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어떠냐? 이만하면 이 늙은이의 밥값은 충분히 한 것이겠지?”
“당연한 말씀을!”
오토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대공 전하께선 영웅이십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갈 수많은 목숨을 살리셨습니다!”
“끌끌. 영웅은 무슨.”
와지르가 피식 웃었다.
“그저 요망한 늙은이가 교활한 장난질을 친 것에 불과하다.”
“아닙니다.”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끌끌끌.”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와지르가 부린 마법(?)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이건 오토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성과였고, 시도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계략이었다.
대륙에서 명성이 높은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자 행정가인 와지르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지, 일개 약소국의 왕 따위가 나선다고 해서 될 작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감히 항복을 권유하냐며 목을 뎅겅! 날려 버리려 들게 뻔했다.
괜히 오토가 외교와 계략이 아닌 대규모 전면전을 통해 슬레인 왕국을 점령하려 했을까.
명성과 인맥이 없는 오토로서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 떠먹여 주었으니 씹어서 삼키는 것은 네 녀석이 알아서 하도록 해라.”
“당연하죠.”
“그리고 이쯤 했으면 카미유 녀석은 풀어주는 게 어떠냐.”
“아?”
“듣자 하니 녀석을 기절시켜서 강제로 가둬 뒀다고 하더구나.”
“하하. 하하하하.”
“이만하면 녀석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을 테니, 이만 풀어주도록 해라.”
“네.”
…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오토는 솔직히 좀 두려웠다.
‘풀어주자마자 길길이 날뛰면 어떡하지?’
딴에는 배려해 준다고 그런 거였지만, 갑자기 부지깽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카미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오싹!
오토는 카미유가 풀려나자마자 칼부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 가둬 놓지도 않았지!!!’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가둬 둘 순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오토는 몇 대 막을 각오를 하고 카미유를 풀어주기로 했다.
* * *
카미유를 풀어준 뒤.
“전하.”
카미유가 굳은 표정으로 오토를 불렀다.
“잠시 따로 뵐 수 있겠습니까?”
“지, 지금?”
오토는 카미유의 얼굴을 보자마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무표정한 카미유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진짜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만 같았다.
“지, 지금은 바쁜데. 하하. 하하하하.”
“잠깐이면 됩니다.”
그래, 잠깐이면 되겠지.
주먹 한 방 날리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으응.”
오토는 잠시 으슥한 곳으로 가서 카미유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뭐 하십니까?”
카미유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를 악문 오토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응?”
“왜 한 대 맞을 사람처럼 쫄고 그러십니까?”
“때리는 거… 아니었어?”
“군주를 때리는 기사도 있습니까?”
“예전에는 막 칼도 휘두르고 그랬잖아.”
“…….”
“죽이려고도 하고?”
카미유는 켕기는 게 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맙단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
“응???”
“저를 가두신 이유, 압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미유가 진심을 담아 오토에게 전했다.
“안 때려?”
“제가 왜 전하를 때립니까?”
“아니이. 내가 강제로 기절시켜서 가뒀잖아.”
“절 걱정해서 마음 써 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맞지.”
“그럼 됐습니다.”
“진짜 안 때리는 거지?”
“정 맞고 싶으시면 한 대 때려드릴 순 있습니다만.”
“휴우.”
오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예?”
“피를 얼마 흘리지 않고도 슬레인 왕국을 점령하게 됐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오토가 카미유에게 와지르 대공이 벌인 공작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응.”
“정말로 피를 덜 흘리게 된 겁니까?”
“그렇다니까?”
“정말, 정말로 다행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카미유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만하면 전쟁터에서 옛 친구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거의 염려치 않아도 될 터.
물론 그런 일이 아예 벌어지지 않을 순 없겠지만.
어쨌거나 인명피해가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카미유는 마음의 짐을 상당부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알겠으면 준비해.”
“예?”
“한 달 안에 수도를 점령하고, 왕궁까지 쳐들어갈 거야. 왕궁으로 쳐들어가면 전투가 벌어질 거야. 거기서부터는 어쩔 수 없어. 피를 흘려야 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카미유는 오토의 말뜻을 알아듣고,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의 큰 전투는 벌어질 것이고, 그 전투가 왕궁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렇다면…….
‘수련.’
카미유는 왕궁에서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스스로를 갈고 닦기로 했다.
단 한 명이라도 덜 죽이고 제압하려거든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으니까.
* * *
슬레인 왕국을 공격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바로 쳐들어가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오토도 점령지인 발틴 왕국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재정비가 필요했고, 그건 항복을 약속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토에게 항복을 약속했던 슬레인 왕국의 주요 인사들은, 반란에 앞서 치밀한 사전작업에 들어갔다.
그 사전작업이란, 바로 충신들을 체포해서 가둬 두는 거였다.
현 국왕이 제아무리 폭군이라지만, 아직도 왕조에 충성하는 충신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그들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에라이.”
오토는 애써 짠 전략·전술을 모조리 수정해야만 했다.
와지르 대공이 대활약해 준 덕분에, 슬레인 왕국과 힘 대 힘으로 맞설 것을 예상하고 짰던 전략·전술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토는 새로운 환경에 맞춰 전략·전술을 다시 짜야만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오토는 항복 의사를 표시해 온 자들이 배신했을 때를 가정해서 새롭게 전략·전술을 짜는 치밀함을 보였다.
혹시나 뒤통수를 맞게 되더라도 안정적으로 재정비가 가능하고, 언제든 반격하거나 후퇴할 수 있게끔 플랜B, 플랜C, 플랜D 이상을 준비했던 것이다.
“맙소사.”
“어찌 이리 병력 운용을 잘 하시옵니까?”
군 장교들은 오토가 전략·전술을 짜는 걸 보고 혀를 내두르며 놀라워했다.
오토가 짠 작전 계획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도저히 흠잡을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토는 전혀 우쭐하거나, 으스대지 않았다.
‘이걸 걸 몇 번이나 해 봤는데. 못하면 사람도 아니지.’
오토는 슬레인 왕국을 숱하게 공략해본 경험이 있었고, 그중에서는 처참하게 패배한 적도 부지기수.
지금 오토가 짠 대(對) 슬레인 전략·전술은 오롯이 경험의 산물이지, 결코 군사적 지식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물론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다르겠지만.
그렇게 전략·전술을 짜면서 슬레인 왕국 공략을 준비하는데.
“…왜 안 오시지?”
오토는 엘리제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자 적잖이 당황했다.
벌써 두 번은 왔다 갔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엘리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포기하신 건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올 때가 된 사람이 오지 않으니 슬슬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많이 바쁘신가? 하긴. 장벽 너머가 그런 곳이긴 하지. 휴. 내가 찾아갈 수도 없고.’
궁금한 마음에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슬레인 왕국 공략을 코앞에 둔 때라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았다.
‘편지라도 써 볼까? 아냐. 큰일 하시는 분인데 괜히 편지 같은 거 보내서 신경 쓰이게 만들 순 없잖아.’
오토는 엘리제에게 편지라도 한 통 써보려다가, 이내 곧 그만두었다.
‘근데… 좀 보고 싶네. 그러면 안 되는데.’
오토는 어느덧 엘리제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그저 두렵기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곧 다시 뵙겠지.’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척! 척! 척! 척!
이오타 왕국군이 서쪽에 자리한 슬레인 왕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펄럭!
슬레인 왕국의 국경을 수비하던 요새 곳곳에서 새하얀 백기가 내걸리고, 성문이 활짝 열렸다.
제1군단장 조제프가 항복함에 따라서, 이오타 왕국군은 너무나도 손쉽게 국경을 넘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어디 그뿐인가?
조제프가 이끄는 슬레인 왕국군 제1군단은, 아예 이오타 왕국군에 합류해서 수도를 향해 진격하기까지 했다.
그와 동시에 슬레인 왕국의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일제히 들고 일어난 반란군들은, 즉시 수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슬레인 왕국군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고, 진격해오는 이오타 왕국군을 막지도 못했다.
그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후퇴에 후퇴만을 거듭했을 뿐.
덕분에 오토가 이끄는 이오타 왕국군은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고 슬레인 왕국의 수도 코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함께 수도를 포위한 반란군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오토에게 달려와 충성을 맹세했다.
“다들 환영합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신 만큼, 앞으로 여러분들께는 확실한 안전과 지위를 보장하겠습니다.”
오토는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크게 환영하며, 너그러이 품어주었다.
“이 늙은이를 믿고 현명한 결정들을 내려주어 정말 고맙네.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한 게야. 후우.”
전쟁터까지 따라온 와지르 대공이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내뿜으며 항복해온 자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미 망조가 들어 한 점 희망도 없는 왕조에 충성을 바친다 한들 남는 게 무엇이겠습니다.”
항복해온 자들은 와지르 대공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대단하다니까.’
오토는 와지르 대공의 영향력에 감탄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일렀다.
“수도를 방위하는 사령관이 누구인가?”
“예, 대공 전하. 욜슨 장군입니다.”
조제프가 대답했다.
“욜슨 장군에게 내 편지를 전하게. 내 한번 설득해 봄세.”
“예.”
와지르는 전령을 보내 슬레인 왕국의 수도 방어를 총책임지는 지휘관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날 밤.
“끌끌. 욜슨이 내일 아침 항복하겠다는구먼.”
“…맙소사.”
오토는 와지르의 영향력에 전율했다.
편지 한 통으로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의 항복을 유도해 내다니.
‘이게 영웅이지. 다른 게 영웅인가.’
과연 와지르는 영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적을 설득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취하는 능력이란, 그 어떤 무력보다 값지고 특별했다.
오토는 진정한 강자란 싸우지 않고도 이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왜 칼보다 펜의 힘이 강하다고 말하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 어떤 상대든 굴복시킬 수 있는 강한 무력?
물론 좋다.
하지만 그러한 무력을 갖춘 사람은 이 세계에 몇 되지 않을뿐더러,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도 없다.
무력으로 찍어 누르다 보면 반발을 사기 마련이고, 그 업보는 결코 작지 않다.
언젠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목이 잡히기 마련이다.
반드시.
하지만 와지르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회유, 포용, 설득으로 적을 굴복시킨다면 부작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와지르의 방식은 사람을 힘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마음을 얻는 것이었으니까.
“곧 백기가 내걸리고 수도가 열릴 게다. 왕궁을 지키는 이들은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게야. 왕이 죽지 않는 한 말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싸움이 될 게다. 네 녀석에게는 더더욱.”
와지르가 카미유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