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저는 괜찮습니다.”
카미유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역사상 그 어떤 전쟁도 이렇게 쉽게 풀린 적은 없습니다. 이미 기적은 벌어졌습니다. 이 이상을 바랄 수 없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카미유의 말마따나, 수도까지 진격해 오는 동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대륙 전쟁사(史)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
이만큼 희생을 줄이는 데 성공했으니, 카미유의 심적인 부담이 크게 줄어든 건 사실이었다.
물론 왕궁 안에도 카미유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많이 있긴 했지만.
“그래, 그거면 되었다.”
와지르 대공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업보를 청산한다고 생각하도록 하여라.”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상황 자체가 카미유의 업보나 다름없었다.
카미유는 현 국왕인 지그문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때문에 슬레인 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과거 카미유가 기사도를 내던지고 지그문트를 죽였다면, 결코 이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간 지그문트의 폭정으로 인해 죽어나간 슬레인 왕국의 충신이 몇 명인지 가늠조차 안 되었다.
덕택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
카미유에게는 지그문트를 처단하고, 슬레인 왕국의 현 왕조를 끝장내는 게 과거 자신의 업보를 청산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온 것은, 오직 오토 덕분이었다.
한낱 시골영지의 기사였던 카미유가 슬레인 왕국의 국왕인 지그문트를 끌어내릴 순 없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서 카미유는 오토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오토가 아니었다면, 업보 청산의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을 테니까.
“뭘 그렇게 빤히 봐?”
오토가 카미유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봐도 봐도 막 감탄이 나와?”
“…예?”
“자꾸 보면 닳으니까 적당히 봐. 그러다 내 얼굴 뚫어져.”
“…….”
“하여간 이놈의 미모란.”
오토가 엘리제가 선물해준 그 투박한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투덜거렸다.
‘준비나 해야겠군.’
카미유는 고맙단 말은 나중에 하고, 우선 곧 벌어질 전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2시간 뒤.
펄럭!
슬레인 왕국에서 백기가 내걸렸다.
척! 척! 척! 척!
오토는 이오타 왕국군―발틴 왕국군까지 포함된―과 반란군들을 이끌고 수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슬레인 왕국 수도방위를 책임지던 총사령관인 욜슨 장군이 오토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큰 결정 내려 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오토는 욜슨 장군을 몸소 일으켜주면서,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욜슨 장군님이 결단을 내려주신 덕분에, 양측 병사들 모두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망극하옵니다.”
“믿어주신 만큼, 크게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예, 전하. 소인 또한 앞으로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뒤이어 욜슨 장군을 포함한 장교단, 그리고 기사들이 오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오토는 그들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비록 현 국왕인 지그문트의 입장에선 희대의 역적들이나 배신자들이겠지만.
‘진짜 마법이네, 마법. 이름값으로 항복을 다 받아내고.’
오토는 와지르의 능력에 또 다시 감탄했다.
만약 와지르의 설득이 없었다면, 이들은 결코 오토에게 항복해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토는 이들과 숱하게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슬레인 왕국의 수도를 점령하기가 얼마나 힘드냐 하면, 최적화된 전략·전술을 찾아낼 때까지 수십 번이고 싸워야 했던 것이다.
‘됐어. 거의 다 왔다.’
오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좋아하기엔 일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힘내라! 힘!”
“환영해요오오!”
거리로 나온 수도의 백성들이 이오타 왕국군과 반란군들을 향해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보냈다.
“반드시 저 악마 같은 왕을 끌어내 주시오!”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소이다!”
전쟁이 벌어져서 수도가 함락되었는데도, 백성들은 이를 크게 반겼다.
슬레인인으로서의 정체성?
왕조에 대한 충성심?
혹은 애국심?
이곳 백성들에게 그런 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건 현 국왕인 지그문트가 얼마나 심한 폭정을 저질러왔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백성들은 새로운 왕조를 원하고 있었고, 그 왕조의 주인이 오토가 되리라는 건 기정사실.
“왕궁으로 진격한다.”
“예, 전하.”
오토는 슬레인 왕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서, 왕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왕궁의 방어는 그야말로 철옹성 같았다.
슬레인 왕국의 마지막 남은 충신들은, 왕궁을 거점 삼아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결사항전에 나섰다.
그들의 의지는 명확했다.
굳게 닫힌 성문만 봐도, 왕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일 정도였다.
“공격 명령을 내립니까?”
“아직.”
카미유의 물음에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저 문을 뚫고 들어가려면… 못해도 수백 명 이상이 죽을 거야. 어쩌면 천 단위가 넘을지도 모르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내가 해 볼게.”
“……?”
“병력 대기시켜. 내가 성문을 무너뜨리면 바로 공격할 수 있게.”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홀로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
‘해보자.’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꺼냈다.
대학살의 서에는 온갖 끔찍한, 금지된 마법들이 가득했다.
개중에는 대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마법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오토에게는 그런 강력한 마법을 쓸 능력이 없었고, 사용 가능한 주문은 정말로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문 하나쯤 부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했다.
“दह्यत.”ाम्
오토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스으으으!
뒤이어 대학살의 서에서 암흑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구르르르르르르르르!
거대한 화염구(火焰球) 수십여 개가 성문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굴러갔다.
화르르르르륵!
화염구들이 지나간 자리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랐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콰앙!
쾅!
퍼어어엉!
성문에 부딪힌 화염구들은 그야말로 대폭발을 일으키며, 성벽을 아예 무너뜨려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르르!
폭발의 여파로 인해 번져 나간 불길이 안에 있던 적들을 불태우면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주, 죽여 줘! 으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산 채로 불타는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 고통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폭멸(爆滅)의 화염구.
대학살의 서에 담겨 있는 금지된 마법 중 하나.
적들을 추적하는 화염구들을 소환, 닿는 순간 대폭발을 일으킨 뒤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화염계 마법이었다.
“……!”
“……!”
“……!”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토가 이런 어마어마한 위력의 화염계 마법을 구사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 폭멸의 화염구!”
“저런 화염계 고위급 주문을!”
한편, 쿤타치 가문의 마검사들은 오토가 폭멸의 화염구를 사용하는 걸 보고 전율했다.
쿤타치 가문은 검과 마법의 가문.
폭멸의 화염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오토가 쿤타치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라는 걸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림: 영혼 에너지를 흡수했습니다!]
[알림: 영혼 에너지를 흡수했습니다!]
[알림: 영혼 에너지를 흡수했습니다!]
(중략)
[알림: 영혼 에너지를 흡수했습니다!]
흐릿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오토는 알림창을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스으으으!
굳이 알림창을 보지 않더라도, 대학살의 서가 죽은 적들의 영혼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토는 레벨이 오른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상태창이 흐릿하더라도, 감으로 스스로의 성장을 알아챌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감각이 발달했다는 증거.
‘결국 상태창은 날 도와주는 보조적인 수단이었다는 건가?’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군.”
나지막한 목소리에 야만용사의 함성이 깃들었다.
“돌격하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오타 왕국군이 거센 함성을 내지르며 왕궁을 향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왕궁 안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오타 왕국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기사들과 슬레인 왕국군을 제압하며, 어전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선봉에 오토와 카미유가 있었다.
오토와 카미유는, 최전방에서 적들을 베어 넘기거나 제압하는 등 대활약하며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었다.
그렇게 아수라장이 된 왕궁을 쭉 가로지르다 보니, 어느새 어전 앞이었다.
“아무도 여길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와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길을 열어줄 수 없다!”
슬레인 왕국의 근위기사단이 오토와 카미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중에는 카미유의 선배, 후배, 그리고 동기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다만, 제압은 불가능했다.
‘강해. 질적 수준이 달라.’
오토는 슬레인 왕국의 근위기사단을 보고, 결코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사항전의 의지도 의지였지만, 슬레인 왕국의 기사들은 발틴 왕국의 기사들보다 더욱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정예들이었기에….
“길, 열어 줄게.”
오토가 카미유를 돌아보았다.
“예?”
“열어 줄 테니까, 그 뒤엔 알아서 해.”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학살의 서를 펼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건 좀 무섭지만.’
사실 오토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앞서 폭멸의 화염구를 사용하고, 야만용사의 함성을 증폭시키고, 더욱이 전투까지 치른 덕분에 당장에라도 픽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먼저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 한 마디에 아군과 적들이 죽고 사니까. 짊어질 수 있다면, 내가 짊어진다.’
오토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학살의 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물러서라.”
오토가 슬레인 왕국의 근위기사단을 향해 명령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크, 크윽”
“내 몸이… 으으으윽!”
슬레인 왕국의 근위기사단은 오토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춤주춤 물러나야만 했다.
전능(全能)의 힘.
사용자의 의지를 그대로 이루어주는 권능이었다.
‘어떻게…?’
카미유는 오토가 전능의 힘을 발휘하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하, 그 힘은….”
“난 괜찮으니까, 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말했다.
“가서 끝내.”
“…알겠습니다.”
카미유가 오토의 곁을 스쳐 어전 문을 열었다.
누구도 카미유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대학살의 서에 담긴 전능의 권능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덜컥!
어전 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카미유가 옥좌에 앉은 숙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카미유가 지그문트가 있는 어전으로 들어간 직후.
‘주저앉고 싶다.’
오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으며 버티고 섰다.
‘기절할 것 같아.’
전능의 권능을 사용한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대학살의 서에 담겨 있던 모든 영혼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뿐더러, 오토의 체력·생명력·마나도 바닥나 버렸다.
‘한동안은 어림도 없겠네.’
이제 한동안은 대학살의 서를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영혼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다시 대학살의 서를 사용하려거든 족히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은 죽여야 할 테니까.
그게 바로 대학살의 서가 무서운 점이었다.
이 엄청난 권능을 계속해서 사용하려거든 그만큼의 영혼 에너지가 필요할 테고, 그래서 사용자는 자기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르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힘의 유혹에 빠져들어서,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크윽!”
그때.
“죽… 어라아아아!”
한 기사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오토에게 덤벼들었다.
놀랍게도, 의지의 힘으로 전능의 권능을 이겨낸 것이다.
“전하!”
“앗!”
놀란 마검사들이 황급히 오토를 보호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촤라락!
기사의 검이 오토를 노렸다.
쩌엉!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들어 기사의 검을 막았다.
쨍그랑!
기사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갔다.
다음은 반격.
퍼억!
오토가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대학살의 서로 기사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쳐 버렸다.
“컥!”
기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대학살의 서는 그 자체로 훌륭한 방패이자, 흉악하기 짝이 없는 둔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