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괜찮으냐?”
살라딘이 어머니를 잃은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엄마가… 엄마가 일어나지 않아요, 나으리. 흑흑흑.”
소년이 울먹였다.
“네 어머니께서는… 신의 곁으로 가신 거란다.”
“도, 돌아가신 건가요? 흑흑흑.”
“누구나가 살다 보면 신의 곁으로 가게 되는 거란다. 어머니는 조금 빨리 가신 것뿐이야.”
“흑흑흑.”
“일어나라, 어머니께서도 네가 굳세게 일어나길 바라실 터이니.”
살라딘은 소년을 일으켜 세워 주고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이 아이 어머니의 시신을 사원에 모셔라. 예법과 교리에 따라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 왕세자 저하.”
살라딘이 다시 소년을 돌아보았다.
“흑흑.”
소년은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살라딘은 조용히 그 곁을 지켰다.
그러던 중.
“나으리, 누리스탄족들이 엄마를 죽인 거죠? 그런 거 맞죠?”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인 소년이 입을 열었다.
“누리스탄족들은 신의 뜻을 배반한 나쁜놈들이에요! 놈들이 엄마를 죽였어요! 죽였다고요!”
이를 악문 소년의 눈에 증오와 살기가 번뜩였다.
“누리스탄족들은 신의 뜻에 복종한다면서 왜 엄마를 죽인 거죠? 왜 이런 나쁜짓을 벌인 거예요?”
“…그건.”
“누리스탄족들을 죽일 거예요.”
소년이 으르렁거렸다.
“이담에 커서, 전사가 돼서, 누리스탄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일 거예요. 그놈들은 악마니까요.”
어머니를 잃은 소년의 증오와 분노를 불태우며 복수를 다짐했다.
흔한 일이었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이곳 칼리프 왕국에서 심심찮게 벌어진, 아주 흔한 일.
복수와 복수가 대를 이어서 반복되는 피의 역사였다.
“아들아.”
살라딘이 소년을 타일렀다.
“네 어머니를 죽인 누리스탄족들은 마땅히 신의 뜻에 따라 벌을 받을 것이다. 전능하신 아난께서는 사악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결코 용서하시는 법이 없으시지.”
“맞아요! 그놈들은 신의 징벌을 받을 거예요! 제가 신을 대신해서 놈들을 죽일 거예요!”
“하지만 모든 누리스탄족이 악마는 아니란다.”
살라딘이 소년을 달랬다.
“신의 뜻을 잘못 해석한 어리석은 자들이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이고는 한단다. 그들은 마땅히 벌을 받을 거야. 그러니 모든 누리스탄족을 미워할 필요는 없단다.”
“하, 하지만.”
“서로에게 항복하면 너희 마음에 평화가 깃들 것이니, 반목하고 싸우지 않게 되리라.”
살라딘 왕자가 경전의 한 구절을 소년에게 읊어주었다.
“쉽지 않겠지. 어린 마음에 얼마나 그들이 밉겠느냐. 하지만… 신은 결코 우리가 죽고 죽이는 걸 원하지 않으실 거야.”
“…….”
“내 반드시 평화를 이룩하여 네 어머니처럼 일찍이 신의 곁으로 가시는 분들이 없게 하겠다. 내 약속하마.”
살라딘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잘랄라바드 시내를 돌며 부상당한 이들을 위로하고, 돌보았다.
또한, 이번 사태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등 왕세자로의 역할을 다했다.
“왕세자 저하, 너무 위험하옵니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소서.”
기사들이 살라딘을 뜯어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나의 백성들이다! 어찌 왕세자인 내가 이 몸의 안전만을 도모한단 말인가? 여기 보이는가? 나를 지키려다 전사한 기사의 시신이다. 내가 직접 수습하지 않으면 누가 수습한단 말이냐!”
살라딘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살일 줄을 몰랐다.
‘저게 진짜 왕이다. 저게 군림이지.’
오토는 살라딘 왕세자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어땠지?’
오토는 스스로를 돌이켜보았다.
돌이켜 보니 살아남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 기억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제왕학을 배운 적도 없는 그저 평범한 게이머였으니….
‘나도 일국의 왕이고, 군주야. 보고 배워야 해.’
오토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이오타 왕국군.”
오토가 입을 열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오토를 뒤따르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부터 복구작업을 돕는다. 우리는 여기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부상자들의 치료와 시신 수습에 힘을 보탠다.”
“예, 전하!”
오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오타 왕국의 군복을 입은 모든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칼리프 왕국군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훌륭하시옵니다.’
‘끌끌끌. 뺀질이 놈이 뭔가를 보고 배운 모양이로군.’
카미유와 카이로스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 * *
칼리프 왕국을 도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오토의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칼리프 왕국의 국교 <인샬라>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교인들은 사망 직후 24시간 안에 매장하고 간단한 장례를 끝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일손이 부족해 모든 시신들을 24시간 안에 매장하고 장례를 치른다는 건 불가능한 상황.
‘부상자 치료와 시신 수습이 최우선이야.’
오토는 칼리프 왕국의 문화를 잘 알았기에, 매우 적절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마검사들과 마법사들은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 집중하라.”
“예, 전하.”
마검사들이나 마법사들이 마법에 조예가 깊은 만큼, 그들의 치유 마법은 저승의 문턱에 선 환자들을 살리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시신 수습에 최선을 다하라. 복구작업보다 중요한 게 시신 수습이다. 현지인들의 관습과 예법에 따라서, 시신을 수습해 매장하는 걸 도와라.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예, 전하.”
오토의 명령이 내려지자 이오타 왕국군은 칼리프인들을 도와 시신 수습에 최선을 다했다.
시신 수습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몸이 힘든 건 둘째 치고,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폭발과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진 뒤였기에, 시신들이 멀쩡할 리 없었다.
사지 중 하나가 끊어진 시신은 그나마 양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산산조각이 나 버린 시신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지간한 담력과 강한 비위 없이 그런 시신들을 수습한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일.
평생을 두고 악몽에 시달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오타 왕국군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시신 수습에 나섰다.
왜?
군주인 오토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몸소 시신 수습에 동참했으니까.
‘내가 직접 나서야 우리 장병들의 심리적 충격이 조금이나마 덜해진다. 그래야 거부감 없이 임무에 임할 수 있어.’
덕분에 오토는 칼리프인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일면식도 없던 외국 군대가 열과 성을 다해서 시신 수습을 도와주니, 민심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나, 종교적 교리에 따라 사후 24시간 안에 매장을 중요시하는 칼리프인들에게는 더더욱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을 터.
그날 밤.
무사히 장례식을 끝낸 살라딘은, 오토의 손을 꼭 붙잡고 연거푸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은인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장례식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국익을 위해 칼리프 왕국과 거래하러 온 장사치에 불과합니다.”
오토가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칼리프 왕국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거래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그런 제가 칼리프 왕국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하하하.”
살라딘이 웃었다.
“그리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니, 저로서는 오히려 더 은인께 호감이 갑니다.”
“네…?”
“아무리 국익을 위해서라 한들 일국의 왕께서 이렇듯 발 벗고 나서주시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시신 수습이라는 험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시고, 몸소 나서 주시는 모습에 솔직히 크게 놀랐습니다.”
“하하하….”
“은인께 평화가 함께하길.”
살라딘은 얼떨떨해하는 오토에게 성호를 그어 축복을 해 주고는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알살람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왕세자의 신분인지라, 저 역시 더는 이곳에 머무르기 어렵습니다.”
“아, 예.”
“술탄께 서신을 보내 전하와의 회담을 청해 놓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술탄께서도 은인께서 행하신 숭고한 봉사에 대해 전해 들으신다면, 접대의 관습에 따라 융숭하고 극진한 대우를 해 주실 것입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소서.”
살라딘은 오토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사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죽은 이들을 위해 밤새도록 기도를 올릴 작정인 모양.
“아무리 그래도 이 야심한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한데.”
오토가 살라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50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기는 했지만…….
“괜찮겠습니까?”
카미유도 살라딘이 걱정되는지, 오토에게 물었다.
“얼씨구?”
오토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카미유를 노려보았다.
“완전히 푹 빠진 표정이네?”
“살라딘 왕세자는 훌륭한 군주가 될 자질이 엿보이는 사람입니다. 기사로서 그러한 사람을 흠모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어어?”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주 갈아타시겠어? 갈아탈래? 보내줘? 가고 싶으면 가! 가라고! 안 잡아!”
“제 주군은 오직 전하뿐이십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지?”
“정말입니다.”
“웃기네. 아주 열녀 났네, 열녀 났어.”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절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오해십니다.”
“어디 딴마음 먹기만 해. 확 부숴 버릴 줄 알아. 충성 맹세할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거둘 땐 아니란 것만 명심해 둬.”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흥.”
오토는 콧방귀를 뀌고는, 살라딘을 뒤따라 사원으로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지켜주려고.”
“예?”
“혹시 몰라. 왕세자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더 있을지도.”
“아?”
“안심할 수 없어. 아무리 칼리프 왕국군과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도, 뛰어난 암살자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그땐 왕세자도 저세상 사람 되는 거야. 알살람에 도착할 때까지는 긴장 놓으면 안 돼.”
“몸소 가십니까?”
“응.”
“전하께서 직접 나서실 것까지 있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시면….”
“어쭈.”
오토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카미유를 윽박질렀다.
“아주 바람피우려고 작정하셨구만? 어.”
“예…?”
“살라딘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개수작 부리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단둘이 있으면 뭐 하게? 달콤한 충성이라도 속삭이시게?”
“…….”
“기사 마음 갈대라더니. 발정한 수퇘지마냥 살라딘 근처에서 낑낑대는 거 보소?”
“그게 뭔 개ㅅ….”
“아무튼 안 돼! 절대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니!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카미유는 오토가 진상을 피우자 몰려드는 피로감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하다하다 질투까지?
어째 한동안 조금 진지해졌다 싶었더니, 어김없이 꼬장을 피우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늘어놓을 줄이야….
“확 그냥 내 손으로 죽여 버려? 쒸익쒸익!”
오토가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사원 근처.
스으으!
오토의 두 눈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어디 보자.’
오토는 투시를 이용해 사원 안을 자세히 살폈다.
텅 빈 사원 안.
“아난이시여, 부디 가엾은 이들을 굽어 살피소서. 더는 이 땅의 형제자매들의 피가 흐르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살라딘의 입에서 나지막한 기도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상대로, 살라딘은 밤새도록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작정인 게 분명했다.
‘어휴.’
솔직히, 오토는 살라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살라딘 같은 성인[聖人]은 세속주의에 찌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 투철한 신앙심과 고결한 성품을 무슨 수로 이해할까.
‘난 경계나 서자.’
오토는 사원 밖에 죽치고 앉아 투시를 이용해 살라딘의 주변을 감시했다.
“컵라면 마렵네. 쩝.”
오래간만에 보초를 서려니 군복무 시절이 떠올랐다.
아!
그 시절 컵라면의 추억이여!
야간 경계근무를 마치고 즐기던 컵라면의 맛이란 얼마나 꿀맛이었던지….
“컵라면이 뭡니까?”
“그게 뭐냐면….”
그때.
“……!”
사원 천장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