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사실 예법상 결례를 저지른 건 오토였다.
‘서류상으로’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발틴 왕국의 지방귀족이었고, 작위는 남작이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영주라도 국왕이 보낸 감찰관을 내려다보는 건 대단히 큰 불경이었다.
그건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겠다는 뜻으로, 반역죄로 다스려진다 해도 할 말이 없는 행위였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에 불과할 테지만.
“이,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은가.”
테오도르 백작이 카미유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나는 국왕 전하께서 임명하신 감찰관이다. 내게 검을 들이댔다는 것은….”
“대답하라.”
카미유가 테오도르 백작을 압박했다.
“본국의 전하께 불경한 언사로 언성을 높이지 않겠다고.”
그때.
“그냥 둬.”
오토가 카미유를 제지했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게.”
“하오나 전하.”
“괜찮으니까 그냥 둬.”
“알겠습니다.”
카미유는 검을 거두었다.
“내 반드시 네놈의 무례를 엄벌할 것이다.”
테오도르 백작은 카미유에게 으르렁거리고는, 오토를 노려보았다.
“오토 영주. 이러고도 그대가 무사할 것 같소이까?”
“뭐가?”
“그대는 우리 국왕 전하에 대한 충성을 져버리고, 영지전을 벌여 다른 독립 영지들을 공격해 흡수 합병했소.”
“독립 영지들 간에 벌어진 전쟁은 영주들의 자유 의지 아냐?”
“물론 그렇소만. 그대는 영지전의 결과를 일절 보고하지 않았소.”
“그건 맞지.”
“게다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반역을 저질렀소.”
“그것도 맞지.”
“그것만 해도 대역죄인데, 세금까지 축소하는 탈세를 저질렀소이다.”
“인정.”
테오도르 백작의 말은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다.
법대로 한다면, 오토는 발틴 왕국으로 압송되어 단두대에 목이 뎅겅! 썰려 나가기에 충분했다.
“근데.”
오토가 옥좌에서 일어나 테오도르 백작을 향해 다가갔다.
“지난 50년 동안 제대로 된 지원 하나 없이 세금만 뜯어가 놓고, 이제 와서 얼쩡대는 이유가 뭘까.”
“뭣이?!”
“발틴 왕국이 카슈미르 지방을 유기하고 방치한 게 50년이야. 근데 이제 와서 얼쩡대는 이유가 뭐냐고.”
“유기하고 방치하다니! 당치도 않소! 물론 국왕 전하께서 워낙 공사가 다망하시기에 카슈미르 지방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신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방치하고 유기하신 적은 없소이다. 다 마음속으로는… 컥!”
테오도르 백작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오토가 휘두른 부지깽이에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이다.
“이 새끼가.”
오토가 살벌한 표정으로 테오도르 백작을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누구 앞에서 궤변을 늘어놓고 지랄이야.”
“크, 크윽! 기어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려 하ㅅ….”
퍽!
오토가 부지깽이로 다시금 테오도르 백작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삥 뜯으러 왔으면, 삥 뜯으러 왔다고 말을 하든가. 같잖은 소리나 늘어놓고 자빠졌어.”
“으악!”
“죽도록 처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주.”
오토는 한참 동안이나 테오도르 백작을 부지깽이로 두들겨 말했다.
“가서 체흐 4세한테 전해.”
“끄어어어어억.”
“더 이상 이오타 영지는 없다고. 카슈미르 지방은 이제 발틴 왕국의 영토가 아니라, 이오타 왕국의 영토라고.”
“끄어어억.”
“그리고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더 이상 발틴 왕국의 남작이 아니라,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라고. 알아들어?”
“…후회하실 것이오.”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여봐라.”
오토가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이자를 포함해서 발틴 왕국에서 온 놈들을 모조리 똥통에 하루 정도 푹 담가 뒀다가, 수레에 실어서 발틴 왕국으로 보내도록.”
“예! 전하!”
그건 모국인 발틴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감찰관과 그 수행기사들을 폭행한 것으로도 모자라 똥통에 담가 버리는 폭거를 저지른 이상 전쟁은 불가피했다.
단언컨대, 발틴 왕국군이 이오타 왕국으로 쳐들어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발틴 왕국으로서는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 * *
며칠 후.
“뭐라!”
체흐 4세는 테오도르 백작의 보고를 받고 크게 분노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그대에게 그런 폭거를 저질렀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크흑흑흑!”
테오도르 백작은 얼마나 분노했으면, 눈물까지 줄줄 쏟아낼 정도였다.
부지깽이로 두들겨 맞은 것도 서러운데, 똥통에 빠지는 굴욕까지 당할 줄이야….
“오냐, 대놓고 반역을 저지르겠다면.”
체흐 4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과인 역시 더는 자비와 관용을 베풀 필요는 없겠지. 경들은 들어라!”
“예, 전하.”
“지금 당장 푼힐 요새에 전진 배치시켰던 우리 군에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하라! 또한, 추가 병력을 보내 대규모 전면전을 준비하도록 하라! 과인은 저 역적의 무리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렇게 발틴 왕국군이 이오타 왕국을 토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백작.”
“예, 전하.”
“그대는 당분간 과인 앞에 나타나지 마라.”
“예…?”
테오도르 백작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찌 그리 명령하시옵니까? 신은 아무런 잘못이….”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
“악취가 심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경은 당분간 자택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라. 냄새가 빠질 때까지 말이다.”
“아.”
테오도르 백작은 그제야 체흐 4세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루 동안 똥통에 푹 담가졌더니, 몸에 밴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똥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향수를 들이붓다시피 했음에도….
‘오토 드 스쿠데리아 이 개새끼야! 내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발틴 왕국이 이오타 왕국을 쳐부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으므로, 테오도르 백작은 자신의 복수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네놈이 처형당하기 전에 반드시 똥통에 담가 줄 것이다! 반드시!’
테오도르 백작은 복수를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척! 척! 척! 척!
토오롱 요새를 떠난 발틴 왕국군이 토오롱 뱀의 길을 따라 푼힐 요새로 진격했다.
목표는 이오타 왕국의 체르고리 요새였다.
* * *
푼힐 요새로 집결한 발틴 왕국군의 병력은 거의 2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징집병이 아니라 상비군이었으며, 평소 강도 높은 훈련으로 단련된 정예들이었다.
게다가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들도 많아서, 그 전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반대로, 체르고리 요새에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
체르고리 요새는 좁은 길목에 자리해 있어서, 그 규모가 매우 작았다.
병력을 더 배치시키고 싶어도 요새의 규모가 작다는 한계점이 명확했던 것이다.
그래서 발틴 왕국의 지휘관들은 체르고리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피해를 입기야 하겠지만, 병력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 보면 결국엔 뚫린다.
그게 발틴 왕국군 지휘관들의 판단이었다.
펑! 펑펑! 펑!
펑펑펑!
발틴 왕국군은 체르고리 요새를 향해 대포를 퍼부어 대며 선제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포격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
비명 하나 들려오지 않은 걸 보면, 요새 안쪽으로 떨어진 포탄들이 이오타 왕국군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게 분명했다.
게다가 화력이 집중되었던 성문 역시 굳건하기만 했다.
“허어! 어찌 저 작은 요새의 성문이 어찌 저리도 견고하단 말인가!”
발틴 왕국군 총사령관은 체르고리 요새의 방어력에 혀를 내둘렀다.
뚫리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건만, 너무 멀쩡해서 괜히 포탄―마정석―을 낭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전군! 공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발틴 왕국군이 체르고리 요새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벌어진 공성전.
발틴 왕국군이 성난 벌떼처럼 체르고리 요새로 달려들어,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벽 위에 선 이오타 왕국군이 발틴 왕국군을 향해 온갖 공격을 퍼부어 대며 대응에 나섰다.
그렇게 첫 전투가 벌어지고, 1주일이 지났다.
“이 지독한 놈들 같으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이기에 이리도 잘 버틴단 말인가!”
발틴 왕국군 총사령관은 저 멀리 보이는 체르고리 요새를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1주일 동안 수 차례 공성전이 벌어졌지만, 발틴 왕국군은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막대한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발틴 왕국군이 입은 피해는 그야말로 막심했다.
발생한 사상자가 5,000명.
그중 사망자만 무려 2,000명에 달했다.
반대로, 이오타 왕국군은 지쳐 보였지만 딱히 큰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지형적으로 유리하다곤 하나 저 자그마한 요새가 어떻게 이런 방어력을 자랑한단 말인가?’
발틴 왕국군 총사령관은 고뇌에 빠졌다.
이오타 왕국군의 높은 전투력과 체르고리 요새의 말도 안 되는 방어력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한편, 체르고리 요새에서는…….
“…지치는군.”
성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헬무트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헬무트.
한때 변경백으로서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들로부터 마그리트 왕국군을 지켜주던 그는, 이제 오토의 신하로서 이오타 왕국의 야전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오토는 헬무트를 불러다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체르고리 요새로 가서 발틴 왕국군을 막으세요.’
‘적들의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한 2만 정도?’
‘그럼 소신에게는….’
‘1,000명 드리겠습니다.’
‘예?’
‘왜요? 너무 많아요?’
‘저, 전하. 발틴 왕국군의 숫자가 2만이 넘는데 고작 1,000명으로….’
‘에이. 할 수 있으면서 또 약한 소리 하신다.’
‘…….’
‘어차피 수성전인데 20배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한 30배는 차이나야 힘들지.’
‘그, 그건 좀.’
‘뭐라고요? 할 수 있다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악랄하게도, 오토는 헬무트에게 고작 1,000명이라는 쥐꼬리만 한 병력을 내어주고 체르고리 요새를 떠넘겼다.
“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헬무트가 한탄했다.
마그리트 왕국에게 대대로 착취당하다가 이제 좀 살만해졌나 싶었는데, 고작 1천 명으로 2만 명을 막아내란다.
동전 한 닢 가지고 빵, 우유, 고기를 사 오고 돈을 남겨 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
헬무트는 포션을 넉넉히 챙겨서 체르고리 요새로 향했고, 1주일 동안이나 발틴 왕국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1,000명이면 된다는 오토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총사령관 각하! 적들이 또 몰려옵니다!”
“…알겠다.”
헬무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짝반짝!
헬무트가 몸을 일으키자 성벽에 박혀 있던 초록색 벽돌이 드러났다.
변경백의 결의.
성벽 내구도를 500퍼센트 올려주고, 아군 전투력과 사기를 적게는 10퍼센트에서 많게는 100퍼센트까지 증가시켜 주며, 적들의 원거리 공격이 빗나갈 확률을 비약적으로 올려주는 성물이었다.
* * *
같은 시각.
“이, 이게 무슨 일인가!”
토오롱 요새를 지키던 지휘관은, 난데없이 벌어진 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적들을 섬멸하라!”
“이오타를 위하여!!!”
성난 파도처럼 들이닥친 이오타 왕국군이 텅텅 비어 있다시피 하던 토오롱 요새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지휘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오타 왕국군이 토오롱 요새를 공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오타 왕국군이 토오롱 요새를 공격하려면 체르고리 요새를 공격하는 발틴 왕국군을 몰아내고, 나아가 푼힐 요새를 점령한 후 뱀의 길을 타고 오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단언컨대, 지금 들이닥친 이오타 왕국군이 그 험난한 여정을 거쳤을 리 없었다.
이오타 왕국군은 뱀의 길을 통해서 온 게 아니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방향에서 나타났다.
마치 전쟁이 시작되기 전 발틴 왕국의 영토에 들어와 있었던 것처럼….
‘설마 우회로가 있는 건가!’
발틴 왕국군의 지휘관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