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148화 (149/401)

148화

“제발 인기척 좀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뭬야? 네 녀석이 못 알아챈 걸 가지고 왜 짐을 탓하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간 떨어질 뻔했습니다.”

“사내자식이 놀라긴.”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뺀질이 놈이 저 처자와 잘되는 것 같아서 구경 왔느니라. 끌끌끌. 자고로 젊은 것들 연애가 제일 재밌는 법이니라. 끌끌.”

쉽게 말해서 주책바가지 어르신이 훔쳐보러 왔단 뜻이었다.

“그러는 어르신은 연애 안 하십니까?”

“음?”

“그러고 보니 역사서에서도 의외로 이성 관련 문제는 안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이성 관련 문제라니!”

카이로스가 발끈했다.

“짐은 그저 이 대륙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을 뿐이다! 이성 따위에게 관심을 둘 시간이 어디 있었겠느냐!”

“음. 예. 알겠습니다.”

카미유는 굳이 카이로스의 아픈 곳을 찌르지 않았다.

하필 꽃뱀을 짝사랑하느라 다른 이성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기회를 날려 버리지 않았느냐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럼 이번 생에는 안 하십니까?”

“짐은 딱히 연애는 관심이 없다. 그러는 네놈은 연애 안 하느냐?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가 아니더냐. 뺀질이 놈만큼은 아니지만 네 녀석도 훤칠하니 잘생기지 않았느냐. 처자들이 졸졸 따라다닐 텐데?”

“전 아직 생각 없습니다.”

“그러다 좋은 시기 다 놓치는 법이니라. 짐의 경험상 연애는 많이 해 봐야….”

카이로스는 카미유에게 연애에 관한 일장연설을 장장 30분 동안이나 늘어놓았다.

‘…꼰대.’

카이로스의 훈수질을 들어주던 카미유는, 그만 진절머리가 나 버렸다.

마음 같아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늙은 어르신 마음에 상처라도 입을까 꾹 참았다.

그러던 중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카미유는 카이로스에게 물었다.

“어르신.”

“음?”

“그런데 아리엘이 누굽니까?”

<아리엘>이란 카이로스의 부하들이 종종 언급했던 엘프 아가씨의 이름이었다.

아무리 엘프라 할지라도 450년이 지나 버린 이상 이미 고인이 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겠지만….

“히, 히익?!”

카이로스가 그답지 않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덜덜덜!

몸까지 사시나무처럼 떠는 걸 보니 겁까지 먹은 모양.

“왜 그러십니까?”

“그, 그 이름은 말하지 마라! 제발!”

“예?”

“짐 앞에서 아리엘… 흡! 아무튼! 그녀 이름의 ㅇ자도 꺼내지 말란 말이다!”

“…….”

“그녀는… 악마다! 악마란 말이다!”

숲의 종족이자 온화함의 상징인 엘프가 어떻게 하면 악마란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카미유는 굳이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좀 궁금하긴 했지만, 카이로스의 반응을 보니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짝사랑한 여자는 꽃뱀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라니. 여복이 없으시군. 쯧쯧.’

카미유가 내심 혀를 차며 카이로스의 기구한 인생을 가여워했다.

‘부디 이번 삶에는 술만 퍼마시지 마시고, 좋은 인연 만나시길….’

바로 그때.

“앗! 뺀질이 놈이 벌써!”

카이로스가 저 멀리 오토와 엘리제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토와 엘리제의 얼굴이 서로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

“……!”

카미유와 카이로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씨익!

두 사람의 입가에 아빠 미소가 떠올랐다.

* * *

같은 시각.

“뭐가 붙어 있었네요.”

“고맙다.”

오토는 엘리제의 반대편 볼에 먼지 같은 게 묻어 있는 걸 떼 주고 있었다.

“숙제 검사는 언제 할까요?”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수련은 게을리하지 마라.”

“당연하죠.”

오토와 엘리제의 대화는 지극히 건전했고, 또한 건설적이었다.

* * *

오토는 그래도 남자(?)랍시고 엘리제를 숙소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너도 편히 자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

“잘되어 가십니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카미유가 오토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가?”

“아가씨와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 아닙니까?”

“에이.”

오토가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뭘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가. 그런 거 아냐.”

“잘돼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하지만 아까….”

“아까 뭐?”

“입 맞추신 거 아녔습니까?”

“그걸 또 훔쳐보고 있었네. 어휴.”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감히 하늘같은 국왕 전하께서 약혼녀님과 시간을 보내시는데 기사 주제에 훔쳐봐? 어? 고개 돌렸어야지!”

이 세계의 궁중 예법상 왕과 왕비가 애정행각(?)을 벌일 때에는 환관이나 시종·시녀들이 고개를 돌리게끔 되어 있었다.

“저는 환관도 아니고, 시종도 아닙니다만.”

“그럼 시녀하면 되겠네.”

“…….”

“흠.”

오토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살짝 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거 좀 괜찮은 생각인데?”

“뭐가 말입니까.”

“힐을 신기고 드레스를 입히는 거지. 깐깐한 근육 아가씨 정도? 흐흐흐흐.”

“지금… 저에게 여장을 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안 될 게 뭐람? 내가 왕인데. 까라면 까야지.”

오토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말 안 들으면 확 여장시켜 버릴 줄 알아. 흐흐흐.”

“해볼 테면 해보십시오.”

카미유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농담 한번 했다고 그걸 또 죽자고 달려드네. 어휴. 기사 무서워서 왕 하겠나.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원. 여장도 못 시키는데 무슨 왕이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뉘예~ 뉘예~”

“그래서 진짜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까?”

“없었다니까. 뭔가 오해한 모양인데, 그냥 얼굴에 뭐가 묻어서 떼 드린 게 다야.”

“아?”

“연애는 무슨.”

오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께서는….”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엘리제 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예?”

“내 주제에 감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자기비하 같은 걸 하시는….”

“그런 거 아니고.”

오토가 선을 그었다.

“내가 부족하다,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여자다, 내가 감히 그녀를 사랑한다, 이딴 찌질한 감정 아냐. 극혐이라고, 그런 거.”

“그럼 뭡니까?”

“엘리제 님은 성품도 훌륭하시고, 고결하시고, 예쁘시고, 마음씨도 고운 분이셔.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한 면도 있고. 나도 남잔데 눈길이 가지. 어쩌면 마음이 갈지도 모르고.”

“근데 왜 주저하십니까?”

“그런 거 아냐. 나랑 엘리제 님의 관계는 단순한 남녀 사이가 아니라서 그래.”

“예…?”

“그냥 복잡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돼. 그러니까 지금은 묻지 말아줘. 나도 머리 아프니까.”

오토는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미소를 짓고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번엔 좀 늦을 것 같다. 두 달 후에 찾아오겠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토는 엘리제를 떠나보낸 후 한동안 <꼬르륵 군도>에 머물며 격무에 시달려야만 했다.

<꼬르륵 군도>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꼬르륵 군도>는 해적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인데다가, 거주하는 민간인들 역시 대부분 범죄자들이나 그 가족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탕해야 할 범죄자들도 많았고, 민심을 챙겨야 했으며, 새로운 법률까지 제정하고 배포해야 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오토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새벽까지 행정업무를 보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오타 왕국 본토 같았으면 와지르 대공과 공무원들에게 떠넘겼을 텐데….

그래서 오토, 카미유, 마검사들, 그리고 마법사들은 책상머리에 매달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각종 서류들을 들여다봐야 했다.

만약 블랙 와이번 까막이가 다 커서 훨훨 날 수만 있었다면, 카심으로 하여금 이오타 왕국에서 공무원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체포한 해적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모두 처형합니까?”

“미쳤어?”

오토가 드레이크의 물음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으르렁거렸다.

“예? 미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체포한 놈들은 대부분 극악무도한….”

“그러니까 미쳤냐고.”

“그건 아닙니다만….”

“아니긴 개뿔. 미친 거 맞는 거 같은데.”

“저 안 미쳤습니다. 그저 전하의 의견을 여쭤봤을 뿐입니다.”

드레이크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쯧쯧쯧.”

오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해적이라면 눈이 돌아가지고 처형할 생각밖에 못하지?”

“예…?”

“우리 손으로 직접 처형하면? 민심은 누가 챙겨? 아무리 흉악범들이라도 가족, 지인, 친구가 없을까?”

“그야 당연히….”

“그럼 그 가족, 지인, 친구들은 다 어디 사는데?”

“대부분 이곳 꼬르륵… 아!”

드레이크는 그제야 오토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민심.

지금 오토는 <꼬르륵 군도>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일 땐 죽이더라도 직접 죽이는 건 안 돼. 손에 피 묻혀 봐야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철저하게 조사해서, 봐줄 만한 놈들은 갱생하는 조건으로 봐줘.”

“예, 전하.”

“그리고 정 안 되겠다 싶은 놈들. 인간 아니다 싶은 놈들. 이런 흉악범들은 주변국 해군에 넘겨. 그럼 우리 손에 피 안 묻히고 슥삭 할 수 있잖아. 돈도 벌고.”

“돈… 말씀이십니까?”

“해군에 넘기면 현상금을 주잖아! 현상금!”

순간 드레이크는 오토의 두 눈이 금화로 보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글이글!

정말로 금화가 된 건 아니었지만, 오토의 두 눈은 돈에 대한 열망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쳤냐고 하셨던 거군.’

드레이크는 해적들을 처형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오토가 왜 발끈! 화를 냈는지 깨달았다.

“해군에 넘기면 돈을 준다고! 돈을! 대신 죽여 주기까지 하고! 손에 피 안 묻히고 돈을 버는 거란 말야!”

“죄, 죄송합니다.”

“해적이 싫다고 죽여 버리면 현상금은 어디 가서 받아? 앞으로 조심하란 말야.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드레이크는 갈굼이 끝난 줄 알고 발걸음을 떼었다가, 오토의 덧붙인 말에 흠칫! 몸을 바로 세웠다.

“흉악범들의 가족들은 적당히 몇 푼 쥐여 주고 내쫓아. 그럼 군도 내 반발이 최소화되면서, 민심이 어느 정도 수습될 거야.”

“예, 전하.”

“원한을 아예 안 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면 좀 낫겠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으니까, 괜히 흉악범들의 가족이라고 건드리지 마. 알겠지. 너 같은 피해자 만들지 말란 거야.”

“아.”

드레이크는 오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드레이크 역시 해군에 입대하려다가 아버지가 해적이라는 이유로 입대를 거부당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잘 처리하겠습니다.”

“나가 봐.”

“예, 전하.”

오토는 드레이크를 내보내고는 계속해서 서류를 들여다보며, 행정업무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유능할 줄이야.’

바로 옆 책상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카미유는, 오토의 행정 능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뛰어난 걸 보고 크게 놀랐다.

이오타 왕국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이곳 <꼬르륵 군도>에서 보니 오토의 행정적 능력은 가히 발군이었다.

그렇다면….

‘그간 귀찮아서 일부러 일을 안 하신 거였군.’

카미유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전하, 전하!”

“귁! 귁귁귁!”

한창 일을 하는데 카심이 펭이와 함께 뛰어 들어와 오토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카심은 <꼬르륵 군도>를 돌며 악질 범죄자들을 사냥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로부터 3초 뒤.

콰앙!

오토가 책상을 쾅! 내리찍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밀무여어억? 흐흐흐!”

오토의 입이 귀에 걸릴 기세로 쭉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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