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175화 (176/401)

175화

살라딘은 12시간 동안 아난의 말씀을 전하며, 이 세계에 머물렀다.

설법은 그간 신학자들마다 해석이 갈리던 부분들을 명확하고 명쾌하게 풀이한 것이라,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허공법계>라는 우주적 공간 안에서 무려 3,650,000일 동안 아난의 말씀을 공부한 살라딘의 설법은, 그만큼 완벽했던 것이다.

그런 살라딘의 설법이 적힌 <계시록>은, 이제 새로운 경전으로서 칼리프인들의 신앙생활의 등불이 되리라.

“…하여 아난의 말씀은 평화에 뜻을 두고 있다는 것을 너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설법이 끝났다.

<계시록>의 작성도 끝이 났다.

“그대는 그간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며, 어진 통치를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살라딘이 압둘 2세에게 당부했다.

“여부가 있겠나이까. 아난의 말씀에 따를 것이옵나이다.”

압둘 2세가 고개를 조아렸다.

“마수드. 내 아들아.”

살라딘이 왕세손 마수드를 불렀다.

“아, 아바마마!”

“너는 나의 아들이자 술탄의 손자로서 훗날 아난의 설법을 실천하는 성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래, 그럼 되었느니라.”

살라딘이 미소를 지었다.

스으으으!

그와 동시에 황금색으로 물들었던 살라딘의 육신이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는 정보는 인간이 결코 엿봐서는 안 될 것들이다. 그곳은 모든 우주와 모든 차원의 과거 현재 미래가 기록되어 있는 곳이나, 제대로 들여다본 순간 생명체로서의 운명을 박탈당하게 되는 곳이다.’

오토는 살라딘이 이 세계를 떠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은인이시여.”

살라딘이 마지막으로 오토에게 말했다.

“그대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신의 경전을 전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모든 칼리프인들이 은인께 감사할 것입니다.”

“…왕세자님.”

“그대에게 축복을. 그대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살라딘은 그 말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실제로,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저 불에 그슬린 새장과 숯덩이가 된 장작들.

그리고 새로운 경전인 <계시록>만 남았을 뿐….

승천[昇天].

그렇게 살라딘은 신의 말씀을 새로운 경전에 새기고, 이 세계를 떠났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의 기둥만이 성인[聖人]이 이 세계에 잠시 머물다 갔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 * *

살라딘이 승천한 직후.

“대천사시여!”

“성(聖) 지브라일 대천사이여!”

“대천사의 현신을 뵈옵니다!”

알살람의 모든 신민들이 일제히 오토를 향해 넙죽 엎드려 절했다.

그들은 오토를 <성 지브라일 대천사>라 부르며 경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약 1,500년 전에 쓰인 옛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예언이 적혀 있었다.

먼 훗날 인간의 몸으로 현신하신 성 지브라일 대천사께서 신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들고 이 땅을 방문하실 것이니.

성 지브라일 대천사께 경전을 건네받은 자가 성인이 되어 아난의 말씀을 널리 전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하필 그 예언의 주인공인 대천사 지브라일의 행보가 지금의 오토와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가, 갑자기 왜들 이래?’

오토는 당황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아난의 경전까지 읽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라딘을 주력 캐릭터로 플레이해 본 적도 없었고.

그때.

“성 지브라일 대천사의 현신이시여!”

압둘 2세가 오토의 앞에 엎드려 소리쳤다.

“이 어리석은 인간이 대천사를 몰라뵙고 큰 죄를 지었사옵니다!”

“…….”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토는 압둘 2세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뭐가 어쩌고 저째?

야망에 미쳐서 자기 아들까지 불태워 죽인 주제에.

“죽을죄를 지은 건 알긴 아나 보네.”

오토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성 지브라일 대천사시여! 잘못했사옵니다! 저는… 컥!”

오토의 발길질이 압둘 2세의 가슴팍을 찍었다.

털썩!

나가떨어진 압둘 2세.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커헉!”

“니 손으로 아들을 불태워 죽이니까 속이 좀 시원해?”

“끄아아아악!”

“넌 좀 처맞아야 돼.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지, 지브라일 대천사시여! 크아악! 부, 부디 용서를! 으아아아아아악!”

“닥치고 쳐 맞아.”

오토는 아예 부지깽이를 꺼내 압둘 2세를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들겨 팼다.

실제로, 압둘 2세에 대한 오토의 분노는 엄청났다.

술탄이 되어 가지고 살라딘과 같은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불태워 죽인 그 비정함에 아주 진절머리가 났던 것이다.

게다가 오토는 살라딘을 깊이 존경하고, 또한 안타까워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살라딘을 살려 보려 했을 텐데….

살라딘을 살리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까지 더해지니, 압둘 2세에 대한 분노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사옵니다! 잘못했사옵니다! 크아아아악!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 크아아아아악!”

압둘 2세는 알살람의 신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야말로 참혹한 구타를 당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오토를 말리지 못했다.

이미 오토는 알살람 신민들에게 성 지브라일 대천사로 받아들여진 상황이었고, 압둘 2세는 신의 뜻을 거역한 무능하고 어리석은 술탄에 불과했다.

감히 성 지브라일 대천사가 무능하고 어리석은 술탄 압둘 2세를 징벌하는 걸 말릴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참아라! 뺀질아! 그만해라!”

“전하, 참으십시오.”

결국, 압둘 2세에 대한 오토의 화풀이는 카이로스와 카미유가 뜯어말리고 나서야 끝났다.

“끄억. 끄어어어억.”

실신해 버린 압둘 2세.

퍼억!

오토는 그런 압둘 2세의 엉덩이를 뻥! 하고 걷어차며 겨우 분노를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제풀에 지쳐서 뒈질 테니까.’

압둘 2세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병석에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2년 후에 서거할 예정이었다.

술탄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한 것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성인이었던 아들을 불태워 죽였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직접 죽이면 살라딘 왕세자 볼 면목도 없지.’

게다가 승천한 살라딘의 얼굴을 봐서라도, 오토는 압둘 2세를 죽이지 못했다.

‘그래. 2년 동안은 살아 있어 줘야지. 그래야….’

오토의 시선이 살라딘의 아들 마수드에게 머물렀다.

‘권력을 제대로 이양하지. 새로운 군주에게.’

아직 압둘 2세의 역할은 끝난 게 아니었다.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왕세손인 마수드에게 권력을 차근차근 넘겨주어야 했다.

지금은 마수드가 너무 어려서, 당장 술탄이 된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마수드.”

오토가 마수드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마수드는 오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 지브라일 대천사님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벌하지 않으실 거야.’

떳떳했기에, 마수드는 오히려 오토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예, 성 지브라일 대천사님. 부르셨사옵니까.”

“성인이 되어 승천하신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라. 그게 너의 역할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리고 나는 성 지브라일 대천사가 아니다. 나는 이오타 왕국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일 뿐이다. 그냥 전하라고 불러라.”

마수드는 그런 오토의 말을 오해했다.

‘성 지브라일 대천사님은 지금 인간의 몸으로 현신해서 나타나신 거니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끼워 맞추기식 해석이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마수드가 오토를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한다는 점이었다.

“예, 전하.”

“넌 앞으로 승천하신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성군이 돼야 해.”

“열심히 노력하겠사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마수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난 널 믿는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승천한 살라딘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군주 캐릭터가 된 마수드는, 장차 칼리프 왕국의 대통합에 성공하며 엄청난 업적을 이룩하게 된다.

또한, 다가올 세계대전에서의 대활약도 기대해 볼 만했다.

즉, 오토에게 있어서 가장 든든한 동맹이 되어 줄 새싹이었던 것이다.

* * *

그 후 오토는 1주일을 더 칼리프 왕국에서 머물며, 여정을 마무리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부터 왕세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천천히 권력을 넘겨. 전쟁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알아들어?”

“여, 여부가 있겠나이까? 성 지브라일 대천사님의 말씀에 따르겠사옵니다!”

오토는 압둘 2세를 협박해서, 마수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술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게 마수드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칼리프 왕국의 대통합은 어디까지나 마수드의 몫.

지금부터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며 아버지 살라딘의 뜻에 따라 각 부족들을 끌어안는 것이 마수드의 역할이었다.

“이건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오토는 카심이 구해 온 성물인 <마신의 요람>을 마수드에게 선물해 주었다.

<마신의 요람>은 오직 칼리프 왕국 안에서만 힘을 발휘하기에, 오토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라 선뜻 내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힘이 담긴 반지다.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이 검은.”

<황금대검>은 팔았다.

“특별히 싸게 줄 테니까 네가 사라.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예, 상부(尙父) 어른.”

마수드는 오토를 <상부>로 모셨다.

아버지 살라딘과 같은 존재로 받들어 모시겠단 의미였다.

“성 지브라일 대천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살라딘의 아내 젤나르가 오토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으로 마수드를 곁에서 잘 지켜주세요. 술탄으로서 큰 업적을 이룰 아이입니다.”

젤나르는 지혜로운 여인.

앞으로 어린 마수드의 곁을 지키며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조언을 해 줄 터였다.

“대천사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대천사 아니라니까요. 하하하하.”

오토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오히려 좋은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칼리프 왕국과 이오타 왕국은 혈맹으로서, 아주 굳건하고 돈독한 관계를 이어나갈 터.

덕분에 이오타 왕국이 질 좋은 마정석을 거의 원가에 공급받을 수 있게 되리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전략물자인 마정석을 원활하게, 그것도 원가에 공급받는다는 건 그야말로 엄청난 메리트.

이로써 앞으로 마정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렇게 칼리프 왕국을 떠나기 전.

“어려운 일이 있거든 언제든 연락해. 부담 갖지 말고.”

“예, 상부 어른.”

마수드가 오토를 향해 꾸벅 배꼽인사를 했다.

마수드는 맘 같아선 오토가 떠나지 못하게, 혹은 최소한 며칠이라도 더 머무르게끔 떼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성 지브라일 대천사의 화신이 떠난다는데, 감히 붙잡을 수는 없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겠사옵니까?”

“글쎄.”

오토가 알 듯 모를 듯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곧 다시 볼 날이 있겠지. 그럼 그때까지 건강하고. 어머니 말씀 잘 듣고. 다음번엔 훌륭한 술탄이 되어서, 군주 대 군주로 보는 거다.”

“예, 상부 어른.”

“그럼, 간다.”

“살펴 가시옵소서.”

그렇게 오토 일행은 칼리프 왕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잘랄라바드로 향했다.

‘당신과 짧게나마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수드는 당신의 고결한 의지를 받든 성군이 되어 대통합을 이룰 겁니다.’

칼리프 왕국의 수도 알살람을 뒤로 하며, 오토는 살라딘을 떠올렸다.

빛의 기둥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알살람을 비추고 있었다.

저 빛의 기둥은 앞으로 1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알살람을 비추며, 성인의 출현을 증명할 터였다.

“그나저나 어느 세월에 집에 가나? 하아.”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야, 너 배 타 본 적 있냐?”

오토가 하사신에게 물었다.

오토는 이 하사신을 이오타 왕국까지 데려가기로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심심하니까 앞으로 대나무 숲으로 써먹어야겠다.’

항해 중 지루함을 달래줄 말동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인 하사신에게는 고문일 테지만.

“정말로… 성 지브라일 대천사님의 화신이십니까?”

하사신이 오토에게 물었다.

그 역시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 중 하나이기에, 오토가 정말 대천사 지브라일일지도 모른다고 오해한 것이다.

“내가 누굴 거 같은데?”

오토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하사신에게 되물었다.

“내가 누군지 묻기 전에, 니가 누구인지부터 얘기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

“아,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너의 이름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