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
타오르는 화염 속.
“신이시여.”
살라딘은 담담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렸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와 닿았지만, 살라딘의 표정은 편안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난이시여. 지금 미천한 종이 그대의 곁으로 가옵나이다.”
살라딘은 기도문을 읊으며 오토가 건네주었던 경전을 펼쳤다.
그러나….
“은인께서 어찌 이런 경전을 주셨는가.”
살라딘은 경전의 내용이 텅 비어 있는 걸 보고 당황했다.
분명히 아난의 말씀이 적힌 경전이라 했는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양피지로 이루어진 백지였을 뿐.
‘은인께서 분명 뜻이 있으셨을 터.’
살라딘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
뜨거운 불길이 머리칼을 태우고, 옷자락을 태웠다.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살라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에 휩싸였다.
화형.
산 채로 불태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형벌이었다.
하지만 살라딘은 동요하지 않았다.
“가장 자비로운 아난의 이름으로. 모든 찬양과 감사를 아난께 바치나니.”
“다음과 같이 기도하나니, 부디 어리석은 저희들을 지혜로써 이끌어주소서.”
“평화와 화합의 말씀으로 굽어살피시고.”
“이 땅에 더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바라옵건대, 가장 자비롭고 인자하신 아버지시여. 제 아비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 주시옵소서.”
시뻘건 불길 속.
산 채로 불타는 와중에도 살라딘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은 편안했다.
‘부디 나의 죽음이 아바마마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기를. 아바마마. 이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성군이 되시옵소서. 자비와 용서로서 불충한 자들을 보듬어 주시옵소서.’
온몸이 불타서 살이 녹아내리고, 뼈가 훤히 드러나기 시작했음에도 살라딘은 그 어떤 고통과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랬기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경전을 펼쳐놓고, 가부좌를 튼 채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살라딘은 그 기도를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어느새 육신은 새카맣게 탄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 * *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여긴.”
살라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놀라워했다.
살라딘은 천상[天上]의 사원 안에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천년만년 아난을 향해 기도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를 찾았는가, 믿는 이여.
찬란한 자가 나타나 살라딘을 향해 말했다.
“그, 그대는.”
- 나는 그대의 믿음에 응답하는 존재이니라.
“아난! 아난이십니까!”
- 나는 아난이 아니나, 그의 의지를 전달하는 존재이니라.
“아!”
살라딘은 눈앞에 나타난 찬란한 자가 신의 대리인인 천사라고 생각했다.
- 그대의 간절함이, 깊은 믿음이 나를 불러내었다.
“아아! 성스러운 대리인이시여!”
살라딘이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신 아난의 말씀을 받듭니다!”
- 나는 신의 대리인이 아니다. 다만, 그의 의지를 전달하는 존재일 뿐이니라. 경전을 보아라. 믿는 자여.
“이, 이것은.”
살라딘은 오토가 건네주었던 경전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경전에 아난의 모든 의지가 깃들어 있나니. 너는 그 경전을 보고 공부하라.
“예, 알겠사옵니다.”
- 너는 3,650,000일 동안 경전을 보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영겁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배우겠나이다.”
살라딘은 경전을 펼쳐서, 그 안에 담긴 아난의 의지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텅 비어 있던 경전은, 어느새 아난의 말씀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경전을 넘기고 넘겨도 말씀은 끝이 없었다.
경전 안에 아난의 의지가 가득했다.
글로는 기록할 수 없는 신의 의지가, 경전 안에 있었다.
살라딘은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채 경전을 탐독했다.
- 3,650,000일이 지났노라.
찬란한 자가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살라딘을 일깨웠다.
- 너는 신의 의지를 다 공부했느냐?
“예, 저는 신의 의지를 다 공부했습니다.”
- 그럼 가서 그 의지를 전하라. 위대한 힘이 너를 그 땅에 머무르게 하리라.
스으으으!
그와 함께 살라딘의 육체가 황금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어?”
오토는 자신이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분명 칼리프 왕국군에게 끌려 나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어째서 자신이 이 기이한 공간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긴 어디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눈앞에 수없이 많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전 우주를 관찰하는, 일종의 관제탑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그때.
‘살라딘 왕자?’
저 멀리 살라딘의 모습이 보였다.
살라딘은 천상의 사원에서 경전을 보고 공부하고 있었다.
‘잠깐. 여기는.’
오토는 문득 깨달았다.
‘여긴. 텅 비어 있지만 또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 이 안에 모든 우주와 모든 차원의 과거, 현재, 미래가 기록되어 있다. 이 안에서, 나는 모든 걸 볼 수 있다.’
비로소 오토는 깨달았다.
이곳이 허공법계[虛空法界]라 부르는, 우주적 공간임을.
‘내가 계시록을 살라딘에게 건네주고. 계시록의 힘이 살라딘을 아난의 의지 안으로 이끌었다.’
오토는 살라딘이 왜 천상의 사원에 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아난은 신이 아니다. 수천 년 전. 칼리프 왕국이 세워진 땅에서 여러 민족을 이끌던 고대의 지도자였어.’
‘아난은 살아생전 지혜로운 선지자로 추앙받다가, 사후에 신으로 떠받들어졌다.’
‘살라딘은 계시록을 통해 이 허공법계 안에 기록된 아난의 의지에 접속한 거야.’
그렇다는 말은…….
‘그럼 나는? 나는 어떻지? 나는 왜 이 세계로 오게 된 건가? 앞으로 펼쳐질 내 미래는 뭐지? 알아보자.’
어째서 이곳 <허공법계>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토는 내친 김에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허억!”
순간 오토는 <허공법계>에서 튕겨져 나와 현실로 되돌아왔다.
이곳 <허공법계>가.
우주의 법칙이 오토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엿보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 * *
현실로 돌아오니 여전히 칼리프 왕국군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잠시나마 우주의 비밀과 마주했기 때문일까?
“헉, 허억, 헉.”
오토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했다.
덜덜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주르륵!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영혼이 잠시 <허공법계>에 다녀온 것만으로도 육체적으로 엄청난 데미지가 전해졌던 것이다.
“뺀질아.”
오토의 옆에 꿇어앉혀 있던 카이로스가 그런 오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 설마 그곳에 다녀온 것이냐.”
“그곳? 헉, 허억.”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않았느냐?”
“카이로스 네가 그걸 어떻게….”
“과거 심안을 수련하다가 잠시 그곳에 간 적이 있느니라.”
“아?”
“그곳에 있는 정보는 인간이 결코 엿봐서는 안 될 것들이다. 그곳은 모든 우주와 모든 차원의 과거 현재 미래가 기록되어 있는 곳이나, 제대로 들여다본 순간 생명체로서의 운명을 박탈당하게 되는 곳이다.”
카이로스의 표정은 더 없이 진지했다.
“도대체 어찌 그곳을 엿본 것이냐?”
“나야 모르지.”
오토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 경전 때문일지도.”
바로 그때.
번쩍!
눈부신 섬광이 빗발치며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빛의 기둥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으으으으으!
타오르던 장막더미에서 가부좌를 튼 살라딘이 황금색 서광[瑞光]에 휩싸인 채 두둥실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 오토가 건네주었던 <계시록>과 함께.
- 아난의 백성들아.
살라딘의 목소리가 수도 알살람에 울려 퍼졌다.
- 지금부터 아난의 말씀을 전하노니, 너희들은 깊이 새겨듣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륵, 스르륵.
<계시록>이 저절로 펼쳐지더니, 제일 첫 장에 살라딘의 말이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그게 살라딘 시나리오의 결말이었다.
전쟁을 반대하며 스스로를 희생한 살라딘이 신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이 성물인 <계시록>에 저절로 새겨지면서 부족 대통합을 이루게 되는 것 말이다.
“아아!”
“왕세자 전하께서 아난의 대리인이시다!”
“예! 저희가 듣겠나이다!”
“아난이시여!”
“위대하신 아난이시여!”
기적이 일어나자 수도 알살람의 신민들이 일제히 엎드려 살라딘을 향해 기도했다.
그건 술탄인 압둘 2세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 맙소사! 아난이시여! 제 아들의 몸을 빌려 말씀하시나이까!”
압둘 2세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공포에 벌벌 떨었다.
자신의 손으로 불태워 죽인 아들이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인[聖人]이 되어 부활했으니, 압둘 2세가 두려워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너희 백성들아. 나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서로 반목하지 아니할 것이며, 싸우지 않을 것이니라.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고, 서로 항복하여라. 그리 하면 피를 흘릴 일이 없을 것이니라.
- 서로 용서하라. 미움을 씻어내라. 증오를 품은 삶이야말로 현생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니.
살라딘은 끊임없이 아난의 말씀을 설법[說法]하며 계시록을 채워나갔다.
“예! 아난이시여! 전쟁을 멈추겠사옵니다! 다른 부족들을 자비와 용서로서 대하겠사옵니다! 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압둘 2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다.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 통일왕조를 이룩하려던 야망의 화신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 앞에 그저 한 없이 나약한, 노년의 늙은이만 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하나는 확실해졌다.
압둘 2세는 더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테고, 복종하지 않는 부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 역시 벌이지 않을 터였다.
앞으로는 살라딘의 의지에 따라 포용과 자비로서 다른 부족들을 대하게 되리라.
스윽.
한편, 오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구도 오토를 붙들지 않았다.
오토 일행을 제압했던 칼리프 왕국의 기사들 역시 살라딘을 향해 납작 엎드린 채 아난의 말씀을 듣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살라딘 왕세자.’
오토는 솔직히 살라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라딘은 왕국의 내전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성인.
반대로, 오토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
오토와 살라딘은 서로 너무나도 다른,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살라딘을 존경했다.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그 숭고하고 고결한, 성인[聖人]으로서의 모습을.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존경합니다. 나는 당신처럼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당신의 고결한 희생은 끝내 결실을 볼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 마수드가 성군이 되어 당신의 의지를 이어나갈 것이기에.’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시록을 써내려나가는 살라딘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존경을 표시했다.
그 순간.
[알림: <살라딘>이 승천하였습니다!]
[알림: <살라딘>의 시나리오가 삭제되었습니다!]
그렇게 100인의 군주 중 하나인 살라딘은, 성인이 되어 시나리오에서 퇴장했다.
그리고….
[알림: <마수드>에게 <살라딘>의 의지가 계승되었습니다!]
[알림: <마수드>가 새로운 주인공 캐릭터가 되어 100인의 군주에 합류했습니다!]
새로운 군주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