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저와 춤추기….”
“싫다.”
엘리제가 재차 아르곤 대제를 거절했다.
“하하하.”
아르곤 대제는 철벽같은 거절에 당황했다.
어떻게 이렇게 딱 잘라서 거절할 수 있는지….
‘나를 거절해?’
아르곤 대제는 자존심이 상했다.
또한, 모멸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르곤 대제는 분노를 드러내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제에게 물었다.
“어째서 저와 춤추기를 거절하시는 겁니까? 혹시 약혼자 분이 신경 쓰이셔서 그런 겁니까? 그런 거라면….”
“그게 아니다.”
“그럼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레이디 엘리제?”
“그냥 싫다.”
“…….”
“싫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 순간.
“……!”
아르곤 대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제의 눈빛에 그만 숨이 멎어버릴 뻔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질척거렸다간 당장에라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 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짐을 압박해?’
아르곤 대제는 엄청난 강자인 만큼, 엘리제의 기세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엘리제의 눈빛은 경고였다.
선을 넘지 말라는.
“아까부터.”
엘리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주변을 맴돌더군.”
“……!”
“시선이 느껴졌다.”
아뿔싸.
아르곤 대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내게 접근하려고 기회를 엿봤는지는 모르겠다만.”
“…….”
“어떤 생각을 하던 그건 그대의 자유니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마라. 나는 그게 불쾌하다.”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곤 대제가 이를 악물고 딱 잡아 땠다.
“저는 단지 오토 드 스쿠데리아 전하와 안면이 있고, 그분의 약혼녀인 레이디와 안면을 트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예, 그뿐입니다.”
“알겠다.”
“…….”
“어쨌건 안면을 텄으니 같이 춤을 출 이유는 없겠지. 그럼, 만나서 반가웠다.”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르곤 대제를 지나쳐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부들부들…!!!
홀로 남겨진 아르곤 대제는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짐을 거절해? 이 개 같은 년!’
아르곤 대제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거절당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나, 이성에게는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돈과 권력.
수려한 외모.
청산유수와 같은 언변까지.
항상 원하는 이성을 차지해 왔던 아르곤 대제로서는, 엘리제의 단호한 거절에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어디 두고 보자.’
아르곤 대제가 이를 갈았다.
‘짐이 네년의 약혼자란 놈을 손에 쥐고 흔든 다음, 보란 듯이 파멸시켜 보일 테니.’
아르곤 대제는 멀어지는 엘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수를 다짐했다.
* * *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오토는 꽤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오토는 저 변방에서부터 세력을 키워 순식간에 발틴 왕국과 슬레인 왕국을 점령해 버린 신흥강국의 젊은 군주.
그런 오토가 주목을 받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토는 고귀한 쿤타치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인 데다가, 잘츠부르크 가문의 엘리제와 약혼한 사이.
거기에 더해 수려한 외모까지.
오늘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오토는 혜성처럼 나타난 신성(新星)이었다.
덕분에 오토는 꽤 많은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친분을 다지게 되었다.
그 중요하다는 인맥을 자연스레 쌓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했느냐?”
황녀 로웨나가 오토에게 접근해 왔다.
“아, 예.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나는 로웨나 반 아라둔이라 한다. 황제 폐하의 여동생이다.”
“예, 로웨나 전하.”
로웨나 역시 100인의 군주 중 하나였기에, 오토가 그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
‘엄청난 야망을 가진 사람이지.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고. 능력도 뛰어나. 킬리언 2세가 아니라 로웨나가 황제가 됐다면 세상이 달라졌을 텐데.’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웨나와 통성명하고, 약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혜성처럼 출몰한 신흥강국의 젊은 군주라. 거기에 잘츠부르크 대공의 손녀사위라니. 대제국 아라드에 힘이 될 인재로군, 그대는.”
“과찬이십니다.”
“언제 한번 따로 찾아올 수 있겠나?”
“예?”
“이오타는 신흥강국이라 아직 기반이 잡히지 않았겠지. 후원이 필요할 텐데?”
그 순간.
‘벌써 포섭이 들어온다고?’
오토는 로웨나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현재 로웨나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중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오토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인재였다.
‘나는 신흥강국의 군주. 북부대공의 손녀사위. 거기에 더해 쿤타치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 날 자기 신하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해.’
오토 스스로 생각해 봐도, 로웨나가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오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예, 언제 한번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좋군.”
로웨나가 흡족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예?”
“내 동생들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들과 가까이 해 봤자 그대에게 득 될 건 없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나는 테르테미안 반 아라둔이다. 선황 폐하의 셋째 아들이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로웨나에 이어 테르테미안도 오토에게 접근해 왔다.
“파라곤 반 아라둔. 선황 폐하의 막내아들이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아,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이야기하십시오.”
파라곤까지 접근해 오는 바람에, 졸지에 오토는 모든 황족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 유능한 신하와 더 큰 세력을 거느리기 위한 황족들 사이에 끼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오토는 차례대로 로웨나, 테르테미안, 파라곤에게 시달린 뒤에야 겨우 풀려나 엘리제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약혼자, 피곤해 보인다.”
“예, 뭐.”
오토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이래저래 피곤하긴 하네요.”
“조심해라.”
엘리제가 오토에게 주의를 주었다.
“황족들과 어울리는 건 위험한 행동이다.”
“어째서죠?”
“그들은… 아니다.”
엘리제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두면 된다.”
“네.”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잘츠부르크 가문에서도 황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다고 판단하고 있겠지. 엘리제 님도 그래서 나한테 귀띔해 주신 거겠지.’
오토는 엘리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가문은 철저히 중립을 지켜야 하지. 아니,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겠지. 장벽을 도맡고 있으니까. 내전에는 끼어들 생각도 없고.’
황족들에게 있어 잘츠부르크 가문은 가장 매력적인 세력이었다.
만약 잘츠부르크 가문의 힘과 세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황제가 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물론 그랬다간 북부 장벽의 방어가 허술해지겠지만, 일단 황위에 오르고 보려는 황족들에게 그런 게 신경 쓰일 턱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잘츠부르크 가문과 혈연관계를 맺을 오토가 떡하니 나타나 주었으니, 황족들로서는 군침이 줄줄 흐를 수밖에.
‘맙소사. 이거 죄다 변수잖아.’
오토는 지금 상황 자체가 예상과는 한참 빗나가 있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게임으로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플레이했을 땐 엘리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진행해 나갔다.
그래서 이러한 자리에 초대받지도 못했고, 황족들과 안면을 틀 기회도 없었다.
먼 훗날 적으로 만났을 뿐.
하지만 훗날의 적들이 지금은 호의를 표시하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어쩌면…….
‘빌드를 통째로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오토는 자신이 개발해낸 최적화된 빌드를 버리고, 앞으로 전혀 다른 방향을 잡고 행동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 아라드 제국의 내전.
그 내전을 의도대로 제어해 나갈 수만 있다면…….
‘중간 과정들을 건너뛰고 시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토는 전략적으로 큰 깨달음을 얻고, 고민에 빠졌다.
* * *
한편, 아르곤 대제는 엘리제로부터 거절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굴욕을 당했다.
“저와 추시겠습니까? 레이디?”
“죄송하지만 안 되겠네요.”
아르곤 대제는 다른 유력자들의 딸들에게 춤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오버하우저 상단이 몰락하기 직전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제국의 귀족들은 쉽게 아르곤 대제의 접근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상대를 해 줄 텐데, 망하기 일보 직전의 상단과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교계의 냉혹한 법칙이었다.
재력, 권력, 명성이 출중하지 못하면 철저히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냉정한 세계가 바로 사교계인 것이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짐을… 무시하고… 따돌린다… 감히 짐을…? 대제국을 건설했던 나 아르곤을?’
수 차례의 거절 끝에, 아르곤 대제의 분노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고야 말았다.
쨍그랑!
오죽했으면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잔을 손으로 깨 버렸을 정도.
“뭐야.”
“왜 저래.”
“상단이 망했다더니 어지간히도 속이 쓰린가 보군.”
“쯧쯧. 가서 빚잔치나 할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귀족들은 손에서 잔을 깨뜨리는 바람에 피를 철철 흘리는 아르곤 대제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오토는 고블린 상인 에고와 함께 그 광경을 몰래 훔쳐보며 즐거워했다.
에고 역시 전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는 거상이니만큼, 이 연회에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진짜 개빡쳤나 본데요?”
“쿄쿄쿄! 그렇습니다요! 평정심을 잃은 게 분명합니다요! 쿄쿄!”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쿄쿄쿄!”
사실 아르곤 대제가 이렇게 기피대상이 된 이유는, 오토가 에고를 시켜 수작질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은근슬쩍 오버하우저 상단이 처한 재정적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흘려서, 귀족들로 하여금 아르곤 대제를 피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귀족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이야기를 듣고 아르곤 대제의 의도를 금세 파악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너 어떡하냐? 쯧쯧.’
오토는 부들부들 떠는 아르곤 대제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너 잡아 죽이려는 사람이 한 트럭은 되는데?’
근처 테이블에 자리한 아리엘이 저 멀리 아르곤 대제를 노려보며 포크를 움켜쥐고 있었다.
오토, 카이로스, 아리엘, 그리고 영혼기사들까지.
만약 아르곤 대제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소름 끼쳐 할지, 상상만 짜릿해지는 기분이었다.
* * *
연회에서 나름 이런저런 소득을 올린 오토 일행은, 잘츠부르크 가문의 별장으로 가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굳이 호텔에서 머물 것 없이, 아라드 제국의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잘츠부르크 가문의 별장에서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이미 쿤타치 가문과 잘츠부르크 가문은 서로 혈연으로 맺어지는 게 기정사실이 된 상황인지라,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음 날… 이 아니라.
꼭두새벽.
“전하, 일어나십시오.”
카미유가 오토를 깨웠다.
“…으응?”
오토는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깜깜한데…? 음냐음냐.”
오토는 눈꺼풀이 무거워서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아가씨의 오라버니들이 전하를 뵙고 싶답니다.”
“…이 새벽에?”
오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같이….”
바로 그때.
덜컥!
문이 열리고, 엘리제의 오빠들이 우르르 들어와 오토에게 말했다.
“매제! 아직도 한밤중인가!”
“수련하러 가야지!”
“아직도 자나? 설마?”
오토는 새벽부터 일어나 수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엘리제의 습관이 잘츠부르크 가문의 가풍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감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