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오토의 명령을 받은 카심은, 즉시 마검사들을 이끌고 뱀의 길 파괴에 나섰다.
파괴는 쉬웠다.
뱀의 길 곳곳에 마정석으로 만든 폭발물을 설치하고, 터뜨리기만 하면 되었다.
특히나, 카심에게는 더욱 쉬운 임무였다.
우웅!
카심은 과거 얻은 정육면체를 이용해 약간의 비행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잔도 밑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게 가능했다.
카심만 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퍼덕퍼덕!
“귁! 펭이도 도와준다! 귁귁귁!”
놀랍게도 펭족인 펭이 역시 비행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정작 수영은 못하는 주제에….
‘좋아.’
작업이 마무리될 때 즈음.
‘여기까지만 설치하면….’
카심은 허리춤에 찬 자루에 폭탄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걸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뱀의 길은 파괴될 테고, 체르고리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발틴 왕국군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리라.
‘역시 전하의 지략은 대륙 최고다.’
바로 그때.
퍼엉!
카심으로부터 약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던 폭탄 하나가 난데없이 폭발을 일으켰다.
그건 아주아주 드물지만,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마정석으로 만든 폭탄들은 1억 분의 1의 확률로 스스로 폭발하곤 했다.
마정석 자체가 마나의 집약체이니만큼, 지극히 낮은 확률이었지만 의문의 폭발 사고가 일어날 때가 있었던 것이다.
“으응?”
당황한 카심.
펑펑! 펑! 펑! 펑! 펑펑! 펑! 펑펑! 펑! 펑! 펑펑! 펑! 펑!
뒤이어 뱀의 길에 설치했던 마정석 폭탄들이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마정석 폭탄 하나가 터지는 바람에, 다른 폭탄들 역시 함께 터진 것이다.
“으아악!”
“다, 달려! 어서 달려!”
함께 폭탄을 설치하고 있던 마검사들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내달리거나, 혹은 절벽에 매달리는 등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카심은….
“어어? 어어어어?”
하필 카심이 있던 자리에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절벽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귁! 귁귁귁!”
카심과 펭이는 살기 위해 비행능력을 발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작게는 수백 킬로그램에서 많게는 수천 톤의 바윗덩어리들이 카심과 펭이를 덮쳤다.
퍽!
커다란 바위 하나가 카심의 머리통을 때렸다.
“컥!”
정신을 잃은 카심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귀이이이익! 귁귁! 귀이이익!”
펭이가 카심을 구하기 위해 절벽 아래로 급강하했다.
* * *
몇 시간 뒤.
“…으윽.”
정신을 차린 카심이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귁! 일어났냐! 귁! 귁귁귁!”
“여, 여긴 어디냐?”
“귀익! 펭이도 모른다! 귁! 살려고 날다 보니까 동굴이 보여서 들어온 거다! 귁!”
“동굴…?”
“귁! 그렇다! 카심 괜찮냐! 귁!”
“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괜찮은 것 같아.”
“귁! 다행이다! 귁귁귁!”
“고맙다. 덕분에 또 살았다.”
“친구 사이에 고마움은 무슨! 귁귁귁!”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벌써 목숨을 두 번이나 빚졌네. 이거 다 언제 갚지? 하하하.”
“귁! 펭이는 친구 도와준다! 귁귁귁!”
“그래. 늘 고맙다.”
카심은 펭이에게 연거푸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절벽 속 동굴이군.”
슬쩍 밖을 내다보니 천 길 낭떠러지였다.
“운이 좋았어. 이런 동굴이 없었으면 떨어지는 바위를 피하지 못했을 테니.”
“귁! 그렇다! 귁귁!”
“아이고, 내 팔자야.”
카심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폭발사고에 휘말려 절벽 아래로 추락해 버릴 줄이야.
‘지금은 마나가 다 떨어져서 비행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우니까. 좀 쉬었다가 복귀해야겠군.’
만약 비행 중 마나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게다가 왼쪽 다리가 부러져서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기까지 했다.
“크윽!”
정신을 차리니 문득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카심은 쿠란의 대변으로 만든 젤리를 꺼내 먹으며, 스스로의 다리를 비틀었다.
으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크으으윽!”
카심은 엄청난 통증에 신음했지만, 고통은 잠깐이었다.
젤리의 효과는 확실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통증이 다 가시고, 부러졌던 다리가 붙은 것이다.
“크흑!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카심은 동굴 밖을 향해 넙죽 절했다.
‘혹시 크게 다치게 되면 드세요.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카심은 얼마 전 젤리를 선물해 준 오토를 떠올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던 중.
“으응?”
카심은 동굴 안쪽에 무언가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설마 몬스터인가?’
탁!
마검사답게, 카심이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일으켰다.
작은 불꽃이 어둠을 몰아내고, 어두컴컴하던 동굴 안을 환히 밝혔다.
그 결과.
“헉!”
“귀익?!”
카심과 펭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 * *
토오롱 요새에서 출발한 이오타 왕국군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발틴 왕국의 수도 코앞까지 진격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현대 발틴 왕국에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이 남아 있었다.
본대는 체르고리 요새를 공격하고 있고.
예비대는 아무칸과 기병대를 뒤쫓느라 멀리 나가 있었다.
즉, 완벽한 빈집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수도를 점령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이제 어떻게 합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대기해. 싸울 생각 없으니까.”
“예?”
“체크메이트. 깔끔하게 체흐 4세만 잡고 끝내자고.”
“그게 쉽습니까?”
카미유는 기가 막혔다.
제아무리 수도까지 진격해 왔다고 한들, 일국의 왕을 체포한다는 게 쉬울 리가.
하지만 오토는 생각은 달랐다.
“응, 쉬워.”
“예?”
“x나 쉽다고.”
오토가 히죽 웃었다.
게이머 김도진은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극한까지 연구한 장인(匠人).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슈미르산에 있는 드워프들의 광산이 우회로라는 걸 발견해 낸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국경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수도를 거점 삼아 버티겠지. 아무리 우리 군이라도 수도를 장악하는 건 불가능해. 병력 숫자가 부족하니까. 성공한다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거다.’
하지만 공략법을 안다면?
‘쉽지.’
오토는 미소를 지으며, 카미유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뒤이어 오토의 입에서 작전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해!”
체흐 4세는 보고를 받고 기절할 뻔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대규모 병력이 짜잔! 하고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체흐 4세뿐만이 아니었다.
웅성웅성!
어전에 자리한 신하들 역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대! 본대를 불러들여라! 전방에 나가 있는 본대를 불러들이란 말이다!”
그때.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전령이 뛰어 들어와 암담한 사실을 전했다.
“토오롱 요새가 점령당하고 뱀의 길이 파괴되었다고 하옵니다!”
“뭐, 뭐라!”
“체르고리 요새 공략에 나섰던 우리 군과의 연락이 끊겼사옵니다!”
“이런 빌어먹을!”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텅텅 비다시피 한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카슈미르 지방으로 원정을 보냈던 병력들이 절실했다.
물론 발틴 왕국에 여유 병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동쪽으로 슬레인 왕국과의 국경에 배치해놓은 군대.
서쪽으로 로우레딘 왕국과의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군대가 있긴 했다.
하지만 양쪽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군대를 불러들인다면, 뒤이어 벌어질 일이야 뻔했다.
코앞에 들이닥친 이오타 왕국군을 막겠답시고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군대를 불러들였다간, 나라 전체가 갈기갈기 찢어질 게 뻔했다.
왜?
그땐 이오타 왕국뿐 아니라 이웃나라인 슬레인과 로우레딘까지 상대해야 할 테니까.
“도대체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경들은 무얼 했는가! 도대체 무얼 했어! 이게 말이 되나!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체흐 4세는 연신 신하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분노를 토해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연거푸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이미 코앞까지 진격해 온 이오타 왕국군이 수도를 포위해 버리기 직전이었으므로….
“어찌 아무도 말이 없는가! 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느냐는 말이다! 대책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체흐 4세가 연신 신하들을 다그쳤지만, 불행히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하들이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병력은 없고.
적은 가깝고.
그렇다고 부를 지원군은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저, 전하.”
한 신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수도를 거점으로 결사항전하시는 방법밖엔 없사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 역시 입을 열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지금은 버티는 수밖에는 없사옵니다.”
“적 기병대를 쫓아간 아군 병력이 회군할 때까지 버티셔야 하옵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었다.
“전하, 몽진(蒙塵)을 하심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옥체를 보중하소서.”
“지금은 훗날을 기약하실 때인 줄로 아뢰옵니다.”
몽진이란 왕이 수도를 비우고 피신하는 것으로, 매우 치욕스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려해 볼 만한 수단이기도 했다.
체흐 4세가 체포되기라도 하면 이래저래 골치 아파질 테니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체흐 4세는 고민했다.
왕성에서 결사항전을 벌이느냐.
아니면 이대로 몽진하느냐.
그건 어디까지나 체흐 4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민심이 흉흉한 이때에 몽진이라니….’
지난 겨울.
발틴 왕국은 폭설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 결과 수만 명이 얼어 죽는 참사를 겪었다.
그래서 여름이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민심이 매우 흉흉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수도가 함락당하고, 심지어 국왕까지 도망쳐 버린다면 민심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래,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도망치기까지 할 순 없다. 어찌 카슈미르 지방의 시골 영주 따위를 상대로 도망칠 수가 있겠는가? 오토 드 스쿠데리아 놈 따위에게 등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체흐 4세는 도저히 자존심을 굽힐 수가 없었다.
다른 적이라면 모르되, 말단 중의 말단인 지방 귀족을 상대로 도망쳤다간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터.
소문이 어디까지 퍼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만약 도망쳐서 이 위기를 극복한다고 한들, 평생 손가락질을 받게 될 터.
“경들은 들으라.”
“예, 전하.”
체흐 4세가 신하들에게 선언했다.
“몽진은 없다! 과인은 수도를 지켜낼 것이다! 어찌 시골 영주 따위에게 등을 보이겠는가! 또한! 어찌 내 백성들을 놔두고 도망치겠는가! 당장 내 검과 갑옷을 가져와라! 어서!”
체흐 4세는 그렇게 선언하고는,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징집령을 발령하고 결사항전을 준비하라! 수도를 거점으로 적들의 침공을 막아낼 것이다!”
“예! 전하!”
“그리고 각 국경에 전령을 보내 배치된 병력의 절반을 보내라 이르라! 또한! 적들의 기병대를 쫓는 우리 군에게도 수도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바로 그때.
콰앙!
와장창!
왕궁 한복판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적이다!”
“적들이 몰려온다!”
뒤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하!”
어전 앞을 지키던 기사가 황급히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적들이 습격이옵니다! 적들이 우리 왕궁까지 침투하였사옵니다!”
“뭐, 뭐라!”
“적들의 수가 많사옵니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