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슥, 스윽.
대기하고 있던 마검사들이 나타나 기절한 카미유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웠다.
“우리 공주님 다치지 않게 살살 다루란 말이에요, 살살.”
“예, 전하.”
“가장 높은 첨탑에 가둬 두세요.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 무기한으로 가둬 두는 거니까, 절대 풀어주면 안 됩니다. 이건 어명이고, 군령입니다.”
“예, 전하.”
그렇게 카미유가 마검사들에 의해 옮겨지고.
‘형은 그냥 첨탑에 갇혀 있으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오토가 질질 끌려가는 카미유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일종의 배려였다.
‘슬레인 왕국과의 전쟁이 형한테는 심적으로 큰 부담일 테니까.’
카미유에게 있어 슬레인 왕국은 수없이 많은 선배, 후배, 동기들이 복무하고 있는 곳.
그런 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왜?
카미유로서는 그들을 죽이거나, 혹은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테니까.
그래서 오토는 슬레인 왕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카미유를 아예 격리시켜 버리기로 결정했다.
카미유의 성격상 빠져 있으라고 해도 굳이 전쟁에 나서서 옛 친구들과 싸울 테고, 심적으로 고통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 * *
군 수뇌부들을 소집한 오토는, 즉시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힘으로 쓸어버려야 돼.’
슬레인 왕국은 발틴 왕국처럼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직 힘으로, 순식간에 싹 쓸어버리는 게 답이었다.
지금 오토에게는 그럴 만한 군사력이 있었다.
물론 이오타 왕국군의 군사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이오타 왕국군은 병력의 질은 좋았지만,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오타 왕국군에 발틴 왕국군이 추가된다면?
‘충분하지.’
체흐 4세를 포함해 발틴 왕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데리고 있는 이상, 발틴 왕국군은 이제 오토의 군대나 다름없었다.
‘흩어져 있는 발틴 왕국군을 다 끌어 모으면 족히 4만은 돼. 우리 군이 15,000명이니까. 총 55,000명이다. 이만하면 슬레인 왕국의 수도까지 단숨에 진격할 수 있다.’
확실했다.
이오타 왕국군과 발틴 왕국군을 합치면, 충분히 슬레인 왕국 정복이 가능했다.
물론 큰 피해가 발생하긴 하겠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
희생 없는 전쟁은 없다.
오토는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다만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오토는 전략을 세심하게 수립했다.
그러는 동안 푼힐 요새에 발이 묶였던 발틴 왕국군, 그리고 아무칸과 기병들도 수도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오토는 총 55,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린 왕으로서, 차근차근 슬레인 왕국을 정복할 준비를 시작했다.
오토는 몇 날 며칠 동안 전략을 수립하고, 심지어 세세한 전술까지 짜서 지휘관들에게 전달했다.
그건 적이든 아군이든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슬레인 왕국도 결국엔 이오타 왕국에 흡수·합병될 예정이었으니까.
아무리 적이라지만, 슬레인 왕국군 역시 오토의 백성이 될 예정이었으므로 적들의 피해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데.
“전하, 슬레인 왕국에서 밀사(密使)가 도착했습니다.”
“예?”
“그들이 전하를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밀사들이?”
오토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왜 밀사를 보내지?’
게임을 통해 슬레인 왕국과 숱하게 싸워 봤지만, 여태 밀사를 보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도 변수인가?’
오토는 긴장했다.
그간 수 차례 위기에 처하면서, 스스로 변수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한 후에는 변수의 ㅂ자만 들어도 경기가 일어날 정도였다.
어설프게 알면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한 결과를 불러온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기에, 신경이 곤두서는 건 당연했다.
“일단 만나 보ㅈ….”
그때.
“전하, 슬레인 왕국에서 온 밀사가 전하를 뵙기를 청하옵니다.”
“슬레인 왕국의 밀사가 전하를 뵙고자 하옵니다.”
“슬레인 왕국의 밀사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거의 10명에 달하는 밀사들이 왔단 보고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이게 무슨.”
오토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변수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진 덕분에, 오토는 순간적으로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죠.”
“갑자기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긴 했지만 오토는 사실상 고장이 나 버린 상태였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이 넘는 밀사가 만남을 요청했다는 건 명백한 변수.
‘일단 침착하자. 침착하게 대응하는 거다.’
오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슬레인 왕국의 밀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 전하.”
“헉!”
오토는 밀사로 왔다는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만 정신이 혼미해져서 기절할 뻔했다.
‘아니!!! 조제프 니가 왜 여기 있어어어어어어어!!!’
조제프 대장.
무려 4성 장군인 그는, 슬레인 왕국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제1군단의 군단장이었다.
즉, 슬레인 왕국 군부의 최고 실세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조제프가 왜 밀사로 찾아왔지? 그것도 직접?’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오토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전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제프가 오토에게 말했다.
“저희 1군단이 전하께 항복한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뭐라고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가 지휘하는 1군단을 이끌고 전하께 항복하려 합니다.”
“……?”
“받아주신다면, 앞으로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슬레인 왕국의 함정인가?’
의심부터 들었다.
멀쩡히 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제1군단의 군단장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항복의 뜻을 내비친단 말인가?
‘슬레인 왕국에 내가 모르는 지략가가 있었나? 아닌데. 슬레인 왕국에는 딱히 지략이 뛰어난 캐릭터는 없는데.’
거짓 항복을 위해 제1군단장인 조제프를 보낼 정도면, 이 계략을 짠 인물은 희대의 천재일 수도 있었다.
혹은 희대의 x신이거나.
“갑자기 항복하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오토가 물었다.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라.”
“이오타 왕국군의 군사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발틴 왕국군까지 가세한다면… 사실상 우리 슬레인 왕국에 희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항복하겠다는 겁니까?”
“맞서 싸워 봤자 개죽음일 뿐입니다. 또한.”
조제프의 입가에 한없이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제 얼굴에 침 뱉기에 불과하지만… 현 국왕은 희대의 폭군입니다. 이대로라면 우리 슬레인에 미래는 없습니다.”
“국경을 지키는 군단장으로서 하실 말씀은 아니네요.”
“전하.”
조제프가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우리 슬레인 왕국의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매일같이 충신들의 목이 떨어져 나가고, 간신배들이 득세하며 나라의 곳간을 털어먹고 있습니다.”
물론 오토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조제프의 말을 들어주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기사들은 폭군의 개가 된 지 오래입니다. 심지어 왕이 모든 왕족들을 처형하는 바람에, 왕가의 혈통을 이을 사람이 단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항복을 하시겠다고요?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역성혁명(易姓革命).
반란을 일으켜 아예 왕가를 갈아치우는 것.
“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인물들은 이미 즉위하자마자 모조리 숙청해 버리고,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고 아첨하는 간신배들만 살려 두었을 뿐입니다.”
“흐음.”
“게다가.”
조제프가 말했다.
“와지르 대공께서 찾아와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그 순간.
‘헉!’
오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 *
오토가 대륙진출에 나서기 전.
‘나는 잠시 어디 좀 다녀오마.’
와지르 대공은 그 말을 남기고 이오타 왕국을 떠났다.
오토는 와지르 대공의 휴가(?)를 그저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랬던 와지르가 알고 보니 슬레인 왕국의 제1군단장 조제프를 만나, 그를 설득했었다니.
“와지르 대공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슬레인 왕국에는 희망이 없다고.”
조제프가 말했다.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고, 새로운 왕께서 오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설마 그 새로운 왕이….”
“예, 바로 제 앞에 계신 전하이십니다.”
조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께서는 저 카슈미르 산맥 너머에서 출현한 신흥강국이 발틴 왕국을 순식간에 점령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신흥강국 이오타의 군대. 그리고 발틴 왕국군. 이 두 군대가 힘을 합치면, 우리 슬레인 왕국으로서는 버틸 수 없다고 하셨지요.”
“아.”
“어차피 이대로 있다가는 저 역시 국왕의 손에 숙청당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겠죠.”
“제가 죽는 건 상관없습니다. 허나 무고한 우리 병사들이 적들의 군홧발 아래 개죽음을 당하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공의 말씀에 따라 전하께 항복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오토는 조제프의 말을 듣고, 와지르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국경을 지키는 군단장을 설득해 항복하도록 만들 줄이야….
“받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오토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조제프의 손을 꼭 잡고 연거푸 고마움을 표시했다.
“조제프 장군님의 큰 결단이 여러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셨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정녕 받아주시는 것입니까?”
“당연한 말씀을. 앞으로 장군님에 대한 대우도 확실히 보장하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제프가 오토를 향해 넙죽 엎드려 절했다.
비단 조제프뿐만이 아니었다.
“항복하고 싶습니다.”
“전하께 항복하겠습니다.”
“부디 받아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오토는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밀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항복을 위해서 온 이들이었다.
즉, 밀사들은 슬레인 왕국의 계략이 아닌 와지르가 발품을 팔아 가면서 만들어 낸 회유의 결과물들이었다.
‘개, 개꿀! 이러면 큰 전투 없이 수도 코앞까지 진격할 수 있다! 대박! 대박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오토는 그들을 모두 받아주었다.
덕분에 오토는 전략을 새로 짜야만 했다.
항복을 해 온 자들 중에서는 슬레인 왕국의 군부 핵심 인물들이 여럿 있어서, 불가피하게 전략을 수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끌끌끌!”
와지르 대공이 오토를 찾아왔다.
“내가 보낸 선물을 잘 받았느냐? 끌끌끌!”
“대공 전하아아아아!”
오토는 와지르에게 달려가서, 그를 등에 업었다.
“으응? 이 녀석이 왜 이래?”
“감사합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내려주지 못하겠느냐! 이놈!”
그렇게 소리치기는 했지만, 와지르 대공은 오토에게 업힌 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힘써 주신 덕분에 수없이 많은 목숨을 살리게 됐습니다!”
오토는 와지르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그 위대한 업적을 칭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와지르의 대활약 덕분에 전투를 거의 치르지 않고 수도를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수도를 방어하는 군대도 항복할 게 불 보듯 뻔한 일이라, 이미 슬레인 왕국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