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어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국왕 지그문트만이 옥좌에 앉아 있었을 뿐.
그는 왕궁이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기까지 했다.
희대의 폭군이란 자의 광기란, 왕조의 몰락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큭큭… 큭큭큭큭!”
지그문트는 카미유를 보자마자 킥킥거렸다.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놀랍군, 정말 놀라워. 큭큭! 큭큭큭!”
“…….”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쯤은 알았는데. 내 목을 따러 오는 사람이 네놈일 줄이야. 정말 놀랍지 않나? 카미유?”
확실히, 기가 막힌 악연이긴 했다.
아무리 과거 악연으로 얽혔던 사이라지만, 카미유가 지그문트를 처단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낱 시골 영지의 기사인 카미유가 지그문트의 목을 따러 올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미유 본인조차도.
“기분이 어떻지? 옛 주군의 목을 따러 왔는데?”
카미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릉.
대신 검을 뽑아들고, 지그문트를 향해 겨눴다.
“난 한 번도 너의 기사였던 적이 없었다, 지그문트. 단지 너의 견습기사로서 1년 동안 섬긴 것일 뿐.”
“큭큭큭! 우리의 인연을 부정하는 건가?”
지그문트가 웃었다.
“네놈은 나를 살렸고, 나는 그 덕분에 이 빌어먹을 왕좌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도 내 기사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건가?”
카미유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그문트를 섬기던 시절은 카미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시간.
공연히 말을 섞어 봤자 평정심만 흐트러질 뿐이었다.
“검, 들어라.”
카미유가 지그문트를 향해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재미없는 놈이로군, 너는.”
지그문트가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자신의 대검을 뽑아들었다.
“이 감동적인 순간에까지도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야 직성이 풀리겠나?”
“…….”
“뭐, 상관없겠지. 마지막 가는 길, 길동무가 네놈인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저벅저벅.
지그문트가 계단을 내려오며 슬쩍 대검을 들었다.
“적어도 칼부림만큼은 조금이나마 나를 재밌게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카미유.”
그와 동시에 지그문트가 대검을 휘둘렀다.
촤라라라라라!
강력한 검풍이 휘몰아치며 카미유를 덮쳐 갔다.
그렇게 과거 주종관계로 얽혔던 자들은, 서로의 목숨을 걸고 최후의 결투를 시작했다.
* * *
지그문트의 강함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본래 태생부터 천재적인 검술 실력을 지니고 태어났던 지그문트는, 수년간 폭정을 일삼으며 쾌락과 향락에 절여져 있었음에도 카미유를 압도했다.
그렇게 카미유는 한동안 제대로 된 공세조차 펼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위기에 몰렸다.
그러던 중.
“제법 강해졌다만.”
지그문트의 대검이 카미유를 후려쳤다.
“커헉!”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카미유.
“네놈이 아무리 발악해 봐야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쯤은 알 텐데?”
“크윽!”
“설마 마지막까지 재미없게 굴 건 아니겠지? 카미유?”
지그문트가 카미유를 향해 이죽거렸다.
“…네놈의 재미를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다.”
카미유가 몸을 일으켰다.
파직!
파지직!
카미유의 검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광속검.
쿤타치 가문의 비전의 검술 중 하나로, 드높은 경지에 오르면 그야말로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내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왔다.”
“큭큭큭! 나를 왕위에 올린 업보를 말하는 건가?”
“너를 처단함으로서… 지난날 내 업보를 반드시 청산할 것이다.”
다음 순간.
팡!
카미유가 지그문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화들짝 놀란 지그문트.
촤라락!
어느새 코앞에 나타난 카미유가 지그문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화학!
지그문트의 가슴팍에서 시뻘건 피가 튀어 올랐다.
힘에서는 밀릴지언정, 속도에서만큼은 결코 밀리지 않는 검.
그게 카미유의 검이었고, 광속검이었다.
‘보인다.’
카미유의 눈에 지그문트의 빈틈이 들어왔다.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카미유는 수련해 온 대로, 광속검의 움직임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버러지 주제에.”
지그문트가 다급히 반격을 시도했지만, 카미유의 공격을 방어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간 혹독한 수련을 거치며 조금씩 깨달음을 얻어온 카미유의 검술이 활짝 만개하는 중이었다.
무의식 속에 녹아들고 있던 수련의 효과가 목숨을 건 결투에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쒜엑!
카미유의 검이 한 줄기 빛살처럼 쏘아져 지그문트를 노렸다.
“어ㄷ….”
푸욱!
카미유의 검이 지그문트의 가슴 정중앙을 관통했다.
“……!”
지그문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서서히 무너져 갈 뿐이었다.
털썩!
지그문트가 무릎을 꿇으며 허물어졌다.
“이 빌어먹을 왕조… 도.”
지그문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내 대에서… 끝이… 나는군. 큭큭. 이 또한 내ㄱ….”
카미유는 지그문트의 유언을 허락지 않았다.
쑤욱!
카미유가 지그문트의 가슴팍에 박힌 검을 빼내어, 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툭.
데구르르르.
지그문트의 잘린 머리가 어전 바닥을 나뒹굴었다.
카미유는 조용히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지그문트가 왜 폭군이 되었는지, 그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왜 광기에 사로잡혔는지.
카미유는 알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악인의 사연 따위 듣고 싶지 않다.”
카미유가 지그문트의 시체를 향해 씹어내듯 내뱉었다.
“그냥 조용히 죽어라.”
카미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어전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어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토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 카미유,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슬레인 왕국의 국왕 지그문트를 처단했습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카미유가 오토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진정한 주군이자 단 하나밖에 없는 주군을 향해.
* * *
“결국 해냈네.”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이기기 벅찬 상대였을 텐데.”
지그문트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
사실 광속검을 익히지 않았다면, 카미유의 승산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카미유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중상을 입지 않았다 뿐이지, 엉망진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건 결투에서 승리한 대가는 달콤했다.
‘확실히 강해졌어.’
오토는 카미유가 지그문트와의 결투에서 각성함으로써 영웅의 자격을 획득했다는 걸 간파했다.
카미유를 휘감은 상서로운 빛.
오직 오토의 눈에만 보이는 효과가 카미유의 각성을 증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
오토가 카미유에게 젤리를 내밀었다.
“일단 먹고 회복해.”
“…괜찮습니다.”
카미유는 오토가 내민 젤리를 한사코 거절했다.
젤리의 주원료(?)가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중상이 아니고서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주원료를 생산(?)해내는 사람의 얼굴을 오다가다 한 번씩 보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아, 좀. 그러다 몸 상해. 먹으라니까.”
“전 정말 괜찮습니다.”
“걱정돼서 그래! 걱정돼서!”
“이 정도 부상은 일반 포션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다 후유증 남는다고!”
“후유증 없는 기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잘 치료해볼 만합니다.”
“그냥 먹어!!!”
“싫습니다.”
티격태격.
오토와 카미유는 젤리를 먹냐 마냐를 놓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
“…….”
“…….”
이를 지켜보던 마검사들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굳이 똥으로 만든 젤리를 먹이려는 오토나.
어떻게든 먹지 않으려고 버티는 카미유나.
제3자의 시각에서 보면, 둘은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나름 감동(?)적이고 비장한 상황이었건만.
“먹어.”
오토가 카미유의 코앞까지 젤리를 들이밀었다.
“싫습니다.”
“군주로서 명한다. 기사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먹어.”
“…….”
“명령이라 했다.”
“…예.”
결국, 카미유는 오토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젤리를 입에 넣고야 말았다.
“어어? 주군의 은혜에 그 표정이 맞아? 어? 똥 씹은 표정 짓지?”
“…….”
“표정 안 펴?”
카미유는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똥을 씹었는데 똥 씹은 표정이 나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윽.’
입 안에 든 젤리를 씹지 않고 머금고 있느라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쭈. 씹어.”
“…….”
“안 씹어? 자꾸 버티면….”
꿀꺽!
카미유는 차마 젤리를 씹지 못하고, 그냥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그 끔찍한 식감과 냄새를 도저히 참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쳇.”
오토는 카미유가 젤리를 꿀꺽 삼킨 걸 보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그걸 또 삼키네.”
“…….”
“기껏 생각해서 줬더니. 그 귀한 걸.”
오토는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카미유에게 말했다.
“이제 가 봐.”
“어딜 가란 말씀이십니까?”
“이사벨.”
“……!”
“보고 싶지 않아?”
오토가 과거 카미유의 연인이었고, 지금은 슬레인 왕국의 왕비인 이사벨을 언급했다.
“저는….”
카미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볼 자격도, 자신도 없습니다.”
“뭐래.”
오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달리 선택권이 있었어? 형한테?”
“…….”
“서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알면 가서 빌어. 그땐 정말 미안했다고. 지금이라도 용서를 빈다고. 늦게나마 다시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오토가 카미유에게 조언했다.
“다시 시작하고 말고는 나중 문제고. 늦게라도 사과해.”
“그래도… 되는 겁니까?”
“에라이.”
오토가 눈을 부라렸다.
“그럴 거면 그거 떼라! 떼!”
“…….”
“그럴 용기 하나 없어? 목숨 걸고 싸울 용기는 있어도?”
카미유는 오토의 말에 한동안 고민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카미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와~”
“…….”
“늦었으면 뭐 어때? 지금이라도 서로 행복하면 됐지.”
그렇게 말하는 오토의 표정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라이. 저 인간이 유부남이 될 거라니. 쳇.’
오토는 카미유와 이사벨 왕비의 미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경험상 카미유와 이사벨이 맺어질 확률은 100퍼센트에 달했다.
심지어….
‘졸지에 삼촌까지 되게 생겼네. 어휴. 내가 삼촌이라니. 나한테 조카가 생기다니.’
카미유와 이사벨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기도 했다.
즉, 슬레인 왕국의 정복이야말로 카미유란 인물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거의 업보를 청산한 것으로도 모자라 옛 연인을 되찾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까지 보는 행복까지 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게임과 현실은 다르기에, 100퍼센트 장담할 순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 * *
카미유는 차마 이사벨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머뭇머뭇.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카미유는 문 앞에서 서성였다.
“…….”
“…….”
“…….”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그들도 카미유를 알고.
카미유도 그들을 알고.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 분위기는 매우 어색했다.
어차피 대세가 기울어진 이상 싸움이 벌어질 일은 없었지만, 차라리 싸우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덜컥.
문이 열리고.
흠칫.
놀란 카미유가 뒷걸음질 쳤다.
쿵쾅쿵쾅!
카미유의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 두방망이질을 쳤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걸음하셨나요.”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사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