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카미유의 눈물겨운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카미유는 엘리제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온갖 아무말대잔치를 쏟아내며 오토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20분 정도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약혼자는 어디 있다는 건가?”
“전하께선 지금 숙소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카미유 경.”
“예?”
“약혼자를 지키기 위한 그대의 노력은 인정한다.”
“……!”
“하지만 나는 안다. 약혼자가 저 안에 있다는 걸.”
“아, 아가씨.”
“약혼자를 만나야겠다.”
결국, 카미유는 엘리제 잡아두기에 실패했다.
단 5분.
아니 1~2분이라도 더 시간을 끌었다면 오토가 무사히 하렘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덕분에 오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엘리제를 뒤따라야만 했다.
엘리제를 따라 가는 길.
‘뭐 했어… 왜 안 막았어.’
오토가 눈빛으로 카미유를 책망했다.
‘뭐라도 좀 하지.’
‘저도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그래, 이제 와 탓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그동안 고마웠어.’
오토는 카미유와 눈빛으로 대화하다 말고 고개를 푹 떨궜다.
그렇게 으슥한 곳으로 끌려간 오토와 카미유.
“카미유 경.”
엘리제가 카미유를 불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카미유 경은 가라.”
그 뒤에 함축된 말이 <뒈지기 싫으면>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카미유는 엘리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카미유가 제아무리 오토의 기사라고 한들 이 사건은 남녀 간의 문제.
더는 끼어들 구석도, 명분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잊은 건가.’
본의 아니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까지 최선을 다하기도 했고.
‘설마 진짜 죽이지는 않을 테니.’
카미유는 자리를 피해 주면서, 오토의 귓가에 속삭였다.
“늦기 전에 싹싹 비십시오.”
“그런다고 살 수 있을까?”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순 없잖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카미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자리를 떴다.
물론 완전히 떠난 건 아니었다.
혹시나 유혈사태가 발생한다면 언제든 끼어들 수 있을 만한 거리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그런다고 엘리제를 막지는 못할 테지만.
그렇게 카미유가 떠나고.
덜덜덜!
지원군 없이 홀로 남겨지게 된 오토는, 마치 호랑이 앞에 선 토끼처럼 벌벌 떨었다.
“약혼자.”
“예….”
“하렘에서 즐거운 시간 보냈나.”
“아, 아닙니다!”
오토가 극구 부인했다.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사실 압둘 2세가 <접대의 관습>에 따라 초대해 주지 않았다면, 하렘에 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절대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제발 믿어 주세요!”
오토는 카미유의 조언대로 싹싹 빌었다.
그렇다고 무릎까지 꿇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토가 뻔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 억울하다고! 억울해!’
오토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만 엘리제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빌었을 뿐.
스윽.
엘리제가 한 손을 슬쩍 들었다.
움찔!!!
오토는 주먹이 날아오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을 뿐 주먹을 휘두르려던 게 아니었다.
“약혼자.”
“예.”
“솔직히 말해라. 참기 힘든가.”
“예?”
“남자는 성욕을 참기가 힘들다고 들었다.”
“저,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토가 극구 부인했고, 그 역시 사실이었다.
왜?
이 세계에 온 이후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그런 생각은 단 1도 들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번엔 오토에게도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원하는 건가?”
“그것도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라면서 거긴 왜 간 건가? 나 하나로는 부족한가?”
“맹세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뭔가.”
“제 얘기를 딱 한 번만 들어주실 순 없을까요?”
“알겠다.”
엘리제는 다짜고짜 오토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고, 기회를 주었다.
‘최후의 변론이다.’
오토는 이게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았으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 * *
카미유는 먼발치에서 오토와 엘리제를 지켜보며 마음을 졸이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제 눈을 의심했다.
‘뭐지?’
오토와 엘리제가 갑자기 손을 꼭 맞잡더니 함께 걷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걸로 봐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아예 없어 보였다.
‘왜지?’
카미유는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최소한 두들겨 맞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오토가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수십여 명의 무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건 명백한 사실.
엄밀히 말하면 약혼녀가 있는 몸으로 하렘에 발을 들여놓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물론 오토의 말대로라면 하렘은 유흥시설이 아닌 휴양시설이었고, 카미유가 느끼기에도 그랬지만.
‘엘리제님의 자비심이 이 정도로 대단했다는 건가? 질투조차 안 할 정도로?’
카미유는 조금 전 엘리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할 말이 뭔가.’
‘전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전하께서 뭘 좋아하시는지, 평소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아 두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그런 거라면 좋다.’
‘전하께선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십니다. 특히 부지깽이로 군고구마를 구워 드시는 걸 즐기십니다.’
‘기억해 두겠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평소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수련에도 늘 진심이십니다.’
‘좋군.’
‘또한 전하께서는….’
카미유는 오토를 살리기 위해서 엘리제에게 오토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겼다.
그리고 엘리제 역시 카미유가 해 주는 이야기를 경청해서 듣는 눈치였다.
그 말은, 엘리제가 오토에게 꽤 관심이 많다는 증거였다.
그런데도 화 한번 내지 않다니, 지켜보는 카이유가 이상해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 일 없었으니 이번에는 그냥 주의를 주는 선에서 끝난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휴우.’
카미유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의 검에 오토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꼴을 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대만족인데, 저렇듯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니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냥 둬도 되겠군.’
카미유는 자초지종은 내일 듣기로 하고, 자신의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욱신욱신!
문득 가슴이 아팠다.
“…아직 못 잊었습니다만.”
카미유의 입에서 씁쓸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아마 앞으로도 못 잊을 것 같습니다.”
마치 후유증처럼, 엘리제와 나누었던 대화는 카미유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왜?
그녀는 이제 다른 남자의 아내였으니까.
더욱이, 카미유는 그녀가 결코 행복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불행할 테고, 카미유는 그런 그녀를 볼 자신이 있었다.
그게 비록 먼발치에서라 할지라도.
* * *
30분 전.
“껄껄껄! 뺀질이! 제대로 x됐구나! 껄껄껄!”
카이로스는 엘리제에게 끌려 나가는 오토를 조롱했다.
“부디 살아남길 바라마! 크핫핫핫핫핫! 사내놈이 약혼녀에게 꼼짝도 못하다니! 네놈도 공처가가 될 신세로다! 크핫핫핫핫!”
카이로스는 과거 꽃뱀에게 물려 인생을 말아먹었던 주제에, 오토를 한껏 조롱하며 고소해했다.
정작 본인도 술만 많이 마실 뿐이지, 방탕함과는 거리가 먼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음에도.
“크으! 술 맛 좋다! 크으으으!”
카이로스는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은지 계속해서 술을 퍼마셔 댔다.
취기를 날려 버리기가 싫어서, 마나를 이용해 알코올 기운을 배출해내지도 않았다.
“아르곤 이 빌어먹을 놈아! 짐은 네놈도 와 보지 못한 하렘에 왔다! 부러우냐? 크핫핫핫핫!”
그렇게 카이로스는 수십여 명의 무희들에게 둘러싸인 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흠.”
카이로스가 돌연 울적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귁! 귁귁귁!”
곁에서 장단을 맞추며 함께 술게임을 하면서 놀아 주던 카심이 카이로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은!”
카이로스가 당치도 않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짐은 오늘 기분이 아주 좋다! 무슨 일이 있겠느냐!”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짐의 표정이 뭐가 어때서! 시끄럽다! 마셔라! 마셔!”
…라고 했지만 사실 카이로스는 울적한 게 맞았다.
‘크흑. 잊히지가 않는구나. 이 독사 같은 년. 왜 자꾸 짐의 마음을 괴롭히느냐.’
다 털어냈다곤 하지만, 사실 카이로스는 베아트리체를 끝장낸 걸 아직도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평생에 걸쳐 사랑했던 여인이 사실은 꽃뱀이었으며, 또다시 부활해 악행을 저지르려 했을 줄이야.
그건 나름 순정파인 카이로스의 입장에선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매우 큰 심적 고통이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베아트리체를 완전히 곤죽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어찌 짐의 삶은 이리도 처량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아니! 아니지! 내 이럴 게 아니다! 더 신나게 놀아야겠다! 더 신나게!’
카이로스는 그런 생각으로 더욱 크게 웃고 떠들고 술을 더 많이 퍼마셔 대었다.
그러던 중.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
카이로스는 문득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다.
하렘 화장실은 매우 깨끗했으며, 새하얀 도자기로 만든 소변기가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또한, 여자 화장실이 없고 오직 남자 화장실만 있었다.
거의 인사불성인 카이로스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졸졸졸!
그렇게 서서 소변을 누던 중.
“음?”
카이로스는 기이한 광경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여긴 남자 화장실인데?”
조금 전까지 카이로스와 함께 술을 마시던 무희가 바로 옆 소변기에 대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그런데.
“으응?”
뭔가 이상했다.
‘무, 물건이 달려 있어?!’
힐끔 곁눈질을 해 본 결과 함께 술을 마시던 무희의 아랫도리에 흉측한 ‘무엇’이 달려 있었다.
뿌우우우!
무언가 거대하고.
덜렁덜렁!
무언가 덜렁거리는 그 ‘무엇’이.
쏴아아아!
심지어 오줌빨도 카이로스보다 강력했다.
‘짐이 방금 뭘 본 것이란 말인가? 짐이 그렇게나 취했단 말인가?’
카이로스는 순간 당황해서 체내의 술기운을 모조리 배출했다.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술부터 깨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화아악!
카이로스의 몸에서 알코올 성분이 마치 분무기처럼 훅! 뿜어져 나왔다.
“이 무슨…?”
술을 깨자 비로소 화장실 풍경이 자세히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장실 안에 무희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자기들끼리 무어라 떠들어 대고 있긴 했지만 무희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무희들은 모두 소변기를 이용했으며, 아랫도리에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들 키가 크고 손발도 크다. 그리고 가슴이 매우 작… 헉!’
그렇다는 말은…….
“이런 빌어먹을! 다 여장남자들이었구나!”
카이로스는 그제야 하렘의 ‘진실’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