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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180화 (181/401)

180화

<대학살의 서>는 게임 <영지전쟁>에 등장하는 모든 아이템들 중 가장 신비하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대학살의 서는 지적생명체들의 영혼을 에너지자원으로 이용했다.

즉, 이 책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살인이 필수적이었다.

지적생명체들을 죽여서, 그들의 영혼 에너지를 책 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나 소비량도 어마어마했지만, 그건 영혼 에너지를 모으는 것에 비하면 딱히 부담이랄 것도 없었다.

그래서 대학살의 서는 매우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아이템이었다.

만약 영혼 에너지를 모으시겠답시고 닥치는 대로 지적생명체들을 죽여 댔다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악명(惡名)이 자자해지는 건 물론.

불운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원한 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다.

영혼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에서 저지르게 되는 살인이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오토의 눈앞에 펼쳐진 역대 소유자들의 기억은, 그런 대학살의 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환상은 책의 힘에 심취했던 소유자들이 무슨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는지, 또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무분별한 살인이 불러오는 대가.

즉, 피의 업보에 대한 경고의 의미였던 것이다.

스르르.

환상이 사라지고.

“…후우.”

오토는 대학살의 서를 어루만지며 스스로 다짐했다.

‘이 책에 잡아먹히면 안 돼. 정말 필요할 때.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돼. 영혼 에너지를 모으겠답시고 욕심을 부렸다간 나 역시 타락하고 말 거다.’

대학살의 서는 게임 <영지전쟁>에서 사용할 때도 만만찮던 물건이었다.

하물며, 현실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책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겠답시고 손에 피를 묻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최악의 경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오토는 대학살의 서를 무분별하게 사용했다가 신하들의 손에 목이 뎅겅! 날아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게임 막판.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직전 반란이 일어났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그 오싹함이란…….

‘조심, 또 조심. 게임에서 그 정도인데 현실이라면 더하겠지. 그러니까 조심하자.’

오토는 거듭 다짐하며, 성역을 나섰다.

* * *

성역을 나선 오토는, 쿤타치 가문의 가주 콘라드와 대화를 나눴다.

“그래,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냐.”

“슬슬 대륙으로 진출할 생각입니다.”

“음. 대륙진출이라.”

콘라드는 오토의 대답을 듣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못내 걱정되는지 물었다.

“가능하겠느냐? 이오타 왕국은 변방 중의 변방이다. 대륙진출을 말하기에는 지리적 요건이 너무나도 나쁘지 않더냐.”

콘라드의 지적은 옳았다.

대륙의 서쪽 변방에 자리한 이오타 왕국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쪽으로 나아가야 했다.

문제는 가는 길조차 쉽지가 않았다는 것.

이오타 왕국이 동쪽으로 진출하려거든 반드시 카슈미르 산맥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카슈미르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무려 20킬로미터나 되는 잔도(棧道), 즉 절벽에 선반을 달아서 낸 길을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산 넘어 산.

카슈미르 산맥을 넘어 비로소 변방을 벗어나고 나면, 꽤나 강력한 국력을 가진 나라들과 얼굴을 맞대야 했다.

슬레인, 로우레딘, 그리고 발틴.

이 3국(國)은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들이 아니었다.

물론 이오타 왕국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신흥강국이었지만, 아직은 힘이 한참 모자랐다.

지금으로서는 3국 중 어느 나라와도 붙어서 이길 수 없었다.

“섣불리 대륙 진출을 꿈꿨다간 오히려 식민지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콘라드는 이오타 왕국의 지정학적 불리함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오토에게 그렇게 조언했다.

“조금 더 힘을 키웠다가 안정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뇨.”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적기입니다. 지금 진출해야 합니다.”

“어째서? 너무 성급한 것 아니냐?”

“오히려 늦었죠.”

“음?”

“최적의 타이밍이 이미 지나가 버렸거든요.”

오토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대륙 진출이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늦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리프 왕국으로의 여정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대륙 진출의 타이밍도 그만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겨울이 끝날 때 즈음에 치고 나갔어야 했는데. 하아.’

오토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현재 3국의 정세는 매우 불안했다.

슬레인 왕국에는 희대의 폭군이 군림하는 바람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고.

로우레딘 왕국은 작년에 흉년이 들어 겨울 내내 식량난에 시달렸고.

발틴 왕국은 역사상 최악의 폭설이 계속된 탓에 나라 전체가 마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로우레딘 왕국의 식량난이 차츰 나아지고 있었고, 발틴 왕국의 발목을 잡던 폭설은 이미 끝나 버린 뒤였다.

“늦어도 가을이 오기 전. 로우레딘 왕국이 식량난을 극복하기 전에 진출해야 합니다.”

“3국의 정세가 어지러운 지금이 기회라는 것이냐.”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죠.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 줄 알고요.”

“네 의견이 그렇다니 믿어 보마.”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 콘라드의 손주라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겠지. 암, 그렇고말고. 좋다. 이 할아비가 도와주마.”

“네?”

“기사, 마법사, 그리고 마검사들을 추가로 파견해 주마.”

“그게 정말이세요?”

“정말이다마다. 손주 녀석이 대륙으로 진출한다는데 할아비가 그 정도 힘도 보태주지 못하겠느냐.”

“정말 감사합니다!”

콘라드가 지원을 해 준다는 말에 오토의 얼굴이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오타 왕국군은 만성적으로 인력 부족에 시달렸는데, 그중에서도 기사와 마법사 같은 고급인력 부족이 매우 심각했다.

고급인력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교육도 교육이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오타 왕국은 신생아나 다름없는 나라.

고급인력을 키워내기엔 그 역사가 너무 짧아서, 현실적으로 외부에서 보충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데려오는 고급인력이라고 해 봐야 제대로 된 사람들이 있을 리 없었다.

허우대 멀쩡한 기사와 마법사들이 미쳤다고 이오타 왕국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시골까지 오겠는가?

게다가 외부에서 데려오는 고급인력들에게서는 충성심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속 편하기도 했고.

상황이 이런데 기사·마법사·마검사들을 추가로 지원해 주겠다니.

오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도움이었다.

“대신 반드시 대륙 진출에 성공해야 한다. 알겠느냐.”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좋다.”

콘라드가 흡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오토가 덧붙였다.

“알퐁달 어르신께서 개발하신 신약에 대한 건은 저한테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그럴 생각이다. 알퐁달 어르신께서도 차기 가주인 네게 부탁하신 건이 아니더냐. 마땅히 네가 도맡아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예, 할아버님.”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집게섬에 들렀던 카심도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했다.

“이 아이를 맡아 달라고?”

“예, 시녀장님.”

카심은 곧장 시녀장 올리브를 만나 마리안느를 부탁했다.

“그런 딱한 사정이 있었군. 알겠다. 내 저 아이를 맡아 주지.”

“시녀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리안느라 했느냐?”

올리브가 마리안느를 향해 다가갔다.

주춤주춤!

마리안느는 마치 태산 같은 올리브의 덩치와 위압감에 짓눌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스윽.

올리브의 거대한 덩치가 마리안느를 덮쳐 갔다.

흠칫!

마리안느가 놀란 토끼처럼 몸을 떨었다.

“사, 살려 ㅈ….”

공포에 질린 마리안느가 살려달라고 소리치려던 순간.

“그간 많이 힘들었겠구나.”

“……!”

“여기선 내가 잘 보살펴줄 터이니, 아무 걱정 마라. 내가 있는 한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올리브가 마리안느를 꼭 안아 주며 다독여 주었다.

“누가 괴롭히거든 내게 말해야 한다. 내 누구든 곤죽을 내 버릴 것이다. 알겠느냐.”

“네, 시녀장님….”

“우리 왕궁에선 누구도 시종 시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오타 왕국의 시종·시녀들은 하인 같은 게 아니었다.

준 귀족 신분에다 공무원이라서, 나름 전문직에 해당했던 것이다.

‘올리브 시녀장님에게 맡기길 잘했군.’

카심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 * *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한 오토는, 즉시 대륙 진출을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아무리 늦어도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대륙진출을 완료해야 서둘러야 했다.

가을이 오면 3국 로우레딘 왕국의 식량난이 거의 해결될 것이었기에…….

“가을이 오기 전에 대륙진출에 나설 예정이니, 만반의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예! 전하!”

오토는 군대를 준비시키는 한편 에고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알퐁달 어르신이 개발한 신약에 대한 이야기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그 신약을 저렴하게 대량생산할 방법을 찾는단 말씀이십니까요?”

“그렇죠.”

“우선 알겠습니다요. 원자재를 대량으로 저렴하게 수급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요.”

“아, 그리고.”

오토가 본론을 꺼냈다.

“지금부터 우리 모국(母國)에 소문을 좀 내주세요. 이오타 영지의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반란을 일으켜 카슈미르 지방을 통일하고, 왕국을 세웠다고.”

아무리 코딱지만 한 시골 영지에 불과하다지만, 이오타도 영지인 이상 중앙정부인 모국이 있기 마련.

이오타 영지의 모국은 주변 3국 중 하나인 발틴 왕국이었다.

정확히는 지금 이오타 왕국이 자리한 <카슈미르 지방>의 80퍼센트가 발틴 왕국의 영토였다.

로샨 왕국을 뺀 이오타, 소룬, 라세느, 오르트, 세오덴, 베큠 영지까지 모두 다.

그런데도 발틴 왕국은 이곳 카슈미르 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신경을 꺼 버렸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카슈미르 지방은 워낙에 변방 중의 변방인지라, 괜히 신경을 써 봐야 행정력만 잡아먹는 골치 아픈 곳.

게다가 중간에 로샨 왕국이 덜컥 생겨 버리는 바람에, 발틴 왕국이 카슈미르 지방을 방치한 게 어언 50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카슈미르 지방 대부분이 발틴 왕국의 영토라는 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일개 시골 영주에 불과했던 오토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왕국을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십니까요? 그간 발틴 왕국의 눈을 잘 속여오지 않으셨습니까요?”

물론 오토는 그간 정보를 아주 잘 통제해 오고 있었다.

감찰관이 둘러보기도 전에 뇌물과 향락을 접대해서 빠르게 돌려보내고.

명목상으로 바치던 세금―푼돈―도 꼬박꼬박 잘 바치고 있었다.

심지어, 이제는 사라진 영지들의 이름으로.

“전하, 발틴 왕국에서 이오타 왕국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하지만 발틴 왕국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뒤이어 벌어질 일이야 뻔했다.

과거엔 세금을 뜯어낼 것도 없으니 방치하고 까먹어 버렸겠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의 이오타 왕국은 꽤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

발틴 왕국에서 숟가락을 들이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즉, 발틴 왕국에 이오타 왕국의 존재를 알린다는 건 사실상 나 잡아 잡숴 달란 의미밖엔 되지 않았다.

“에이~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요? 발틴 왕국이 바보도 아니고.”

오토는 발틴 왕국이 이오타 왕국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다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 거예요. 아는데, 하는 짓이 귀여워서 그냥 놔두는 거겠지. 딱히 뺏어 먹을 것도 없는데 괜히 건드려 봐야 적자만 날 테니까.”

“으음.”

“그러니까 소문 좀 내주세요. 이오타 왕국에 마정석 광산이 발견됐다고.”

“예에?!”

에고는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마정석 광산이 발견됐다고 소문을 내달라니?

그랬다가는…….

“전하! 그럼 발틴 왕국이 진짜로 쳐들어올지도 모릅니다요!”

“그러라고 소문내 달라는 건데요?”

“예에?”

“제발 좀 쳐들어와 주라고.”

오토가 히죽 웃었다.

오싹!

순간 에고는 오토의 그 잘생긴 얼굴이 마치 악마처럼 보여서 흠칫! 놀랐다.

그렇게 느낀 건 비단 에고뿐만이 아니었다.

‘저 표정 오래간만이군.’

카미유는 오토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과거 다른 영지들과 로샨 왕국을 요리할 때 오토의 표정이 딱 저랬다.

적들을 개미지옥으로 몰아넣고 악랄하게 탈수기를 돌리던 사악한 지략가의 얼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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