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벌컥벌컥!
“크으.”
압둘 2세는 알코올을 분해해 주는 해독 포션인 <여명의 물약>을 들이키고는 어전으로 향했다.
연회에서 꽤나 술을 많이 마셨지만, 바로 잠들지 않고 해독 포션의 도움을 받아 정사(政事)를 돌보는 것이다.
그건 절대 권력의 소유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는 압둘 2세조차 일국의 군주로서 그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전에는 칼리프 왕국군 수뇌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여명의 물약>로 알코올 기운을 해독시키고 있었다.
연회 때 압둘 2세가 따라준 술을 받아 마시느라 군 수뇌부들 역시 알딸딸하게 취해 있었던 것이다.
일중독에 걸린 압둘 2세의 신하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회의가 길어지겠다 싶으면 아예 기저귀를 차고 참석하는 신하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술탄을 뵙습니다.”
“술탄을 뵙습니다.”
“술탄을 뵙습니다.”
군 수뇌부들이 무릎을 꿇으며 압둘 2세를 맞았다.
“그래, 연회는 잘들 즐겼는가.”
압둘 2세가 물었다.
“예, 술탄이시여.”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군 수뇌부들.
하지만 그들의 속은 달랐다.
‘크윽. 속 쓰려 죽겠군.’
‘술을 그렇게 따라 줘 놓고 이 시간에 회의를 소집하시다니.’
‘아무리 알코올 해독 포션을 마셨다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 우욱!’
군 수뇌부들은 죽을 맛이었지만, 언감생심 티를 내진 못했다.
군주인 압둘 2세조차 바로 잠들지 않고 오밤중에 회의를 열어 국정업무를 돌보겠다는데, 어찌 불만을 드러내겠는가.
“전황은 어떤가.”
압둘 2세가 물었다.
“예, 술탄이시여.”
국방대신이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현재 우리 군이 누리스탄족 마을 6개를 초토화시키고, 누리스탄족 반군들의 주둔지를 확인했다고 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적대적인 부족들의 마을 역시 실시간으로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사옵니다.”
“오! 그게 정말인가?”
“예, 술탄.”
국방대신이 지도를 가리켰다.
“첩보원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누리스탄족 반군들은 여기 이 지역에 주둔해 있다고 하옵니다.”
“오호라!”
“적당한 시기를 맞춰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면, 그들의 주둔지를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좋다.”
압둘 2세는 전쟁이 개전 초기부터 술술 풀려가는 듯하자 크게 기뻐했다.
“속히 누리스탄족 주둔지를 공격해, 우리 왕조의 위엄을 바로 세우도록 하라.”
“물론이옵니다.”
“또 다른 소식이 있는가?”
“예, 술탄.”
국방대신이 지도의 또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누리스탄족 반군을 토벌하시는 김에 여기 이곳 하나피족의 도시를 공략하시는 게 좋다고 사료되옵니다.”
“그건 당연하다. 빌어먹을 하나피족 놈들이야 누리스탄족 놈들 못지않게 지독한 놈들이 아니던가.”
“예, 술탄이시여. 하지만 지금 출전한 우리 군의 규모로는 하나피족 도시까지 공략하는 건 어렵사옵니다. 추가 병력을 보내시어 따로 공략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그렇게 하겠다.”
압둘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피족 놈들의 도시를 공략할 군대를 출정시켜라.”
“예, 술탄이시여.”
“그리고 그 부대는….”
압둘 2세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왕세자를 지휘관으로 임명하라. 왕세자가 짐을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하나피족 도시를 공격할 것이다.”
* * *
‘막지 못하면 전하가 죽는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카미유는, 어떻게든 엘리제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력으로는 도저히 답이 없었다.
당장 해골섬 전투 당시 엘리제가 보여 주었던 무력을 떠올려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단언컨대, 엘리제가 누군가를 죽이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쩌면 칼리프 왕국군 전체가 덤벼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되면 칼리프 왕국과의 거래가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그 전에 오토의 목이 날아가게 될 터.
‘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
불과 1~2초 사이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카미유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카미유는 궁여지책으로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했다.
오직 군주인 오토를 살리기 위해서.
“엘리제 아가씨.”
카미유가 엘리제에게 다가섰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저는 사실.”
카미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뒤는 없을 것이었으므로.
“전부터 아가씨를. 크윽.”
“……?”
“마, 마음에. 담아두고. 이, 있었습니다.”
쿠웅!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카미유의 심장도 철렁!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니.’
어떻게는 엘리제의 주의를 돌려보고자 이런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카미유의 심정이란, 그야말로 참담했다.
‘오토 이 빌어먹을 자식아! 명색이 형인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카미유는 속으로 오토를 욕하며, 엘리제의 반응을 기다렸다.
“음.”
놀랍게도, 엘리제는 딱히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가슴을 졸이는 카미유.
하지만 엘리제의 반응은 카미유가 예상했던 것과는 180도 달랐다.
“역시 그랬나.”
“예…?”
“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간 수없이 많은 이들이 내게 고백을 해 왔다. 지금 그대처럼.”
“아.”
“말단 병사부터 곁에 있는 기사들까지. 자꾸만 고백을 해 오는 바람에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남자들은 왜 자꾸 불편한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엘리제가 씁쓸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랬겠지.’
엘리제는 공주병 같은 것에 걸린 게 아니었다.
카미유는 엘리제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데에 100퍼센트 동의할 수 있었다.
엘리제는 대륙 제일의 미녀.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누구도 그녀의 어마어마한 무력과, 까마득하게 높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테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
“그, 그렇습니까?”
“알다시피 나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그리고 그 약혼자는 그대가 모시는 군주 아닌가.”
“맞습니다.”
“실망이다, 카미유 경.”
“…….”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나 역시 그대의 고결한 업적을 깊이 존경했었다. 그런데 모시는 군주의 약혼녀에게 고백을 하다니.”
엘리제의 말을 들은 카미유는 그냥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었다.
주르륵.
카미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금단의 사랑에는 손대는 게 아니다. 설령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한들,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놓아선 안 되는 거였다. 차라리 약혼자의 곁을 떠나는 편이 나았다는 걸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대를 탓하지 않겠다. 그대의 사연을 알기에.”
엘리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의 시선으로 카미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건.”
“그녀는 이미 잊은 건가.”
카미유는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제가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렸으므로.
“잊을 때도 되었겠지. 나도 잊어야 한다, 그녀처럼.”
카미유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는 왜 힘든 사랑만 하는 건가.”
“…아가씨.”
“부디 진정한 사랑을 찾길 바란다.”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며, 카미유를 지나쳐 하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안 돼!’
카미유는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오토를 살리기 위해서, 정신을 다잡고 엘리제의 앞을 막아섰다.
“좋습니다. 아가씨의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하지만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뭔가?”
“잠깐만 저와 이야기를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나는 그대와 더는 할 얘기가 없다.”
“전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혼자에 대해서?”
“예, 아가씨.”
“그렇다면 잠깐 시간을 내겠다.”
엘리제는 카미유의 고백(?)에도 칼같이 선을 그었지만, 오토에 대한 이야기란 말에는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잠깐 이쪽으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알겠다.”
오토를 살리기 위한 카미유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 * *
카미유가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줄도 모르고, 오토는 하렘 안에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간 힘들었던 여정의 회포를 푸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살랑살랑~
하늘하늘~
무희들이 칼리프 왕국의 전통음악에 맞추어 아름다운 무용을 선보였다.
“잘한다! 잘해! 크핫핫핫핫!”
카이로스는 무희들에게 둘러싸인 채 공연을 관람하며 연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냥 아이돌 공연 보는 삼촌팬 같은데.’
오토는 입을 헤벌쭉 벌린 채 좋아하는 카이로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와중에 헛짓거리는 안 하네. 가만 보면 의외로 건전하단 말야. 쳇.’
오토는 카이로스가 헛짓거리(?)를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이로스는 의외로(?) 건전한 아저씨였다.
무희들에게 함부로 손대는 법이 없었고, 꼴사나운 술주정을 부리지도 않았다.
주책없는 구석은 있었지만, 지극히 건전하게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의외로 순정파라는 건가? 하긴. 순정파가 아니었으면 그 꽃뱀한테 놀아나지도 않았겠지.’
카이로스의 과거를 떠올려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긴 했지만.
‘어휴. 피곤해. 좀 알딸딸하네. 들어가서 쉬어야지.’
오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엥? 벌써 일어나느냐? 뺀질아? 왜 더 놀지 않고?”
카이로스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없어. 술도 좀 취한 거 같고. 들어가서 잘래.”
“허허! 이 풍류를 모르는 놈 같으니! 네놈이 그러고도 사내냐!”
“예~ 어련하시겠어요~”
오토를 잡아끄는 건 비단 카이로스뿐만이 아니었다.
“어머, 전하. 왜 벌써 일어나시려고 그러세요.”
“전하~ 같이 더 놀아요오~”
“이렇게 잘생기긴 우리 전하께서 벌써 자리를 뜨시면 저희들은 어떻게 하나요~? 부디 좀 더 있다 가셔요~”
무희들이 오토를 둘러싸고 질척거렸다.
하지만 오토는 하렘에 더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사실 카이로스의 장단을 맞춰주려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
카미유처럼, 오토도 이런 술자리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살라딘 때문에 머리가 아픈 상황이기도 했고.
‘일단 가서 생각 좀 정리하다 자자.’
무희들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엘리제 님?’
오토는 엘리제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걸 보고, 이게 현실이 맞나 싶어 눈을 끔뻑거렸다.
‘나 취했나?’
살짝 알딸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사불성으로 취한 건 아니었다.
‘진짜 엘리제 님인가?’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욱신욱신!
매우 아팠다.
그렇다는 말은…….
“히, 히익?!”
오토가 놀라 나자빠졌다.
이번에는 두 달 있다 온다던 엘리제가 왜 하렘 안에 있다는 말인가?
후들후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괄약근에 힘이 풀려서, 오줌을 지리기 직전이었다.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에. 엘리. 제. 니, 님이. 여, 여긴. 어. 쩐. 일로.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오토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약혼자.”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따라 나와라.”
“예…?”
“좋게 말할 때 따라 나와라. 긴말하지 않겠다.”
“…네.”
오토는 엘리제의 명령에 축 늘어져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오토의 모습이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았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이만 안식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만큼은 부디 행복하시기를.
오토는 살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