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오버하우저 상단으로 복귀한 아르곤 대제는 극도로 분노해 있었다.
아라드 제국의 건국기념연회에서 번번이 개무시를 당한 것에 대한 굴욕감과 모멸감으로 인해, 아르곤 대제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
“…….”
“…….”
오버하우저 상단의 간부들은 입을 꽉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아르곤 대제가 언제 폭발할지 몰랐으므로….
특히나, 이번 계책을 냈던 글렌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다.
물론 글렌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고 좋은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과가 대참사 수준이라, 입장이 영 난처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런 치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아르곤 대제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정이 극도로 억눌린 목소리라, 그 압박감과 위압감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흐읍!’
‘큭!’
‘수, 숨이… 안 쉬어진다.’
오죽했으면 회의에 참석한 간부들이 가슴팍을 움켜쥐고 괴로워했을까.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시한폭탄.
그게 지금 아르곤 대제의 상태였다.
“하지만 분노한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극복될 수는 없는 법.”
놀랍게도, 아르곤 대제는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대처할 줄 아는 것.
전생에 대제국을 일구었던 황제였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상단의 모든 자산을 처분하라. 또한, 남은 자산을 처분해서 남은 자원은 모두 군자금으로 삼는다.”
그 순간.
“……!”
“……!”
“……!”
오버하우저 상단의 간부들은 아르곤 대제의 발언에 크게 놀랐다.
군자금이라니?
갑자기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폐, 폐하.”
글렌이 조심스레 아르곤 대제에 물었다.
“어찌 갑자기 군자금을 마련하라 하시옵니까?”
“로우레딘 왕국으로 갈 것이다.”
“……!”
“로우레딘 왕국은 현재 전국 방방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중이고, 여러 군벌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왕국군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애쓰고는 있으나,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아르곤 대제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우리는 그간 모은 군사력과 상단의 자산을 처분해 마련한 군자금을 이용해 로우레딘 왕국의 반란에 끼어들 것이다. 현재로서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은 이것뿐이다.”
그러자 오버하우저 상단의 간부들이 크게 놀라며, 아르곤 대제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살길을 찾아내다니.
과연 전생에 대제국을 일군 군주는 다른 모양이었다.
“지금 즉시 로우레딘 왕국으로 가서, 군벌을 형성할 준비를 갖추라. 우리의 모든 인적자원과 자금을 로우레딘 왕국을 점령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아르곤 대제의 말이 끝나고.
“과연 현명하시옵니다! 폐하!”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폐하의 능력이라면 능히 로우레딘 왕국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를 여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오버하우저 상단 간부들은 진심으로 아르곤 대제의 계책에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곤 대제 역시 과거 혼란스러운 난세를 평정했던 군벌 출신.
백성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데에는 도가 튼 인물이었다.
민심을 사로잡는 법도 잘 알고 있었을뿐더러, 전략·전술 등 군사적 역량 또한 누구보다 뛰어났다.
과거 카이로스가 아르곤 대제를 의형제로 삼으며,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아예 군권까지 맡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두 명심하라.”
아르곤 대제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간부들에게 경고했다.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기회다.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알겠는가?”
“예! 폐하!”
오버하우저 상단의 간부들은 아르곤 대제의 엄명에 따라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아르곤 대제가 로우레딘 왕국의 왕위에만 오른다면, 상단을 운영하면서 입은 손해쯤은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 * *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한 오토는 와지르 대공의 도움을 받아 점령지역을 안정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슬레인 왕국의 수도인 <작센>을 수도로 삼고,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런 뒤 카슈미르 지방에 살고 있는 이오타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 과정은 행정적으로 매우 복잡했으며, 또한 엄청난 재정이 투입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토는 와지르 대공의 도움을 받아서, 그 작업을 물 흐르듯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토는 기존 이오타 왕국군과 슬레인 왕국군, 발틴 왕국군을 통합시키기 위한 작업에도 나섰다.
국가의 정세를 가장 손쉽게 안정화시키는 방법이 군권을 틀어쥐는 일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으니까.
그동안 아리엘은 오토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언제 가?”
“언제까지 기다려?”
“카이로스한테 언제 데려다주는 거야?”
“우리 언제 카이로스한테 가?”
아리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토를 찾아와 보챘다.
언제는 450년 넘게 기다렸으니 며칠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라던 건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했다.
“언제 가!!! 언제 가냐고!!! 카이로스 그 자식한테 데려다준댔잖아!!!”
하루는 잔뜩 술에 취한 아리엘이 집무실까지 찾아와 깽판을 부리는 바람에, 작은 소동마저 일어났을 정도였다.
“놔! 놓으라고! 이 새끼들아! 나 카이로스 보러 가야 한단 말야! 놔아아아!”
오토는 기사들에 의해 끌려 나가는 아리엘을 바라보며,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에 저런 엘프가 있을 줄이야….
“진짜 여자 카이로스잖아.”
“제가 볼 땐.”
카미유가 말을 보탰다.
“카이로스 어르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그래?”
“어젯밤에 주점에서 다른 손님들과 패싸움을 벌였답니다.”
“에이.”
오토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예쁜 엘프 누님이 혼자 술 마시고 있으니까 껄렁껄렁한 놈들이 시비를 건 거겠지. 그러다 두들겨 맞았고.”
“아닙니다.”
“으응?”
“이미 주점에 들어온 순간부터 잔뜩 취해 있었던 데다가, 단순히 눈을 마주쳤단 이유로 사람을 팼답니다.”
“…….”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기사들이 제때 출동하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토는 카미유의 보고를 듣고 머리가 다 지끈거려서, 얼굴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과거 카이로스가 괜히 아리엘을 피해 도망쳐 다녔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으으. 으으으으. 카이로스 하나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여자 카이로스까지 상대해야 한다고?”
“다 전하께서 자초하신 일 아닙니까.”
“그건 그런데.”
오토가 대답했다.
“그래도 재밌잖아.”
“예…?”
“카이로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겠어?”
“…….”
“전생엔 도망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번 생엔 안 되지. 흐흐흐.”
순간 카미유는 오토의 머리 위에 자그마한 뿔 하나와, 엉덩이 뒤쪽에 악마의 꼬리 하나가 돋아난 상상을 했다.
“아무튼.”
오토가 카미유에게 명령했다.
“한 며칠만 잘 데리고 있어 봐.”
“예? 제가 데리고 있습니까?”
“응. 명령이야.”
“…….”
“조만간 로우레딘 왕국으로 갈 거니까, 딱 그때까지만.”
“알겠습니다.”
카미유가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로스보다 더한 깡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수고!”
오토는 카미유에게 아리엘을 떠넘긴 후 한동안 내정에만 집중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내일 출발하겠습니다.”
“구궤 줭말이뉘~?”
또 혼자 술독에 파묻혀 아리엘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취기 때문에 게슴츠레하게 풀려 있던 아리엘의 눈은, 어느새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마시고 쉬세요.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까.”
“알게에써어어.”
…라고 말한 아리엘이 테이블 위로 풀썩! 쓰러졌다.
테이블 위에는 수십여 개나 되는 술병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을 때운답시고 퍼마시다 보니 그만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취해버린 것이다.
“…무슨 알콜중독 부부냐고.”
오토는 카이로스와 아리엘이 맺어진다면, 대륙 역사상 최강·최악의 주당 부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잘 어울리긴 하겠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상이 아니었으므로, 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 아침.
오토는 약 2만 명의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고 로우레딘 왕국으로 향했다.
출발 전.
“헬무트 후작님.”
“예, 전하.”
오토는 헬무트를 불러들여 따로 명령을 내렸다.
“국경 주변 수색 정찰에 신경 써주세요. 언제든 적이 쳐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대기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예.”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주변국들이 눈에 불을 켜고 쳐들어올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국경에서 병력을 조금이라도 뺐다면, 벌써 쳐들어오고도 남았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신경 쓰여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헬무트가 오토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 헬무트. 전하의 명에 따라 국경을 철통같이 방어해내겠사옵니다.”
“네, 믿습니다.”
오토는 헬무트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단 성물인 변경백의 결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헬무트는 군사적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한평생 국경을 지키며 하브르 초원의 야만부족과 맞서 싸운 인물인지라, 방어 작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량을 지녔을 수밖에.
그렇게 오토는 헬무트에게 영토의 방어를 맡겨두고, 이오타 왕국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토는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고 카이로스가 점령 중인 지역에 도착했다.
마침 카이로스가 점령한 지역이 옛 발틴 왕국의 국경과 맞닿아 있어서, 로우레딘 왕국을 침범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엄청 안정돼 있네? 백성들도 표정이 좋고.’
오토는 점령지역을 슬쩍 살펴본 것만으로도 카이로스가 얼마나 민심을 잘 휘어잡았는지 눈치챘다.
스쳐 지나가는 백성들의 표정이 밝은 것만 봐도 이 지역이 얼마나 안정되었는지 다 티가 났던 것이다.
심지어 카이로스가 이끄는 세력이 반란군들 중 하나였음에도.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오토가 군영에 들어서자 이오타 왕국의 기사들, 그리고 마검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수군수군.
지켜보던 카이로스의 군사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으. 술 냄새.”
오토는 군영 중심부에 자리한 커다란 천막 앞에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안에서 얼마나 술판을 벌였는지, 안쪽에서부터 술 냄새가 훅! 하고 끼쳐 들어왔던 것이다.
‘하여간.’
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천막을 열어젖혔다.
“뺀질이 왔느냐?”
카이로스는 늘 그렇듯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만 술이나 퍼마시다가, 때가 되면 마나를 이용해 알콜을 날려 버리고 빠릿빠릿해지는 게 카이로스의 방식이었다.
얼핏 보면 하루 24시간 술독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뭔가를 해야 할 때가 오면 언제 자빠져 있었냐는 듯 움직이는 것 말이다.
덕분에 부하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여긴 짐에게 맡겨 둔다고 해 놓고 어쩐 일이냐?”
“아, 그게.”
오토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서.”
“으응?”
“널 엄청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데려왔거든.”
오토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저벅저벅.
아리엘이 카이로스의 천막 안으로 들어서던 바로 그 순간.
호다다닥!!!
카이로스가 번개처럼 튀어 올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치 조건반사가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아리엘은…….
“너 잡히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아리엘이 앙칼지고, 표독스럽고, 사납고, 또한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카이로스를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