.”
“적어도 괴롭지는 않습니다. 가족의 원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면 제가 살아 숨 쉬지 못합니다. 저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그럼 됐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복수에 성공한다 한들 죽은 가족들이 돌아오지는 못할 터.
다만, 에이버리를 처치했으니 타오르던 분노와 증오만큼은 점차 사그라지리라.
“고생했어. 치료부터 받아.”
“예, 전하.”
드레이크가 치료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고, 해적선들을 모조리 나포할 때까지 조금만 힘내 주세요.”
“예! 전하!”
아직 전투는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거의 모든 해적들이 항복했지만, 끝끝내 항복을 거부하고 최후의 저항을 이어나가는 해적선들이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오토는 <붉은 여신>을 타고 저항하거나 혹은 도망치는 해적선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던 중.
“으응?”
오토는 뭔가 익숙한 사람이 한 해적선 위에서 싸우고 있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심…?”
카심이 갑판 위에서 해적들을 도륙내고 있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 * *
지잉!
지이이이잉!
카심은 다섯 개의 정육면체들을 회전시키며 레이저를 뿜어 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귁! 귀익! 귀이이익!”
그 옆에는 웬 거대 펭귄이 입에서 냉기를 뿜어 대며 해적들을 꽁꽁 얼려 버리는 중이었다.
‘엥? 펭족이잖아?’
오토는 그 펭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해적들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들을 가까운 항구에 내려주는 임무를 맡았던 카심이 왜 이곳 <해골섬>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북쪽 극지방에 서식(?)하는 툰드리아 펭족과 함께?
“카심!”
오토가 카심을 향해 소리쳤다.
지이이이이이이잉!!!
“크아아아악!”
카심은 빙글빙글 회전하는 정육면체들로 <바다뱀 해적단>의 2인자를 지져 버리느라 오토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카심!!!”
“앗! 전하!”
카심이 그제야 오토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웅!
카심이 정육면체들을 발밑으로 회전시켜 붕 떠오르더니 <붉은 여신>으로 건너왔다.
파다다다닥!
펭족도 그 앙증맞고 하찮은 날개를 퍼덕여 배와 배 사이를 건너뛰는 진기명기를 보여 주었다.
“공군참모총장 카심이 전하를 뵙습니다.”
카심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오토에게 예를 취했다.
“귁! 반갑다! 귀익!”
펭족도 오토에게 인사했다.
“왜 여기 계세요…?”
“아, 예.”
카심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멋쩍게 대답했다.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하.”
카심이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오토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 휩쓸렸던 이야기.
눈을 떠 보니 펭족인 펭이가 자신을 구해 주었던 이야기.
‘뭔 드루이드야? 이젠 펭족까지 주워?’
서서히 녹아 가는 빙하를 타고 떠다니다 해적들을 만난 이야기.
지친 상태에서 해적들을 상대하느라 위기에 빠졌는데, 정육면체들이 나타나 레이저를 발사했던 이야기.
‘그때 고대 유적에서 싸웠다던 정육면체들인가? 저것들이?’
해적들을 제압하고 집게섬으로 향하던 중 우연찮게 소용돌이에 휩쓸린 이야기.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았더니 해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크라켄 세 마리가 나타났단 이야기까지.
이쯤 되면 단순히 운이 없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뒤통수도 세트로 깨질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와중에 죽지는 않고 무사한 걸 보면, 운이 아예 나쁜 것은 또 아니었다.
그저 원치 않는 고생만 죽어라 했을 뿐.
‘그게 진짜였어?!’
오토는 어쩌면 카이로스가 대단한 관상가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그래도 무사히 전하를 다시 뵈니 이 카심, 그저 망극할 따름입니다.”
“하하… 하하하.”
“다신 못 뵈는 줄 알았습니다. 흑.”
카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본의 아니게 또다시 고난과 역경을 겪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터.
그러다 오토를 만나니 지난 며칠 동안의 설움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아이고. 우리 카심. 괜찮아요, 괜찮아.”
“크흑.”
“정말 고생 많았어요.”
오토는 카심을 다독이고 달래 주었다.
기묘한 팔자를 타고난 덕분에 계속해서 고초를 겪는 카심이 불쌍했다.
“근데….”
오토가 슥 눈길을 돌려 펭이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귁?”
“귁, 귀귀귁, 귀귀귁, 귀귀귁, 귁귁귁, 귁귁, 귀귀귀귀귀귀귁, 귀귁, 귀귁, 귀귀익, 귁귁귁, 귁귁귁 아냐?”
“귀이이이익?!”
펭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귁? 내 이름 어떻게 아냐? 귀익?”
“맞지? 너 귁, 귀귀귁, 귀귀귁, 귀귀귁, 귁귁귁, 귁귁, 귀귀귀귀귀귀귁, 귀귁, 귀귁, 귀귀익, 귁귁귁, 귁귁귁이지?”
“그렇다! 귀익!”
그 순간.
‘뭐라는 거야?’
‘저 펭귄의 이름을 안다고?’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주변인들은 오토가 펭이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자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은 오토였다.
‘펭족의 왕자가 왜 여기 있어?’
알고 보니 카심이 주워 온 건 그저 평범한 펭귄이 아니라, 툰드리아에서 꽤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펭족의 왕자였던 것이다.
심지어 펭족의 왕자 <귁, 귀귀귁, 귀귀귁, 귀귀귁, 귁귁귁, 귁귁, 귀귀귀귀귀귀귁, 귀귁, 귀귁, 귀귀익, 귁귁귁, 귁귁귁>은…….
‘이젠 하다하다 군주를 주워 오네.’
오토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펭이 역시 게임 <영지전쟁>의 주인공 캐릭터인 100인의 군주 중 하나였던 것이다.
* * *
<툰드리아>는 사실 <영지전쟁>의 메인 시나리오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 아니었다.
워낙에 추운 극지방인 데다가 변방 중의 변방이라 상대적으로 대세에 미치는 영향이 미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툰드리아>는 일종의 외전, 혹은 이벤트 스테이지쯤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실제로 <툰드리아>는 가장 마지막으로 추가된 DLC 컨텐츠이기도 했다.
북부제국의 남하로 인해 인간들 사이에서 큰 전쟁이 벌어지고, <툰드리아>에 사는 이종족들 역시 극심한 피해와 환경파괴를 겪는다.
…라는 게 <툰드리아>의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시나리오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툰드리아>에도 군주 캐릭터는 존재했고, 각자 나름의 시나리오 역시 지니고 있었다.
펭이는 그런 <툰드리아>의 군주 캐릭터 중 하나.
‘수영을 못하는 펭족의 왕자. 동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왕자 대접도 제대로 못 받지. 나중엔 북부제국의 침공으로부터 툰드리아를 지켜내는 데 큰 공을 세워 왕위에 오르고.’
펭이의 시나리오는 전통적인 성장 스토리.
나름 귀엽게 생긴 덕분에 <영지전쟁>의 마스코트쯤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그 때문에 꽤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는 캐릭터가 바로 펭이였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토는 그런 펭이를 주워 온 카심의 위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하긴. 개연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특이하게도, 펭이는 게이머가 직접 플레이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우연히 <툰드리아>로 흘러들어오게 된 외지인―게이머―와 만나 우정을 나누고, 함께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만나서 반갑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해.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다.”
오토가 양팔을 마치 접은 날개처럼 뒤로 쭉 펼치며 펭이에게 인사했다.
“귀익?!”
펭이는 오토가 펭족의 전통 예법에 따라 인사를 건네자 화들짝 놀랐다.
설마 대륙인이 펭족의 예법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귀익! 귁, 귀귀귁, 귀귀귁, 귀귀귁, 귁귁귁, 귁귁, 귀귀귀귀귀귀귁, 귀귁, 귀귁, 귀귀익, 귁귁귁, 귁귁귁이다! 대륙식 이름으로 펭이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다! 귀익!”
“그래, 나도.”
오토가 펭이가 내민 날개를 맞잡았다.
‘뭐 하는 인간이야?’
‘펭귄이랑 이렇게 소통이 된다고?’
주변인들이 또다시 놀랐다.
펭족은 평생에 단 한 번도 보기 힘든 종족.
그런 존재와 능숙하게 소통하고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신기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모두를 놀라게 한 사람은 비단 오토뿐만이 아니었다.
“귁귁귁 귁귁귁. 귁귁 귁귁귁귁귁 귁귁.”
(만나서 반갑다. 나는 엘리제라고 한다.)
엘리제가 펭족의 언어로 펭이에게 인사했다.
“귀익?!”
펭이가 화들짝 놀랐다.
“귁귁 귁귁귁 귁귁귁 귁귁 귁귁 귀익?!”
(설마 펭족의 언어를 아는 거냐? 귀익?!)
“귁귁 귁귁귁귁 귁귁귁귁 귁 귁귁귁.”
(장벽 너머에서 활동하던 중 배웠다.)
엘리제는 그 어려운 성조(↑↓↗↙↖↘)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며 펭이와 불편함 없이 소통했다.
‘이게 된다고?!’
오토조차도 엘리제의 유창함에 화들짝 놀랐을 정도.
‘이 무슨.’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미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오토나 엘리제나 결코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물들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 * *
그 후 오토는 함대를 이끌고 <꼬르륵 군도>로 향했다.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해적영주 에이버리도 처치했다.
남은 건 전략적 요충지인 <꼬르륵 군도>의 장악.
“이 방향은 꼬르륵 군도가 있는 방향이 아닙니다.”
드레이크는 오토가 엉뚱한 방향으로 함대를 지휘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니야.”
“지금 최우선 과제가 꼬르륵 군도를 점령하는 거 아닙니까?”
“맞아.”
“근데 왜 꼬르륵 군도로 가시지 않고….”
“거길 어떻게 뚫게?”
“그건….”
오토의 물음에 드레이크의 말문이 막혔다.
<꼬르륵 군도>는 천혜의 요새라 아주 적은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곳.
제아무리 <검은 함대>라 할지라도 <꼬르륵 군도>에 무턱대고 쳐들어갔다간 말 그대로 꼬르륵!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꼬르륵 군도의 방어선을 뚫는 건 자살행위야. 물론 지금 우리 전력이라면 충분히 뚫어낼 수 있겠지. 근데 그러면 피해를 입잖아.”
“피해 없이 전투에서 이길 수는….”
“방법이 있다면?”
“방법… 말입니까?”
“굳이 피를 흘릴 필요 없잖아.”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함대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던 중.
“어어? 어어어어?”
“저, 전방에 커다란 암초입니다!”
사람들은 오토가 함대를 커다란 암초에 꼬라박으려 하자 비명을 질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야 이 미친놈아! 기껏 힘든 전투에서 이겨 놓고 왜 단체로 자살을 하자는 것이냐!”
카미유와 카이로스가 악을 썼지만, 오토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함대의 가장 선두에 선 <뱀의 혀>가 암초와 충돌하기 직전.
스으으!
<뱀의 혀>가 초록색 빛을 발산하고.
스르륵!
암초 앞 시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꼬르륵 군도>의 중심부가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