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아.”
오토는 엘리제가 다가온 걸 보고 살짝 놀랐지만, 흔쾌히 옆자리를 허락했다.
허락하지 않을 방법도 없었지만….
“물론이죠. 앉으세요.”
“고맙다.”
엘리제가 오토의 옆에 걸터앉았다.
“약혼자.”
“예, 엘리제 님.”
“외로워 보인다. 괜찮은 건가.”
“제가요?”
끄덕.
엘리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나요?”
“늘 그랬다.”
“예…?”
“처음 날 만날 때도 넌 외로워 보였다. 지금은 더하군.”
“피곤해서 그런가? 표정 관리 좀 해야겠네요. 하하하.”
오토는 엘리제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 외롭나? 잘 모르겠는데….’
이래저래 신경 쓸 것도 많고 사건·사고도 자주 터지다 보니 딱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힘들면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기댈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흔히들 하는 말이죠.”
“너무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라. 군주의 자리는 고독한 법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다 보면 견딜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새겨듣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오토는 그 조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닥쳐올 어두운 미래를 아는 건 오직 오토 한 사람뿐.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토는 어마어마한 짐을 혼자 짊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 그리고. 그때 한 말 말이다.”
엘리제가 운을 띄웠다.
<그때 한 말>이란…….
‘허락된 힘 이상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실 텐데요.’
오토가 했던 말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
“…그건.”
오토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청산유수와 같던 언변이 자취를 감췄다.
입만 열면 튀어나와 상대를 기만하고 가지고 놀던 거짓말조차….
“그냥 아는 겁니다.”
“그냥…?”
“엘리제 님은 너무 강하세요. 비정상적으로 강하죠. 그런 힘을 지니고 계신다면… 그에 따른 반작용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함부로 힘을 사용하시면 안 될 것 같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돌잡이 때였다.”
정적을 깬 사람은 엘리제였다.
“거짓말 같겠지만,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홀린 듯 검을 잡았던 그때가.”
다 큰 처녀가 돌잡이 때 일을 기억한다는 건 확실히 거짓말 같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엘리제라면 이야기가 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본능이었던 모양이다. 장난감 대신 검을 가지고 놀았고, 검을 인형 삼아 껴안고 잤다. 오직 검밖에 모르고 컸다. 7살 때였던가. 그때 깨달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걸.”
“…….”
“모든 게 너무 쉬웠다. 검에 오러를 일으키는 것도. 마나홀을 확장하는 것도. 육체의 재구성을 이루는 것조차. 다른 이들이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고행을 통해 거머쥐어야 하는 강한 힘이, 내게는 그저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몇 년 전이었다. 내 힘을 모두 개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꼈다. 힘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이 세계의 법칙이 내게 경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어진 엘리제의 말은, 오토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가진 재능이 세상의 이치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는 걸. 나라는 존재가 섭리의 실수 같이 느껴지더군.”
“설마.”
“하지만 섭리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나와 같은 존재가 태어났다면… 그건… 섭리의 뜻이겠지.”
오싹!
소름이 오토의 전신을 타고 퍼져나갔다.
“아마도, 나에게는 섭리가 부여한 숙명이 있는 모양이다. 그 숙명을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그 순간.
“아아아.”
오토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 알고 있어, 다.’
모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리제는 스스로의 숙명, 아니 이 세계가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天命]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는 게임상에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 비하인드 스토리로, 오토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왜?
오토는 엘리제라는 캐릭터가 가진 천명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엘리제는 북부제국의 남하에 맞서 최후를 맞이할 운명.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와 대륙에 미치는 영향은…….
“섭리가 부여한 숙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이상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엘리제가 말했다.
“말했듯이, 그래서 힘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눈앞에서 약혼자인 네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엘리제 님….”
“섭리가 선택한 인간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한 여자로서. 그럴 권리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닌가?”
엘리제가 물었다.
“맞습니다.”
오토가 엘리제를 마주 보며 희게 웃었다.
“있다마다요. 충분히 그럴 권리 있으세요, 엘리제 님은.”
“이해해 줘서 고맙다.”
오토는 미소 짓는 엘리제를 바라보며, 어쩌면 그녀를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게임 <영지전쟁>을 통해서 접한 엘리제.
그리고 이 세계에 빙의되어 만난 실제 엘리제.
두 여자 사이의 괴리감은 상당해서, 같은 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날 처음 만났을 때 쫓아와서 협박까지 한 이유가 뭘까?’
당시엔 그저 겁에 질려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겪으면 겪을수록 엘리제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서, 그런 폭거를 저지를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의문은 거기까지.
‘…예쁘네.’
오토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엘리제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밀무역을 하자는 말에 아르곤 대제의 표정이 굳었다.
밀무역은 이문이 큰 대신 위험부담도 매우 컸다.
<상인 길드>의 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어서, 만에 하나 무슨 사고라도 터진다면 보상을 받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신뢰는 물론 범죄자로 낙인 찍혀 도망 다녀야 할 터.
자칫 잘못했다간 상단의 기둥이 뿌리째 뽑힐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곤 대제는 섣불리 이 안건을 물리칠 수 없었다.
‘밀무역, 밀무역이라. 지금으로서는 정녕 그 방법밖에 없는 게 사실이기는 하다만.’
고민하는 사이.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글렌이 다시금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현재로서는 밀무역만이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크흠.”
“폐하, 바다를 이용한 밀무역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하셔야 함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바다라….”
아르곤 대제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본래 아르곤 대제는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지방 귀족 가문 출신.
그러다 보니 바다를 이용한 무역에는 도가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마침 상황도 좋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현재 칼리프 왕국에 금주령이 내려져 모든 주류의 가격이 폭등한 상황이옵니다. 또한, 최근 소금과 담배에 매기는 관세도 10퍼센트가량 올랐사옵니다.”
“주류, 소금, 담배를 밀무역해서 마정석으로 대금을 받아오자는 말인가?”
“예, 폐하. 그리하신다면 이번에 입은 손해를 모두 복구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소인이 혹시 몰라 미리 선박을 섭외해 두고, 물품을 확보해 두었사옵니다. 하명하신다면, 즉시 실행에 옮길 수 있사옵니다.”
“오오오!”
아르곤 대제는 글렌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미리 준비까지 해 놓았다니, 이르면 오늘 밤에도 출항이 가능할 게 아닌가?
하지만 아직 걸리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통한 밀무역으로 칼리프 왕국의 상인과 거래하려면 해적영주 에이버리가 지배하는 해역을 지나야 한다.”
아르곤 대제가 지도를 가리켰다.
“해적영주 에이버리는 꼬르륵 군도 주변 해역에서만큼은 절대적인….”
“마침 아는 해적이 있사옵니다.”
“음?”
“모드레드란 자이온대, 지금은 은퇴했지만 한때 해적영주 에이버리와 은밀한 사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모드레드란 자가 과거 제 선친께 에이버리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거래를 제안한 적이 있다 들었습니다.”
“음. 그럼 그 모드레드란 놈의 연줄을 통해 에이버리를 구워삶자는 말이더냐?”
“예, 폐하. 에이버리는 적당한 액수의 뇌물만 준다면, 굳이 폐하의 화물까지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잘만 하면 이번 기회에 거래를 터서, 밀무역을 지속적으로 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과연 글렌이로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더니, 짐의 가려운 곳을 이리 긁어 주는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르곤 대제는 진심으로 글렌을 칭찬했다.
글렌의 제안은 위험부담이 크기는 했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한 것.
어쩌면 이번 기회에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 과거에도 이랬다.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더 큰 성공을 이루지 않았던가.’
위기를 위기로.
아르곤 대제는 난세를 평정하고 끝내는 대륙을 통일했던 인물.
비록 그 과정은 사악했을지라도, 어쨌거나 대업을 이룬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좋다.”
아르곤 대제가 결정을 내렸다.
“본래 밀무역은 위험부담이 크나, 그 이문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법.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글렌의 계책에 따라 이번 거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상단의 간부들과 오버하우저 가문의 혈족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곤 대제의 결단이 내려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글렌의 주도하에 소금·담배·술을 한가득 실은 상단의 밀무역선 스무 척이 뱃길에 올랐다.
1차 목적지 해적영주 에이버리가 지배하는 해역 <꼬르륵 군도>를 향해서….
* * *
오토는 그 후로도 엘리제와 더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오토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워.’
얼마나 퍽퍽한 삶을 살아왔는지, 얼핏 이야기만 들어도 숨이 턱 막혔다.
섭리의 선택을 받은 자에게 개인의 삶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섭리의 선택을 받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귀족 영애로서 검을 멀리한 채 살아갔을까? 아니지. 북부대공의 손녀로 태어났으니 어쨌거나 검을 잡긴 잡았겠지. 하지만 이 정도로 건조한 삶을 살지는….’
그러던 중.
‘어휴.’
엘리제의 손이 오토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또 엉망진창이네요.”
오토는 품속에서 크림을 꺼내 엘리제의 손에 골고루 펴 발라 주었다.
엘리제가 제아무리 좋은 피부를 타고났다 한들 매일같이 검을 쥐는 이상 손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보습이라도 자주 해 주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 바빠서 관리를 하지 못했다.”
“핑계 대지 마시고요. 이게 뭐에요, 정말. 속상하게.”
“나, 나는 괜찮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어허! 가만히 계세요.”
오토는 부끄러워하는 엘리제의 붙들고, 크림을 빈틈없이 다 발라 주고 나서야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거칠고 딱딱한 촉감이 왜인지 모르게 싫지 않았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부끄러워하셔. 귀엽게.’
오토는 엘리제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대륙 제일의 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왜 웃는 건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뇨. 그냥 웃었습니다. 웃으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이젠 저 투박한 말투마저 정겹다.
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왜 이런 무뚝뚝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를 알기에….
한편, 카미유는 저 멀리 보이는 오토와 엘리제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아빠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토와 엘리제가 뭔가 잘되어 가는 분위기를 풍기자 왠지 모를 뿌듯함(?)과 기특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카미유는 오토가 정상적인 연애 같은 걸 못할 줄 알았다.
망나니 시절의 오토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흐흐흐! 흐흐! 살아있네! 살아있어! 크흐흐흐!’
‘어머, 영주님도 차암.’
‘요 귀여운 것! 흐흐흐흐!’
허구한 날 매음굴을 드나들며 유흥을 즐기는 건 물론.
살롱에서 값비싼 술을 퍼마시며 도박이나 하고, 골빈 귀족들과 어울려 향락에 푹 빠져 살았던 게 불과 2년 전 일이었다.
심지어…….
‘우웨에에에엑! 끄윽!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우웩!’
오토는 오릭스 영주의 장례식 날에도 술주정을 부리다가 토했을 정도였다.
희대의 망나니를 넘어서, 성군이었던 아버지의 얼굴에 똥칠을 한 패륜아.
그게 과거 오토 드 스쿠데리아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얼굴은 또 절륜한 미남이라, 여성편력 또한 엄청났던 탕아이기도 했다.
그런 오토가 임자(?)를 아주 제대로 만나 꼼짝도 못할뿐더러, 나름 풋풋해 보이는 연애를 시작할 기세.
그러다 보니 오토의 기사이기 이전에 친형제나 다름없는 카미유로서는 마냥 흐뭇할 수밖에.
‘잘되어 가고 계신 겁ㄴ….’
그때.
“끌끌끌.”
흠칫!
카미유는 옆에서 들려온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홱!
고개를 돌려보니 카이로스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오토와 엘리제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