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아니.”
카미유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도대체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뭐 하긴.”
오토가 슬쩍 나오며 히죽 웃었다.
“혼자서 청승 떨고 있을 거 같아서 왔지.”
“제가 언제 청승을 떨었습니까.”
“떨었잖아.”
오토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슬레인 왕국 생각하면서 옛날 생각한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개뿔.”
오토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옛날 생각했잖아. 안 할 수 없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각별하잖아, 슬레인 왕국.”
“…….”
“거기로 쳐들어가자니 마음도 꽤 불편하겠지.”
실제로, 오토는 카미유의 심리 상태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왜?
카미유의 과거를 너무나도 잘 아니까.
오토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카미유의 과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몇 없을 지경이었다.
괜히 일개 시골 영주의 기사 주제에 전 대륙에 이름을 날린 게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오토가 카미유에게 넌지시 말했다.
“뭘 말입니까?”
“그냥 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글쎄.”
오토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고 보면 알아.”
“……?”
“찬바람 너무 오래 쐬지 말고. 일찍 들어가서 쉬어.”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미유를 남겨두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카미유는 오토의 말뜻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오토가 떠나간 후.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오토가 말했던 것처럼.
* * *
기사 아카데미 시절은 첫날부터 지옥이었다.
“시골뜨기 주제에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해?”
“이 촌뜨기 새끼!”
“그깟 시골 깡촌에 기사가 필요하긴 하냐?”
다들 날 듣도 보도 못한 시골 촌구석 출신이라 놀려 대고, 차별했다.
난 굴하지 않았다.
영주님께서는 없는 형편에 허리띠를 졸라매 학비를 내주셨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머저리들의 놀림에 놀아날 시간 따위, 내겐 없었다.
나는 악착같이 공부하고, 이를 악물고 수련했다.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
영주님의 후원으로 학비만 간신히 해결했을 뿐, 모든 것이 부족했다.
훈련복 두 벌로 사계절을 보내고, 다 떨어져 나간 군화를 꾸역꾸역 고치고 기워 신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교과서는 헌 것을 구해다 보고, 각종 장비도 용병들이 쓰던 걸 중고로 구매해다 썼다.
교육이나 훈련이 없는 날이면 근처 공사 현장이나 인력 시장에 나가 생활비를 벌었다.
“거지새끼!”
“돈도 없으면서 유학은!”
“니네 가난한 영주는 너 유학 보낸답시고 길바닥에서 빵을 판타지?”
동기들은 그런 날 거지라고 놀려대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내 학비를 대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지독하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공부한 결과 나는 아카데미 수석으로 졸업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날 놀리던 동기들은, 졸업할 때 즈음 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졸업하던 날.
“장하다, 정말로 장해.”
영주님께서 졸업식에 와 주셨다.
영주님께선 병색이 완연해 보이셨다.
“졸업 선물이다.”
영주님께선 내게 검을 선물해 주셨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새것이었다.
“영주님의 은해가 하해와 같습니다.”
“은혜는 무슨. 다 네가 열심히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카미유.”
“그런데 도련님께선….”
“녀석은 몸이 아프다더구나.”
오토에 대해 물었을 때, 영주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오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더 묻고 싶었지만, 영주님께서는 쫓기듯 이오타 영지로 돌아가셨다.
* * *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견습기사 생활을 시작했다.
견습기사는 총 2년이었는데, 1년은 장교로서 군에 복무하고 나머지 1년은 배정된 임시 주군을 모시는 일이었다.
나는 슬레인 왕국의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부대의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3개월쯤 복무했을 때 일이 터졌다.
수도 외곽의 작은 마을을 순찰하는데, 왕제(王弟)가 사고를 쳤다.
수도 외곽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던 왕제가 한 처녀를 마구간으로 데려가 강제로 겁간(劫姦)하려던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하필 그 근처에 있었던 나는, 왕제를 막으려다 부득이하게 그를 베었다.
그와 그의 기사들은 제압하기엔 너무 강한 상대였고, 나에게는 그들을 제압할 힘까지는 없었으니까.
그 사건으로 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불합리한 권력과 폭력 앞에 스러진다 한들, 신념을 저버릴 순 없었다.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영주님께서는, 스스로 한 영지의 영주임에도 재판장까지 달려와 무릎을 꿇고 비셨다.
영주님께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는 것 하나만큼은 후회하고,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난 죽을 팔자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왕은 나를 용서하고 사면해 주었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일개 견습기사이자 육군 소위를 처형하지 않은 것이다.
그건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풀려난 나는, 무사히 장교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그즈음 내게도 행복이 찾아왔다.
이사벨.
내게는 한 학년 후배인 그녀는, 백작가의 여식이었지만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사벨은 본격적으로 날 쫓아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감정을 키워 나갔다.
당연히 난 이사벨과 이어지지 못했다.
백작가인 이사벨의 가문은 그녀와 2왕자와의 약혼을 추진했고, 약혼은 일사천리로 성사되었다.
“같이 도망가요.”
“…미안하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떠나 보냈고, 그녀는 2왕자와 약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아버지 같은 영주님을 배신하고, 기사도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이사벨을 떠나보낸 대가는 혹독했다.
견습기사로서 임시 주군을 섬기며 1년을 더 봉사해야 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필 2왕자를 모시게 되었던 거다.
2왕자를 모시던 첫날.
“네놈이 그 카미유란 놈이군.”
“…….”
“네놈의 그 잘난 기사도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 큭큭큭! 그 고결하다는 기사도 정신이 박살나는 걸 보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처음으로 기사가 된 것을 후회했다.
* * *
2왕자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본래 서자 출신인 그는, 광기를 넘어 순수한 악(惡)에 가까웠다.
그는 피를 보는 걸 즐기고, 타인을 짓밟길 즐겼으며, 또한 교활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인 주제에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그 강함은 왕국 내에서도 적수가 없었다.
나는 견습기사로서, 그런 2왕자를 모시며 온갖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
또한, 그는 내 신념을 깨뜨리기 위해 나를 시험하고 욕보이기 일쑤였다.
그렇게 지옥 같은 1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래도 날 베지 않을 거냐?”
“…….”
“큭큭큭! 이 꼴을 두 눈으로 볼 거냐고?”
2왕자는 내가 보는 앞에서 길 가던 여인을 붙잡고, 보란 듯 욕보였다.
이사벨과 약혼했음에도.
나는 기사가 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왕제를 베어 불합리한 권력과 폭력에 저항했던 나는, 그 불합리한 권력과 폭력을 지켜내는 검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귓가를 파고드는 여인의 비명과 흐느낌에, 나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지옥 같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어쩌자고 이런 모순적인 존재가 되고자 했는지, 과거의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난 끝끝내 2왕자를 향해 검을 뽑아 들지 못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기사란 결코 고결한 존재가 아니며, 자유의지 없이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한없이 이기적인 장기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때.
“2왕자를 척살하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왕세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이 2왕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고, 그들은 곧 현장을 덮쳤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고, 우리는 큰 피해를 입은 채 도망쳤다.
그 과정에서 기사단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2왕자 역시 중상을 입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나는, 중상을 입은 2왕자를 모시고 가까스로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2왕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큭큭큭! 왜 망설이지? 지금이 네놈에게는 유일한 기회일 텐데?”
“…….”
“어서 죽여.”
2왕자가 내게 속삭였다.
“나를 죽여서, 네놈의 그 잘난 기사도 정신과 신념이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걸 증명해. 큭큭. 네놈이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라고. 큭큭큭.”
그건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나는 2왕자를 죽이고 싶었다.
그는 살아남아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다.
그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내전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병약한 왕세자는 2왕자를 감당하지 못할 테고.
지금 이 악마를 죽이지 않는다면, 희대의 폭군이 탄생하리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사벨.
그녀의 인생도 달라지겠지.
슬레인 왕국 백성들의 삶 또한.
“닥쳐! 그 입 제발 좀 닥치란 말이다!”
“크흐흐흐!”
“입 닥쳐… 제발.”
2왕자를 들쳐 업은 나는, 악천후를 뚫고 기어코 그를 안전한 장소까지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버림받았다.
“이만 내 눈앞에서 꺼져라.”
며칠을 죽은 듯 잠들어 있던 2왕자가 내게 말했다.
“오늘의 전공이 너의 업보가 될 것이며, 훗날 너의 목을 조를 것이다. 장담컨대, 너는 평생을 괴로워하게 될 거야. 큭큭… 큭큭큭!”
“…….”
“맘 같아선 계속 내 발밑에 두고, 오늘을 후회하며 평생을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기고 싶군. 하지만 그건 훗날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 두도록 하지. 그러니, 이만 내 앞에서 꺼져라.”
그렇게 나는 슬레인 왕국을 떠나 고향 이오타 영지로 돌아왔다.
고결한 기사라는 헛된 명성만을 지니고.
* * *
나는 소망했다.
그저 시골 영지의 시골뜨기 기사로서 살아가기를.
그러나 6년간 떠나 있었던 이오타 영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 씨발! 감히 평민 주제에 영주의 아들인 나를 무시해? 이 개새끼야!”
“으악! 도, 도련님! 제발 자비를!”
“이 씨발놈아! 뒈져! 뒈져 이 개새끼야!”
“크아악!”
너무나도 변해 버린 도련님의 모습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형아! 하고 나를 따르던 총명하고 영리한 도련님은, 희대의 개망나니가 되어 있었다.
나는… 기사가 된 것을 또다시 후회했다.
얼마 가지 않아 영주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영주가 된 도련님을 모시게 되었다.
영주님의 폭정은 날로 심해져 갔다.
비록 시골 마을이나 다름없는 영지였지만, 전대 영주님께서 평생을 바쳐 발전시켜온 영지.
그 영지가 날이 갈수록 망해 가는 모습이란, 내겐 견딜 수 없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영주님의 도를 지나친 폭정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나는 결심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영주님을 죽이고 나도 목숨을 끊기로.
그렇게 하루하루 죽지 못해 버티던 어느 날이었다.
놀랍게도, 영주님께서 아침 회의에 참석하셨다.
“오늘 안건이 뭐죠?”
“갑자기 그걸 물어보시는 이유가 뭡니까.”
“영주가 회의의 안건을 궁금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내 물음에 영주님이 대답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 것인지, 불안하기만 했다.
“우선. 비축해 놓은 식량을 풀어서 굶주린 영지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영주님께서 명령하셨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갑자기 구휼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백성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다며.”
“재정이 빡빡합니다. 지금 식량을 풀었다간 영지가 파산할지도 모릅니다.”
“파산보다 사람 목숨이 먼저야. 산 입에 거미줄 치게 생겼는데 그깟 파산이 대수야?”
“영주님….”
“기사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명령이야. 풀어.”
“명령…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날 이후.
영주님께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 * *
카미유는 서쪽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슬레인 왕국과의 전쟁이라니. 이제는 옛 친구들과 죽고 죽이는….’
숨어 있던 오토가 부지깽이로 카미유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퍼억!
털썩, 쓰러진 카미유.
“거, 옛날 생각하면서 청승 좀 작작 떨라니까. 한참 기다렸잖아.”
오토가 기절한 카미유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