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겨우 탈출에 성공한 오토 일행.
그러나 사하라 왕국을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3시간쯤 비행했을 무렵.
“어어? 어어어어?”
고도가 점점 떨어지더니, 양탄자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연료가 다된 거 같은데?”
“예?”
“얘 충전식이거든.”
오토가 양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행융단>이라 이름 붙은 이 양탄자는,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평소 마정석, 혹은 사용자의 마나를 주입해둬야 사용 가능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토, 카미유, 카이로스, 영혼기사들, 그리고 마검사들까지.
양탄자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거의 50명에 가까운 인원이 탑승한지라 일종의 과적(?)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양탄자 학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연료부족으로 비행능력을 상실하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위기는 넘겼으니까.”
오토는 착륙 후에도 별반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만하면 만족이었다.
셰에라자드와 구울들로부터 도망친 것만 해도 남는 장사라서, 더는 비행하지 못한다 해도 큰 아쉬움은 없었다.
돌돌돌.
오토는 비행융단을 둘둘 말아 아공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양탄자를 충전한 뒤 다시 날아가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양탄자는 충전하는 데 드는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잡아먹는 마나의 양도 엄청났다.
아직 국경도 넘지 못했는데 한가하게 양탄자를 충전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지금 양탄자에 마나를 쏟아 부었다가 공격이라도 받으면, 자칫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붙잡힐 가능성이 컸다.
다시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더라도 일단 국경부터 넘은 뒤에 생각해볼 문제였던 것이다.
“지금부터 걸어서 이동한다. 빨리 가야 돼. 칼리프 왕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오토의 마음은 급했다.
“안 쉬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미유가 걱정스레 물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 단순 피로야. 그냥 잠 못 자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우선 국경부터 넘자. 가깝잖아. 쉬는 건 국경 넘어서 쉬어도 돼.”
솔직히 오토도 눈을 좀 붙이고 싶었다.
지난 1주일 동안 셰에라자드를 상대로 밤새 썰을 풀고,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나 뒷이야기를 구상하느라 수면 부족이 심각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도저히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살라딘과 압둘 2세의 갈등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어. 셰에라자드의 반응도 본래 시나리오와는 달랐다. 이미 변수는 발생했어. 어쩌면…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살라딘이 죽을 수도 있다.’
오토가 예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살라딘이 압둘 2세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것.
그럼 살라딘도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게 되고, 칼리프 왕국의 정세가 크게 바뀌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을 터.
“가자. 지금은 시간이 없어.”
오토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오토 일행은 비행을 통한 하늘길이 아닌 육로를 이용해 칼리프 왕국으로 향했다.
* * *
오토의 예상대로, 살라딘과 압둘 2세의 갈등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압둘 2세는 피투성이가 된 살라딘을 정말로 커다란 새장 안에 가둬두고, 그대로 방치해 버렸다.
그리고는 하루에 꿀물 한 그릇만을 허락했다.
그렇게 살라딘은 좁은 새장 안에 갇혀 꿀물 한 그릇으로 무려 열흘을 버텨야 했다.
낮에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고통 받고.
밤에는 서늘한 밤바람에 벌벌 떨면서.
“아바마마, 아바마마.”
왕세손 마수드는 새장에 갇힌 아버지 살라딘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정신을 차려 보시옵소서! 아바마마! 아바마마아아아!”
“…내 아들아.”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살라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비는… 걱정하지 마라.”
“아바마마아아!”
“아난께 기도하여라. 아들아. 할바마마께서 부디 전쟁을 멈출 수 있도록… 이 아비는 괜찮다.”
살라딘은 등에 난 상처가 곪아 피고름이 흘러나오고, 시커먼 파리 떼들이 들끓고, 허연 구더기 떼가 상처를 뜯어먹고 있었음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아바마마! 할바마마께 잘못했다고 비셔야 하옵니다! 아바마마! 할바마마의 말씀을 따르셔야 하옵니다! 아바마마! 소자는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길 원하지 않사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라딘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아니 될 말이다. 오직 평화와 자비로서….”
거기까지.
툭.
힘이 다한 살라딘이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궜다.
그만 탈진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할바마마! 부디 아바마마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할바마마!”
마수드는 그 길로 압둘 2세에게 달려가 엎드려 빌었다.
“네 이놈! 감히 네 녀석까지 이 할아비를 거역하려는 것이냐!”
“하, 할바마마!”
“내 아무리 네 녀석을 어여삐 여긴다 한들! 네 아비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나는 네 녀석 역시 반역죄로 벌할 것이다! 썩 물러가라! 그러지 않으면 크게 경을 칠 것이다! 뭣들 하느냐! 왕세손을 끌고 가라!”
마수드의 애원에도 압둘 2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들아. 너는 절대 할바마마의 명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왕세자비 젤나르는 마수드를 붙잡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너는 왕세손이다. 너까지 할바마마의 눈 밖에 나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하지만….”
“너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이 어미와 아버지가 죽더라도, 너만은 살아남아 술탄이 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란다. 명심해야 한다. 절대 할바마마의 눈 밖에 나선 안 된다. 오직 복종만이 네가 살길이란다.”
젤나르는 마수드에게 그렇게 당부한 뒤 압둘 2세를 찾아가 빌었다.
“뭣이? 이런 집안 말아먹을 년 같으니! 내 아들놈이 저리 유약해진 것 또한 다 네년 때문이라는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오냐! 내 이참에 네년도 함께 반역죄로 다스려주마!”
“수, 술탄이시여!”
“변변찮은 가문 출신임에도 왕세자비의 자리를 꿰찼으면 안주인 노릇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터인데! 뭣들 하는가! 이년을 당장 높은 탑 위에 가두어라!”
그렇게 젤나르는, 남편 살라딘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비록 채찍에 유린당하는 형벌만은 면했지만, 어쨌거나 말라 죽는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 *
며칠이 더 지났다.
척! 척! 척! 척!
병사들이 살라딘이 갇힌 새장 주변에 마른 장작을 쌓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아이만은! 아이만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뒤이어 살라딘이 갇힌 새장 앞으로 꽁꽁 묶인 누리스탄족, 하나피족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끌려왔다.
“놈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라.”
“예, 술탄이시여.”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압둘 2세가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아바마마.”
치유 마법을 받고 겨우 정신을 차린 살라딘이 압둘 2세를 바라보았다.
“네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압둘 2세가 싸늘한 목소리로 새장 안에 갇힌 살라딘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받아라.”
“어찌 검을… 하사하시옵니까?”
“이 검으로 저 사악한 누리스탄 족과 하나피 족들을 참수한다면, 과인은 네놈이 저지른 반역을 용서해 줄 것이다.”
“……!”
“또한, 다시 왕세자로 책봉해 줄 것이다. 네 아내도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명을 거역한다면….”
압둘 2세가 슬쩍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화르르르르르르!
그러자 병사들이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횃불을 들고 새장 주위로 몰려들었다.
“뜨거운 불길로 네놈을 태워 죽일 것이다.”
“아, 아바마마!”
“마지막 기회이니라. 이 검으로 저 누리스탄 족들과 하나피 족들을 참수하라. 그리고 몸을 회복하면, 이 아비를 대신해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약조하라.”
압둘 2세가 살라딘을 압박했다.
사실상의 최후통첩.
이쯤 되면 압둘 2세조차도 물러서는 게 불가능했다.
수도 알살람의 신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살라딘을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해준다면, 압둘 2세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터.
그럼 술탄으로서의 권위가 크게 훼손될 테고, 전쟁의 명분도 잃게 된다.
압둘 2세가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 없는 지경까지 오고야 만 것이다.
“저 사악한 악마들을 참수함으로써 과인에 대한 충성을 보여라. 우리 왕조의 왕세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란 말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뭣이?!”
“죄 없는 여인들과 아이들의 목을 잘라서 증명해야 할 충성이라면… 차라리 충성하지 않겠나이다.”
“……!”
“아난께서 말씀하시길, 약자를 향한 폭력은 그 자체로 죄악이라 하였사옵니다. 그렇게 해서 증명하는 충성은 충성이 아닌 악일 뿐이옵니다. 소자는 아버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사옵니다.”
“이… 이이이…!!!”
압둘 2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들 살라딘이 마지막으로 준 기회마저 제 발로 걷어차고, 심지어 신을 들먹이며 충성하지 않겠다고 하니 분노하다 못해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냐!”
압둘 2세가 버럭 소리쳤다.
“아주 잘 알겠다! 네놈은 진정 반역자로구나! 저 악마 같은 누리스탄 족들과 하나피 족들을 참수할 수 없다니! 네놈도 똑같은 반역자가 아니라면 어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느냐! 여봐라!”
“예! 술탄이시여!”
“붙을 붙여라!”
쿠웅!
기어코 압둘 2세의 입에서 내리지 말아야 할 명령이 흘러나왔다.
“놈을 불태워라! 놈은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사악한 악마이자 반역자일 뿐이다! 감히 신을 운운하며 누리스탄 족들과 하나피 족을 감싸고돌다니! 내 술탄으로서 놈을 불태워 없앨 것이다!”
하지만 횃불은 병사들은 주춤주춤 섣불리 불을 불이지 못했다.
아무리 압둘 2세의 명령이라 한들, 한때는 왕세자였던 살라딘을 불태운다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뭣들 하느냐! 어서 불을 붙이지 않고! 주저하는 놈들도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압둘 2세가 불호령을 내리고.
“용서하소서.”
“왕세자 저하… 부디 저희를 탓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병사들이 새장에 갇힌 살라딘의 곁으로 다가가 쌓인 장작에 불을 붙이려던 그때.
슈우우우우우우우우!
비행융단을 탄 오토 일행이 나타나 현장을 덮쳤다.
“카미유, 카이로스. 시간을 벌어 줘.”
비행융단에서 뛰어내린 오토가 살라딘을 향해 내달렸다.
“이, 이 무슨! 뭣들 하는가! 저놈들을 잡아라!”
압둘 2세가 버럭 소리치고.
“감히!”
“어찌 본국의 형 집행을 방해하는가!”
“무엄하도다!”
칼리프 왕국의 기사들이 오토 일행을 향해 덤벼들었다.
챙! 채앵!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왕세자님.”
오토가 살라딘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으, 은인이시여.”
살라딘은 갑작스레 나타난 오토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하니 외국인인 오토가 형 집행까지 방해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살라딘이 오토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어찌 저를 구하려 하십니까. 은인께선 목숨을 소중히 여기셔야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살라딘이 오토를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라딘은 자신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행융단이 있다 한들 결국엔 붙잡힐 터.
그럼 살라딘뿐만 아니라 오토 일행까지 반역죄로 처형당할 게 뻔했던 것이다.
오토도 그걸 알았다.
“구해 드릴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오토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었다.
살라딘이 처한 처지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기에.
“그런데 어찌 목숨을 이리 허투루 내던지십니까? 은인께서는 현명하신 분입니다. 저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
“받으십시오.”
오토가 새장 틈 사이로 살라딘에게 <계시록>을 건네주었다.
“아난의 말씀이 적힌 경전입니다. 품고 계십시오.”
“경전을 주시려고 죽음을 자처하신 겁니까?”
“제가 왕세자 전하께 드리는 마지막 호의입니다. 짧게나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 순간.
“감히!”
“이런 불경한!”
칼리프 왕국의 기사들 여러 명이 오토를 끌어내었다.
“이런 무능한 놈들! 형 집행도 제대로 못해서 외국인 놈들의 난입까지 허락해? 내 직접 형을 집행하겠다! 직접!”
분노로 인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압둘 2세가 횃불을 내던졌다.
화아아아아아악!
기름을 잔뜩 머금고 있던 마른 장작들로부터 시뻘건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화염이 살라딘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