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그래! 이오타! 이오타 왕국! 하하하하하! 내 미안하오! 요즘 국정 운영에 신경을 쓰느라….”
“괜찮습니다.”
오토는 소매로 눈물을 슥 훔치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고객님한테 뭐라고 할 수 없지.’
압둘 2세는 큰손 중의 큰손.
잘만 구슬리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물주.
변방의 코딱지만 한 나라 이름쯤 기억 못할 수도 있지.
흑흑….
“이제부터 우리 칼리프 왕국과 이오타 왕국은 형제의 나라로서 연을 맺은 것이오!”
“정말 감사합니다.”
“오토 국왕! 그대는 나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오토가 압둘 2세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었다.
“크핫핫핫핫핫!”
압둘 2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게 정말이오? 크핫핫핫핫핫!”
“예, 술탄이시여.”
“좋소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오타 왕국은 우리 칼리프 왕국의 동생이오! 과인 역시 그대의 형님이 되는 것이고! 크핫핫핫핫!”
“예, 형님.”
오토가 고개를 조아리고.
“오오!”
“저 이역만리 나라도 우리 술탄을 우러러보는구나!”
“크! 역시 술탄이시다!”
이를 지켜보던 알살람의 신민들은 애국심이 한껏 고취되어 압둘 2세를 존경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덕분에 압둘 2세의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오토가 가려운 부분을 아주 정하게 콕 찍어 슥슥 긁어 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압둘 2세가 나라 이름을 깜빡하는 사소하고도 앙증맞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첫 만남은 이만하면 대성공이었다.
“자! 오토 국왕! 아니! 이제 동생이라고 해야 하나? 크핫핫핫핫!”
“예, 형님.”
“가지! 내 먼 길을 온 자네를 너무 왕궁 앞에 세워 두었구먼! 자! 가세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토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왕궁 앞에 세워 두긴 개뿔. 일부러 그랬으면서. 답정너 같으니. 어휴.’
오토는 압둘 2세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압둘 2세가 왕궁 입구까지 행차한 이유는, 오토 일행의 활약이 고맙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 의도가 숨어 있는 보여 주기식 정치쇼였던 것이다.
오토는 그걸 간파했기에 장단을 맞춰 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게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
“괜찮으십니까?”
카미유가 오토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가?”
“혹시 자존심이 상하셨을까 걱정돼서 여쭤 본 겁니다.”
“에이.”
오토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국익 앞에서 내 자존심이 뭐가 중요해.”
“…전하.”
“어차피 이렇게 먼 나라에서 내 체면과 국격 내세워 봤자 득될 것도 없어. 압둘 2세는 얻을 게 있겠지만. 그리고 말야.”
오토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돈 앞에 자존심이 어딨어? 돈 준다고 하면 납작 엎드려서 개처럼 기는 거지.”
“예…?”
“돈, 도온, 도오오온.”
순간 카미유는 오토의 두 눈이 마치 금화처럼 보여서 흠칫 놀랐다.
‘역시 돈 때문이었군.’
카미유는 한때마나 오토의 자존심을 걱정한 걸 후회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는 사이.
‘역시 안 보이네.’
오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살라딘이 보이자 않자 속으로 씁쓸해했다.
‘보나마나 압둘 2세를 찾아가서 전쟁을 멈춰 달라고 읍소하다 미움을 샀겠지.’
보나마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좀 참지….’
오토는 못내 안타까웠지만,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씁쓸함을 삼키고 압둘 2세를 뒤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 * *
압둘 2세는 강력한 왕권을 거머쥔 군주로서, 스스로의 권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만큼 업적에 대한 야망도 컸고,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아주 강했다.
즉, 적당히 비위만 맞춰주고 체면만 세워 준다면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손해를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오토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압둘 2세와의 단독 회담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너무 뽑아먹으려고 하지는 말자. 상대는 노련한 너구리니까.’
오토는 자만하지 않았다.
압둘 2세는 허영심과 과시욕이 큰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호구는 아니었다.
절대왕정을 구축하기 직전의 군주가 머저리일 리 없었다.
당장 왕궁 앞까지 행차해서 정치적인 이득을 챙긴 것만 봐도, 압둘 2세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래, 동생.”
압둘 2세가 옥좌―좌식 형태의―에 앉으며 느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오토를 확실히 아래로 두려는 게 분명한 태도.
하지만 오토는 동요하지 않고 잠자코 압둘 2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듣자 하니 과인과 거래를 하고 싶어서 이 먼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더군.”
“예, 형님.”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고?”
“그것이….”
오토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형님께 크라레스 제국 초기의 유물들을 팔러 왔습니다.”
“크라레스 제국 초기의 유물이라…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건 내게도 많이 있다네. 고가의 유물을 몇 점 소유하고 있지.”
압둘 2세가 흥미가 식었다는 듯 다소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토는 실망하지 않았다.
“만약 그 유물들이 아르곤 대제의 무덤에서 나온 거라면 어떻겠습니까?”
“아르곤 대제의 무덤이라… 아르곤 대제의… 뭣이?!”
압둘 2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아르곤 대제 말인가? 크라레스 제국 초대 황제인 그 아르곤 대제?”
“예, 형님.”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아르곤 대제의 무덤에 매장되어 있던 부장품들입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제가 어떻게 형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서 보여 주게! 내 부탁함세!”
압둘 2세는 아르곤 대제의 부장품들이란 말에 눈이 완전히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크라레스 제국 시절의 유물이야 지금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아르곤 대제의 부장품이라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구경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저희 화물이 어디 있습니까?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압둘 2세는 이오타 왕국의 화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수레에 실려 있는 유물들을 구경했다.
반응은 확실했다.
“오오오! 오오오오오오오!”
평소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던 압둘 2세는, 오토가 가져온 부장품들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문양… 이 형식… 크라레스 제국 초기의 예술품 양식인데… 모두 최고의 실력을 가진 드워프들이 직접 세공한… 허허… 허허허허.”
“어떠십니까?”
“최고일세! 최고야! 내 평생 봐 왔던 그 어떤 예술품들보다 아름답구먼! 게다가 이런 희소성이라니! 이 유물들을 구경하는 호사를 누린 군주가 이 세계에 과인 말고 또 있겠는가!”
“당연히 없습니다.”
오토가 이때다 싶어 압둘 2세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 유물들을 손에 넣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형님이십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칼리프 왕국은 세계 최대의 부국입니다. 이 유물들을 살 만한 사람이 형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크흠! 우리 동생의 말이 백번 옳구먼! 허허허! 암! 이 유물들을 살 사람은 오직 과인밖에 없음이야!”
어느새 오토를 부르는 압둘 2세의 호칭이 <동생>에서 <우리 동생>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아, 그리고.”
오토가 덧붙였다.
“이번에 제가 고급 주류와 담배와 소금도 많이 가져왔는데….”
여기서 말하는 고급 주류, 담배, 소금은 당연히 아르곤 대제의 밀무역선들로부터 약탈한 장물(?)이었다.
물론 지금 보여 준 유물들 역시 장물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걱정 말게! 내 시세의 10배로 사 줌세!”
“그게 정말이십니까? 형님?”
“우리 동생이 파는 건데 값을 후려칠 수야 있겠는가? 관세도 무관세로 매입해 줄 터이니, 걱정 붙들어 매게나.”
“형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토는 솔직히 어질어질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려 10배의 가격에 무관세로 매입을 해 준다니, 오토의 입장에선 엄청난 이문을 남긴 셈이었다.
밀무역선들을 털어서 번 금액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거금을 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장품들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된 건가? 설마….”
“예, 맞습니다.”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직접 발굴했습니다.”
“아, 아르곤 대제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말인가? 자네가?”
“그게 아니고서는 제가 어떻게 아르곤 대제의 부장품들을 여기까지 가져올 수 있었겠습니까?”
“허어! 이 무슨!”
압둘 2세는 오토의 이야기를 듣고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내가 이러려고 그 개고생을 해 가면서 여기까지 배타고 온 거지.’
오토는 압둘 2세가 열렬한(?) 반응을 보이자 매우 뿌듯했다.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자네의 모험담을 듣고 싶구먼.”
“얼마든지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기대함세. 정말 흥미로운 모험담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러고.”
압둘 2세가 뜸을 들였다.
“그래서 자네는 아르곤 대제의 부장품들을 이 형님에게 얼마에 팔 생각인가?”
흥정이 시작되었다.
* * *
한편, 꼬르륵 군도에서 출발한 엘리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북부 장벽에 도착했다.
무려 대륙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엘리제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엘리제는 섭리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북부로 향할 때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거의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왔느냐.”
“예, 할아버님.”
때마침 시찰을 나온 북부대공 지안카를로가 엘리제를 맞았다.
“휴가를 냈다지?”
“예.”
“형님의 손주 녀석을 만나고 오는 참이냐?”
“그렇습니다.”
“이번 만남은 어땠느냐?”
“약혼자는….”
엘리제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지안카를로는 평소 얼음장 같이 차갑고 무뚝뚝한 엘리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걸 보고 놀라워했다.
‘허허! 이 아이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도 알았구나! 허허허! 과연 형님의 손주 녀석이 이 아이의 배필감인 게 틀림이 없도다!’
사실상 엘리제를 시집보내길 포기했던 지안카를로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경사가 없을 지경.
‘내 어떻게든 우리 엘리제와 그 녀석을 엮어내 사돈을 맺고 말 것이다. 형님! 어디 도망쳐 보시오! 이 지안카를로가 형님의 손주 녀석을 놓아줄 줄 아시오?’
지안카를로는 어떻게든 오토를 손녀사위 삼으리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래, 이 할아비와 차라도 한잔 하자꾸나. 네 얘기를 듣고 싶구나.”
“예, 할아버님.”
지안카를로는 엘리제를 앉혀 놓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래? 그랬어? 껄껄껄껄!”
지안카를로는 엘리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우 행복해했다.
좀 주책 같긴 했지만, 지안카를로도 나이를 먹은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손녀인 엘리제와 사윗감인 오토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광대뼈가 저절로 승천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래, 그 녀석이 칼리프 왕국으로 갔다고?”
“예, 할아버님.”
“허어. 칼리프 왕국이라. 괜찮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녀석이 술탄을 만나러 갔다고 하지 않았더냐?”
“예.”
“혹시 녀석이 하렘에라도 가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하렘… 말씀이십니까.”
“하렘을 모르느냐?”
“소녀의 견문이 짧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엘리제가 얼굴을 붉혔다.
한평생 오직 검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인지라, 박학다식하지 못했으므로….
“하렘이란 말이다….”
지안카를로가 엘리제에게 대륙에 떠도는 하렘에 대한 풍문을 이야기해 주었다.
정작 지안카를로 본인도 하렘에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서 이 할아비는 못내 걱정되는구나. 혹시나 술탄이 그 녀석을 하렘에 데려가기라도 한다면…….”
그런데.
“으음?”
지안카를로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말을 하다 말았다.
왜냐하면….
훼엥~
손녀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