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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153화 (154/401)

153화

“크윽.”

살라딘 왕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여, 여긴 어디요. 그대들은 누구시오.”

“여긴 이오타 왕국의 함대입니다. 쓰러져 계신 것을 모셨습니다. 이오타 왕국의 기사 카미유라 합니다.”

카미유가 살라딘 왕자를 부축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오타 왕국의 함대…?”

당연한 말이겠지만, 살라딘 왕자의 반응은 모두가 예상했던 바로 <그 반응>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대는… 카미유 아니오?”

“저를 아십니까?”

“몇 년 전에 슬레인 왕국을 방문했을 때 먼발치에서나마 그대를 만난 적이 있소이다. 그때….”

놀랍게도, 살라딘 왕자는 카미유를 알아보았다.

하기야, 카미유는 대륙에서도 꽤 이름을 날린 유명 인사.

살라딘 왕자가 알아보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옛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카미유가 살라딘 왕자의 말을 끊었다.

과거의 일을 별로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근데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오? 나는 분명 잘랄라바드를 시찰 중이었는데?”

살라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아무래도 폭발에 휘말렸을 당시 받은 충격으로 인해 잠시 기억이 끊인 모양.

드문 일은 아니었다.

장기적인 기억상실증이라면 몰라도 정신적·물리적 충격으로 인해 짧게나마 단기적 기억상실을 겪는 건 전쟁터에서도 흔한 일 아니던가.

움찔!

오토는 순간 허리춤에 차고 있던 부지깽이에 손을 올려놓았다가, 카미유의 매서운 눈빛에 본능을 억눌러야만 했다.

“쳇.”

오토가 입을 삐죽였다.

오래간만에 부지깽이로 누군가를 후려칠 기회를 좋은 기회(?)를 놓쳐서 심통이 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오타 왕국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입니다. 왕세자께선 잘랄라바드를 시찰 도중 적들의 공격을 받으셨고, 기절해 쓰러져 계셨습니다. 보십시오.”

오토가 불타는 잘랄라바드를 가리켰다.

“……!”

왕세자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멀쩡하던 잘랄라바드가 반쯤 폐허가 된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자, 잘랄라바드가 왜….”

그로부터 약 10초 후.

“아아. 아아아아.”

그제야 기억을 되찾은 살라딘의 입에서 비탄에 찬 탄식이 흘러나왔다.

“흑. 흑흑흑. 흐으으으윽. 흑흑. 끄윽. 흐으으으으으윽.”

털썩 주저앉은 살라딘이 통곡했다.

“유수프 경… 해머딘 경… 흑흑… 나의 백성들… 우리 왕조의… 흐어어억… 무역항이… 흑흑흑….”

한순간에 최측근은 유수프, 기사단, 그리고 백성들을 잃은 살라딘의 심경은 처절하다 못해 참혹할 지경이었다.

“…하필 이럴 때.”

오토는 그런 살라딘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거 상황이 진짜 안 좋은데. 하아.’

살라딘 못지않게 오토의 심경도 매우 복잡했다.

슬퍼하는 살라딘을 보고 마음이 안 좋은 건 당연했다.

게다가 오토 역시 일국의 왕이니만큼, 살라딘의 심정에 더욱 공감이 갔다.

하지만 오토는 있는 그대로 살라딘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 무슨 가챠 돌리는 심정이네.’

오토는 불안한 눈길로 살라딘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유가 있었다.

게임 <영지전쟁>의 주인공 캐릭터 중 하나인 살라딘은, 게임 초반 유수프를 잃은 직후 큰 전환점을 맞는다.

시나리오의 방향성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일종의 갈림길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 * *

<영지전쟁>의 주인공 캐릭터들은 각자 저마다의 사연·사상·신념·상황 등을 지닌다.

그리고 그에 따른 메인 시나리오도 존재하기 마련.

살라딘은 군주 캐릭터들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형태의 시나리오를 지닌 캐릭터였다.

약간은 유약하지만 신앙심이 깊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살라딘 왕자는, 초반 플레이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세계 최대의 마정석 채굴·수출 국가인 칼리프 왕국의 특성에 맞게, 살라딘 왕자는 돈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뭐든 돈으로 해결하는 Money Swag을 몸소 실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바로 살라딘이었다.

하지만 계속 돈을 처발라서 게임을 진행할 순 없는 법.

살라딘으로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제2막에 큰 이벤트가 발생한다.

제2막이 시작되면, 술탄은 왕세자인 살라딘에게 칼리프 왕국 곳곳을 시찰하고 오라는 퀘스트를 준다.

당연히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수락하고, 칼리프 왕국 5개 지역을 순회하며 시찰에 나선다.

이벤트는 그때 발생한다.

<유수프의 죽음>이라는 이 이벤트는, 왕실에 적대적인 부족들의 공격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게 랜덤이라는 것.

<유수프의 죽음>은 플레이어가 관여할 수 없는 오리지널 이벤트라서, 자유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공격을 해 올지 모르기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인 살라딘 왕자는 자신의 오른팔인 유수프 경을 잃고, 기사단도 잃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유수프와 기사단을 잃은 플레이어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

선택지는 다음과 같았다.

1. 유수프의 복수를 하겠다! 내 강력한 힘을 앞세워 다른 부족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오직 공포로서 군림하리라!

2. 아아! 언제까지 우리 칼리프가 죽고 죽이는 내전의 역사를 반복해야 하는가! 수백 년 피의 역사가 이제는 나에게까지 이어지고 말았구나!

1을 선택하면, 살라딘은 복수귀이자 강력한 폭군으로 성장해 공포정치를 펼치는 악마가 된다.

2를 선택하면, 역사서에 기록되는 성군이자 성자가 되어 부족 대통합을 이룬다.

즉, 살라딘은 제2막에서 발생하는 이벤트인 <유수프의 죽음>에 따라 캐릭터성과 향후 시나리오가 극과 극으로 달라지는 특이한 캐릭터였던 것이다.

그러니 오토가 불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직접 플레이하는 게 아닌 이상 살라딘이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지는 철저하게 랜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살라딘이 복수귀가 되어 폭군으로 돌변하기라도 한다면…….

‘어우.’

오토는 살라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가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흠칫! 몸서리쳤다.

그렇다고 역사서에 기록되는 성인[聖人]이 되는 선택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젠데. 휴우.’

오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쉴 때.

“아아.”

한참을 주저앉아 통곡하던 살라딘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탄식했다.

“왜… 왜 이리 싸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왜 우리 칼리프 왕국은 서로 죽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야 한단 말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흘러내린 피의 역사가 이제는 나에게까지 전해졌구나! 아난이시여!”

<아난>은 칼리프 왕국의 국교에서 모시는 주신[主神].

“저희 어리석은 종들이 언제까지 이리 죽고 죽여야 한단 말입니다! 아아아!”

바로 그 순간.

‘아.’

오토는 살라딘이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살라딘의 선택은 역사서에 길이 남을 성군이자 성자가 되어 칼리프 왕국의 부족 대통합을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시나리오의 끝은…….

“카심.”

“예, 여기 있습니다.”

“혹시 담배 있어요?”

“갑자기 담배라 하심은….”

“있으면 하나 줘요.”

카심은 비흡연자였으므로, 흡연자인 부하에게 담배와 숫돌을 빌려 오토의 입에 물려주었다.

칙, 치익.

카심이 불을 댕기고.

“후우.”

오토가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뿌연 담배 연기가 오토의 얼굴 주변으로 흩날리며, 부는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그걸 내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건가.”

오토의 입에서 씁쓸함 가득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 * *

몇 시간 후.

오토는 살라딘을 데리고 다시 잘랄라바드에 진입했다.

“사주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누구든 함부로 접근하는 이가 있거든 망설이지 말고 처단하라.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인이라 해서 예외는 없다. 어명이다.”

“예! 전하!”

명령을 내리는 카미유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서릿발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적들은 자폭 공격도 마다하지 않는 호전성을 지닌 전투민족.

괜히 어리바리 얼을 탔다가는 사고가 터지기 십상이었다.

혹시나 국왕인 오토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고.

“왕세자 저하!”

“왕세자 저하를 호위하라!”

때마침 살라딘을 찾아 헤매던 칼리프 왕국군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칼리프 왕국군 사령관이 살라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전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옵니다. 정녕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나는 괜찮소.”

살라딘이 대답했다.

“여기 계신 이오타 왕국의 국왕 이신 오토 드 스쿠데리아 전하와 그 기사들 덕분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소.”

“그렇습니까?”

사령관은 살라딘의 말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오토에게 무릎을 꿇었다.

척!

나머지 칼리프 왕국군 기사들과 병사들도 일제히 오토 일행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왕세자 저하를 구해 주시어 감사하오! 술탄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겠소이다!”

“감사를 표하겠소이다!”

덕분에 오토 일행은 칼리프 왕국으로부터 아주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본래 칼리프인들에게는 외지에서 온 손님들을 아주 극진히 대접하는 <접대의 관습>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왕세자인 살라딘 왕자를 구했으니, 오토 일행에 대한 칼리프 왕국의 대우는 국빈[國賓]그 이상이었다.

본의 아니게 첫 교역에서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카미유는 오토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한 건 했네?”

“예…?”

“카미유가 살라딘 왕자를 주워 와서 우리가 국빈 대우를 받게 된 거잖아.”

“그런 겁니까?”

“그럼.”

오토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대꾸했다.

“하긴 이렇게라도 쓸모가 있어야지.”

“예?”

“아냐, 아무것도.”

오토가 딴청을 피웠다.

부들부들!

카미유는 오토가 또 뺀질대기 시작하자 몸을 떨었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하극상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오토나 카미유나 적어도 남들 보는 앞에서만큼은 선을 넘지는 않게 된 것이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만 있을 땐 어김없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나를 구해 주신 분들이오. 술탄을 뵈러 방문하신 분들이니, 접대의 관습에 따라 대접에 있어 부족함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예, 왕세자 저하.”

그렇게 오토 일행은 칼리프 왕국의 국빈이 되어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본래 같았으면 어려웠을 술탄과의 만남도 문제없었다.

“내 술탄께 말씀드려 회담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은인께서는 저와 함께 수도 알살람으로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라딘은 오토를 생명의 은인이자 어엿한 군주로 인정해 주었기에, 술탄과의 만남을 <알현>이 아닌 <회담>이라 표현해 주었다.

약소국의 왕이라 해서 무시하거나 얕잡아보는 태도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본성이 이런 사람이지, 살라딘은.’

오토는 살라딘에 대한 공식 설정을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살라딘은 어려서부터 선량하고 자비로웠으며, 신앙심 또한 투철한 사람이었다.

‘흠. 어쩌면 1번 선택지는 플레이어를 위해서 만들어진 시나리오가 아니었을까?’

오토는 <유수프의 죽음> 이후 주어지는 선택지 중 하나가 어쩌면 개발자들이 플레이어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배려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절대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복수귀이자 폭군이 되는 1번 선택지를 선택하지, 성군이자 성자가 되는 2번 선택지를 선택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스토리나 볼 겸 가장 쉬운 난이도에서 가볍게 한번 플레이하는 게 전부.

“은인들께선 오랜 항해로 피곤하셨을 텐데, 오늘 하루쯤은 푹 쉬십시오. 전쟁터나 다름없는 도시이나, 사태가 진정되었으니 지내시는 데 안정상의 우려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군이 지켜드릴 것입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살라딘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살라딘이 발걸음을 옮긴 곳.

“엄마, 엄마아. 일어나 봐요. 엄마. 왜 이러고 있어요.”

한 소년이 싸늘한 주검이 된 어머니를 붙들고 오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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