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191화 (192/401)

191화

“…그건.”

카미유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를 죽이려고 오신 건가요.”

“그렇지 않다.”

카미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죠.”

이사벨이 물었다.

“선배는 저를 버리셨어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저를 찾아온 건가요. 죽일 게 아니라면.”

“난 단지.”

카미유가 대답했다.

“너를 보려고 왔을 뿐이다.”

“우리가 다시 볼 이유가 있었던가요.”

이사벨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폭군의 왕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목을 매달아 죽고 싶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지그문트는 곁에 있는 이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존재.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기 마련이었다.

만약 이사벨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기사 출신이 아닌 그저 평범한 귀족가의 영애였다면, 목을 매달아도 진작 매달았을 터.

그러니 카미유를 원망하는 마음도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사벨의 모습은 꽤나 피폐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 함께 도망갔더라면….

“저를 버리고 가셔서 행복하셨나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카미유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껏 고향으로 돌아갔건만, 군주이자 동생인 오토가 희대의 악덕영주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저, 늦게나마 그때 미안했단 말을 전하고 싶어서 왔다.”

“그런가요.”

“그래, 그것뿐이다.”

카미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전하께서 네 처우에 신경 써 주실 것이다. 지옥에서 해방되었으니… 앞으로는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

“끝까지 비겁하시네요, 선배는.”

“…….”

“보고 싶었다고,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돼서 기쁘다고. 그 한 마디 못해 주시는 건가요.”

“해 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염치가 없어 말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군요.”

“미안하다.”

“제가 이렇게 해방되었는데, 이제 우리 사이를 방해할 사람이 없는….”

카미유가 이사벨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그리고 그땐 미안했다.”

“이제 와서.”

“그때 내가 했던 선택에 대한 대가는… 앞으로 얼마든지 치르겠다.”

카미유는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이사벨의 곁에서 평생.

“각오하세요.”

이사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 갚아 줄 테니까.”

“얼마든지.”

카미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이라도 이사벨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 * *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저벅저벅.

오토가 슬레인 왕국의 어전에 들어서 옥좌에 앉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그문트의 것이었던 옥좌는, 어느새 오토의 것이 되어 있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이오타 왕국군 수뇌부들.

그리고 슬레인 왕국의 대소신료들이 오토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옥좌에 앉은 오토가 신하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폭군을 처단하고 새로이 왕위에 오른 만큼, 앞으로 선정을 펼쳐 태평성대를 이룩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물론 오토의 발언은 으레 그렇듯 그저 겉치레에 불과했다.

‘태평성대는 무슨. 휴우.’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 세계에 태평성대는 없을 예정.

당장 이번 가을부터 온갖 자연재해가 대륙을 휩쓸 테고, 가장 거대한 나라인 아라드 제국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할 터.

그렇게 되면, 그 어떤 나라라 할지라도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서 최대한 힘을 비축하는 것밖에 없겠지.’

오토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에 점령한 슬레인 왕국과 발틴 왕국을 안정화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발틴 왕국이야 국왕인 체흐 4세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충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도 명분이 없다.

그러나 슬레인 왕국은 달랐다.

몇몇 지방 귀족들이 이번 사태를 틈타 왕위를 차지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이미 사라진 왕조에 끝까지 충성하는 독립 영지의 영주들도 꽤 됐다.

이대로 슬레인 왕국과 발틴 왕국을 잘 흡수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내정에 매달려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다스릴 땅덩어리가 넓어지고, 인구가 많아진 만큼 이런저런 문제들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테고.

그나마 행정의 천재인 와지르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 많은 행정업무를 혼자 돌볼 뻔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전군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합니다. 아무칸.”

오토가 아무칸을 돌아보았다.

“항시 출동할 수 있도록 기병대를 대기시켜 놔.”

“예!”

슬레인 왕국의 대소신료들은, 그 모습에 크게 놀랐다.

‘세상에. 저 사납기로 소문난 유목민 전사가 꼼짝을 못하는구나.’

‘어찌 저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 부족장의 충성을 얻어내셨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헬무트 후작님.”

“예, 전하.”

“현 시간부로 국경으로 가십시오. 그곳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슬레인 왕국의 대소신료들은 오토가 변경백으로 유명한 헬무트마저도 신하로 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검과 마법의 가문인 쿤타치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 부족장과 헬무트 변경백까지 신하로 두었다?

슬레인 왕국 대소신료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와지르에게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반신반의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듯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던 것이다.

“한동안 어수선할 테지만, 꾹 참고 혼란스러운 시국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최선을 다해 협조해 주시고,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하들이 일제히 오토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 * *

그렇게 발틴 왕국에 이어 슬레인 왕국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한 오토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한동안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다.

한꺼번에 두 개의 나라를 집어삼킨 만큼, 행정업무가 쏟아지다 못해 재앙 수준이었다.

만약 와지르 대공이 없었다면, 오토는 몇 년이고 행정업무에만 매달리다가 꽥! 하고 과로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으. 죽겠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서야 집무실을 나선 오토는, 죽을 상을 하고는 터벅터벅 침소로 향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카미유의 물음에 오토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없어, 끝이.”

“고생하십니다.”

“고생은 무슨. 다 내가 자초한 일인데.”

오토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나저나 이사벨이랑은 어때?”

“예, 뭐.”

카미유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계속 사과하고 있습니다.”

“고생이 많네.”

“예?”

“엄청 시달리고 있는 거 같은데?”

“다 제 업보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니 카미유도 그간 쌓였던 서운함 감정을 받아주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보인다, 보여.”

“뭐가 보인다는 말씀이십니까?”

“평생 공처가로 찍 소리도 못하고 잡혀 살 거 같아서.”

“저 말입니까?”

“응.”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뭐만 하면 그때 당신이 나를 버린 거 아니냐면서 갈굴 거 같은데?”

“…….”

“하긴. 그 정도면 평생 갈굴 거리긴 하지. 후후.”

오토가 다 안다는 듯 놀리듯이 말하자 카미유의 표정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왜 저랑 도망 안 갔어요?’

‘제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알아요?’

‘선배한테는 기사도가 저보다 중요한 거겠죠.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사실 카미유는 지난 며칠 동안 이사벨의 갈굼에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그걸 평생 동안 당해야 한다니….

하기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자가 돼 가지고 꼼짝도 못하는 거 보소? 후후.”

“그러는 전하는 아닙니까?”

“으응?”

“찍 소리 못하는 건 전하도 마찬가지잖습니까.”

“…….”

“요새 엘리제 아가씨께서 뜸한 것 같은데, 방심하지 말고 조심하십시오.”

“조, 조심하라고?”

“요즘 통 수련을 못 하셨지 않습니까.”

“수련할 시간이 어딨어?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데.”

“슬슬 아가씨께서 오실 때도 됐는데, 그러다 큰일 나시는 거 아닙니까? 아가씨께서 바빴단 핑계를 들어주실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헉!”

오토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제는 무(武)에 관해서는 타협이 없는 인물이었다.

만약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한 흔적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오싹!

오토는 엘리제의 화난 모습을 상상했다가, 너무나도 무서워서 흠칫 몸서리쳤다.

‘실망이다.’

‘그간 이 정도밖에 성장하지 못한 건가?’

‘평소에 수련을 하긴 하나?’

오토는 서릿발처럼 추궁하는 엘리제의 모습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수련하러.”

“예? 안 주무십니까?”

“그 얘길 듣고 어떻게 자러 가? 아예 얘길 하지 말던가.”

“…….”

“딱 2시간 만이라도 수련해야겠어. 이거 어디 무서워서 잠이 오겠냐고. 으으으.”

그렇게 오토는 지친 걸음으로 수련장으로 향했다.

‘혼나는 것보단 나으니까.’

아무리 피곤하다 한들 엘리제한테 혼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하는 오토였다.

* * *

한편, 이오타 왕국이 성공적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는 동안 오버하우저 상단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버하우저 상단은 밀무역선 폭파 사건으로 인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손해를 보았고,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산을 모조리 헐값에 팔아 버린 상황이었다.

심지어 팔아 버린 자산들 중에서는 훗날 대업을 이루기 위해 아껴두었던 것들도 많았다.

즉,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륙 경제를 움켜쥐어 다시금 대륙통일을 이루려던 아르곤 대제의 계획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제아무리 아르곤 대제라 할지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금 없이는 대륙 경제를 주무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르곤 대제는 고민했다.

‘이대로라면 망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을.’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한들 지금의 자금난을 해결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바로 그때.

“폐하, 근심이 깊어 보이시옵니다.”

젊은 상인 글렌이 아르곤 대제를 찾았다.

“근심이 깊지 않게 생겼느냐.”

글렌을 대하는 아르곤 대제의 표정과 말투에는 다분히 날이 서 있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인 밀무역에 손을 대라고 조언했던 장본인이 바로 글렌이었기에, 그를 바라보는 아르곤 대제의 시간이 고우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밀무역선 폭파 사건으로 인해 우리 상단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느냐?”

“망극하고, 또 망극하옵니다.”

“배후는 찾아내었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으로 아옵니다.”

“이런 무능한 놈들 같으니.”

“…….”

“짐의 무덤 도굴 사건도 그렇고, 이번 밀무역선 폭파 사건도 그렇고. 분명히 같은 놈들의 소행이거늘.”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래, 어찌 짐의 심기를 어지럽히려 하느냐.”

“당치도 않사옵니다.”

글렌이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신은 단지 페하께 도움이 되고자 할 뿐이옵니다.”

“어떤 도움을 말하는가.”

아르곤 대제는 과거 제국을 일구었던 창업군주답게, 매우 포용적인 자세로 글렌의 의견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곧바로 부하를 내칠 정도로 어리석은 군주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예, 폐하.”

글렌이 고개를 조아렸다.

“소신이 판단하기에, 현재 우리 상단의 힘만으로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옵니다.”

“계속하라.”

“아뢰옵기 망극하고, 또 황송하오나. 이럴 땐 자력으로 재기하는 것보다 외부의 힘을 빌리시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외부의 힘이라…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이용하자는 것이냐?”

“그것은 아직 이르옵니다.”

“하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아직 폐하께서는 홀몸이시옵니다.”

“설마.”

아르곤 대제가 글렌의 말뜻을 이해하고 표정을 굳혔다.

“정략결혼을 해서 처가의 힘을 빌려보라는 말이더냐?”

“예, 폐하.”

글렌이 고개를 조아렸다.

“북부대공의 손녀 엘리제 역시 아직 홀몸이질 않사옵니까? 그녀를 취하신다면, 북부대공의 후원을 받아 손쉽게 재기하실 수 있을 것으로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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