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동굴 안은 <유령마적단>의 본거지이자 보물창고였다.
“네놈들은 누구냐!”
“두목!”
동굴 안쪽에 있던 마적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적질에 나섰던 두목과 동료들이 돌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을 줄이야.
“모두 처리한다.”
“예!”
카심과 마검사들은 동굴 안에 있던 마적들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들은 도적질뿐 아니라 살인·강간·방화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악인들.
자비를 베풀 필요도, 베풀어서도 안 되는 쓰레기들에 불과했다.
그렇게 안에 있던 마적들까지 모조리 처리한 카심과 마검사들의 앞에 한 무리의 여성들이 나타났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흑흑흑!”
그녀들은 마적들이 허드렛일을 시키고 성노리개로 쓰려고 납치해 온 여성들로서, 그간 가해졌던 끔찍한 학대와 폭력으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우리는 마적들을 소탕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카심은 그녀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섬뜩한 눈빛으로 두목을 노려보았다.
“네놈들이 사람인가.”
“…….”
“온갖 흉악범죄를 저지른 것으로도 모자라서 여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다니.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카심은 당장에라도 두목을 쳐 죽이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았다.
두목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었다.
동굴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주문이 필요해서, 당분간은 살려 두는 게 불가피했던 것이다.
“여기 보물이 쌓여 있습니다!”
<유령마적단>의 본거지이자 보물창고인 동굴 안에는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난 200년 동안 마적들이 이룩한 부[富]가 동굴 안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카심은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보물은 어차피 천천히 챙겨 가면 그만.
‘반지를 찾아야 한다.’
대신 오토의 명령대로 푸른색 반지부터 찾았다.
안쪽에 <עבדא כדברא>라는 고대 문자가 새겨진 반지를….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 속에서 자그마한 반지 하나를 찾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찾아내고야 만다.’
그러나 오토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카심의 집념은 엄청났다.
카심은 밤을 꼴딱 새워 금은보화 속을 뒤진 끝에 기어코 반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살라딘의 두 개의 성물 중 하나인 <마신의 요람>을.
‘전하! 기뻐하십시오! 이 카심!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카심은 오토를 떠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전하께서 칭찬해 주시겠지? 빨리 전하를 뵙고 싶다.’
임무를 완수한 카심은 오토에게 칭찬이 받고 싶어 아주 안달이 나 있었다.
카심에게 있어 오토는 그런 존재였다.
이 세상에서 카심을 가장 행복하게 해 주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오토의 칭찬뿐이었으니까.
* * *
카심과 마검사들은 <마신의 요람>을 찾아낸 뒤에야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했다.
그날 밤.
카심은 다시 알살람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동굴 밖으로 나가 보면 죽은 마적들의 시체 옆에 말안장이 하나씩 놓여 있을 것이다.”
카심이 명령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그 말안장들이 유령마를 소환해 주는 아티펙트라고 하셨다.”
그러자 마검사들이 일제히 오토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오오오!”
“역시 전하께선 지혜로우시다!”
“어쩜 그리 모든 걸 꿰뚫어보시는지!”
카심이 열심히 영업(?)을 해 준 덕분에, 오토에 대한 마검사들의 존경심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물론 카심이 아니더라도 마검사들은 오토를 존경하고, 목숨조차 아낌없이 바쳤을 테지만.
“우선 금은보화는 여기 두고, 납치되어 있던 불쌍한 여인들부터 탈출시킨다.”
카심은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보다 여인들을 먼저 챙겼다.
‘전하께서도 사람들을 먼저 구하셨을 테지.’
어차피 금은보화들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유령마들을 타고, 불쌍한 여인들은 우리가 타고 온 말에 태운다. 말에 소음 감소 주문과 진동 감소 주문을 건다면, 다 같이 한꺼번에 안전한 장소까지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
“예! 대장!”
그로부터 1시간 뒤.
“히이이잉!”
“히이이이이잉!”
유령마에 탄 카심과 마검사들이 여인들을 태운 말들을 이끌고 <죽음의 사막>을 질주했다.
* * *
오토는 오버하우저 상단 사람들을 매우 좋은 가격에 팔아치우는 데 성공했다.
“허허. 내 이 짓만 벌써 30년째인데. 그대는 도저히 못 당하겠소. 아주 지독한 흥정 능력을 가지고 계시구려. 쩝.”
노예상인이 혀를 내두르며 오토를 칭찬했다.
장장 1시간 동안 이어진 흥정 끝에 오토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 뭐. 별말씀을.”
“값은 지금 바로 치르겠소.”
거래가 끝나고.
“개새끼!”
“언젠가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우리 상단이 네놈을 용서할 것 같으냐! 이 씨발놈아!”
“무사할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오버하우저 상단의 인물들은 노예상인에게 끌려가기 직전 오토에게 오만 악다구니와 욕설을 퍼부어대었다.
“응. 실컷 짖어 대. 난 니들 팔아서 용돈 벌었으니까.”
오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뭐가?”
“저들의 입에서 흘러나간 말이 아르곤 대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잖습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예?”
“장담하는데 쟤네 24시간 내로 백치가 될 테니까.”
“백치 말입니까?”
“구울로 만들거든.”
“……!”
“엄밀히 말하자면 진짜 구울은 아니고. 죽이진 않거든. 근데 구울이랑 별반 차이도 없어.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지능도 크게 떨어지니까. 진짜 가축이 되는 거야.”
“맙소사.”
“근데 쟤네는 그래도 싸지.”
오토가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쟤네가 노동자들을 데려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면, 이 정도 벌은 받아야 되지 않겠어?”
“그건 맞습니다.”
“일단 여관으로 복귀해서 좀 쉬자.”
“예, 전하.”
사하라 왕국의 술탄 <셰에라자드>는 매우 아름다운 미녀로서, 한때는 성군이었던 군주였다.
그러던 셰에라자드가 타락한 원인은, 다름 아닌 남편 때문이었다.
엄청난 바람둥이였던 남편은, 셰에라자드가 자신과 결코 헤어지지 못한다는 걸 이용해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남편의 예상대로, 남편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셰에라자드는, 그를 몇 번이고 용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셰에라자드는 남편과 자신의 시녀가 나체로 뒤엉켜 있는 걸 목격한 것을 계기로, 완전히 미쳐 버리고 말았다.
그날.
셰에라자드는 남편과 뒤엉켜 있던 시녀를 수도 한복판에서 해체해 버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는 남편을 죽이고 구울로 만들어 버렸다.
“네놈은 영원히 고통 받으리라.”
그렇게 선언한 셰에라자드는, 구울이 된 남편의 목에 쇠사슬을 매달아 마치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셰에라자드는 밤마다 잘생긴 남자들을 침실로 불러 동침한 뒤 다음 날이면 끔찍하게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살해당한 남자들은 남편처럼 구울이 되었으며, 셰에라자드를 지키는 친위병력이 되었다.
지금도 셰에라자드는 노예상인들에게 잘생긴 남자 노예들을 공급받아 온갖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라는 게 사하라 왕국의 술탄 셰에라자드에 대한 정보.
“그러니까.”
셰에라자드에 대해 전해들은 카미유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런 악마에게 제 발로 찾아가시겠단 겁니까?”
“찾는 물건이 그 여자 보물창고에 있어서.”
“너무 위험합니다.”
“나름 구슬릴 방법이 떠올라서 그래.”
“구슬릴 방법? 설마 잘생기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에이. 그건 아니고.”
오토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셰에라자드도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딱 거기까지야. 잘생겼다고 살려 주진 않을걸.”
“그럼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일곱 밤만 버티면 돼. 자세한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늘 밤부터 여기서 대기해.”
오토가 지도로 사하라 왕국의 수도 외곽을 짚었다.
“여기 비밀통로가 있거든? 여기로 탈출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가자.”
“예?”
“셰에라자드한테.”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거였습니까?”
“그럼. 공개적으로 청혼할 거거든.”
“……?”
“만나는 건 쉬워. 헤어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미유와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특이하게도, 왕궁 입구에 커다란 뿔피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서, 설마.”
“저 미친놈이?”
왕궁 앞을 지키던 기사들은 오토가 겁도 없어 뿔피리를 집어 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오밤중에 뿔피리를 분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뿌우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우르르르르!
왕궁에서 기사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나 오토 일행을 둘러쌌다.
“지금 뭐 하신 겁니까?”
“뭐 하긴. 청혼했지.”
“예?”
“청혼했다고.”
카미유는 몰랐지만, 사하라 왕국에서는 누구든 술탄인 셰에라자드에게 청혼하는 게 가능했다.
신분과 나이에 관계없이, 남자라면 누구나 왕궁 앞에서 뿔피리를 부는 것으로 셰에라자드를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 * *
약 1시간 뒤.
“술탄께서 행차하신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술탄 셰에라자드가 근위기사단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셰에라자드는 하늘하늘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외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드러난 눈은 매우 크고 진해서, 전형적인 칼리프인의 외형적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눈매만 봐도 그녀가 대단한 미녀라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게 청혼하려는 자가 누구냐.”
셰에라자드가 오토 일행을 훑어보았다.
“예, 술탄이시여.”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은 오토가 셰에라자드를 향해 장미 한 송이를 바쳤다.
“저는 외국에서 온 상인으로, 술탄께 청혼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부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물론 너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셰에라자드가 냉혹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네가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면, 감히 내게 청혼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격>이란 외모요.
<혹독한 대가>란 바로 죽음이었다.
누구나 뿔피리를 불어 셰에라자드를 불러낼 수 있다.
그러나 셰에라자드의 미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왕궁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하고 참수형에 처해진다.
어지간한 미남이 아니고서는 셰에라자드의 먹잇감(?)이 되는 영광(?)을 누릴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물론 왕궁 문턱을 넘은 뒤에도 하룻밤 이상 살아남은 자가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명도 없기도 했고.
예선(?)을 통과해 봤자 고작 몇 시간에서 하루 정도를 더 살 뿐이었다.
어쩌면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왜?
통과하지 못하면 그냥 죽겠지만, 통과한다면 구울이 될 테니까.
하지만 오토는 물러서지 않았다.
‘공략법을 아니까.’
변수가 발생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맥없이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도 했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좋다.”
셰에라자드가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듯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살기가 등등한 것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목을 뎅겅! 날려 버릴 기세였다.
“이미 날 불러낸 이상 네게 물러설 곳은 없다. 그러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물론입니다.”
“고개를 들라.”
셰에라자드가 오토를 향해 명령했다.
“예, 술탄이시ㅇ….”
“합격.”
“예…?”
“합격이라 말했다.”
0.1초.
오토가 합격도장(?)을 받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