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철푸덕!
도망치려던 카이로스는, 불행히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발이 꼬이는 것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 결과.
덥석.
아리엘이 카이로스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감히… 또 도망쳐?”
“아, 아리엘!”
“450년 만에 만났는데도… 날 피해?”
“그, 그게 아니라! 너무 당황해서….”
“죽어어어어어어어어엇!!!”
아리엘이 카이로스를 향해 가시가 돋아난 철퇴를 휘둘렀다.
“으아아아악!”
카이로스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얼마나 심하게 두들겨 맞는지,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버릴 정도였다.
“처맞아도 싸지.”
“옳지, 잘한다.”
“고생하십시오, 폐하.”
카이로스의 부하들인 아가토, 힐데가르트, 그리고 막시무스는 아리엘을 응원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과거 카이로스와 아리엘을 강력히 지지했다.
하지만 카이로스가 꽃뱀인 베아트리체에게 푹 빠지면서, 모든 것이 박살나 버리고 말았다.
카이로스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의 인생까지도.
그러니 카이로스를 응징하는 아리엘을 응원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꾸웨에에엑!”
“죽어, 죽어어어엇!”
“끄아아악!”
“죽어, 이 새끼야아아아아!”
“꽥!”
카이로스는 아리엘에게 무차별적으로 얻어터지며, 전생에 쌓았던 업보를 치렀다.
지고지순한 여자의 순정을 무시한 대가를….
“히히히!”
오토는 카이로스가 얻어터지는 걸 보고 고소해했다.
애초에 이러려고 아리엘을 데리고 온 것이었기에,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절레절레.
카미유는 그런 오토를 보고 못 말리겠다는 고개를 돌리고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카이로스가 얻어맞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긴 했지만, 즐기기에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수고!”
오토도 이만하면 구경할 것은 다 했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야 이놈들아! 악! 으아아악! 어, 어딜 가느냐! 이 의리 없는 자식들아! 악! 으아악! 도와달란 말이ㄷ… 꾸웨에엑!”
카이로스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별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아리엘이 무서워서라도 감히 뜯어말릴 수가 없었다.
“말리기만 해? 어?”
아리엘이 가시가 돋아난 방망이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이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서라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아리엘에게 두들겨 맞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꾸웨에에에에에에에엑!!!”
막사 안에서 온종일 카이로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한차례 무시무시한 폭행이 지나간 후.
“끄억, 끄어어어억!”
카이로스는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쒸익쒸익!”
아리엘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아예 맨손으로 카이로스를 두들겨 패려 했다.
그러나….
울컥!
실컷 분풀이를 하고 나자 지난 수백 년 동안 쌓인 묵은 감정이 터져 나왔다.
“흑흑, 흑흑흑.”
아리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 나쁜 새끼야. 흑흑흑.”
“…….”
“아직도 널 못 잊고. 흑흑. 매일 밤. 흑흑. 너만 생각하면서. 흑흑.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살아왔는데. 흑흑흑.”
“…….”
“보, 보고. 흑흑. 싶었어.”
갑자기 카이로스를 끌어안은 아리엘이 펑펑 눈물을 쏟았다.
“…….”
카이로스는 아무런 말없이 우는 아리엘을 보듬어 주었다.
전생에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쫓아다녔는지를 알기에.
“너.”
한동안 폭풍 오열하던 아리엘이 카이로스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날 피해 다닐 거지? 그렇지?”
“…….”
“또 날 버리고 도망칠 거지? 꽃뱀 같은 년한테 꽂혀서?”
“아니다.”
카이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생엔… 도망치지 않겠다.”
“거짓말.”
“정말이다.”
카이로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전생에 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건… 내 마음속에 다른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아트리체 그 망할 년?”
“…….”
“그런 쓰레기 같은 년 하나 때문에 날 피해 다닌 결과가 고작 이거야?”
“미안하다.”
카이로스가 고개를 떨궜다.
베아트리체는 카이로스의 인생에서 가장 아픈 부분이자 가장 큰 오점이었으므로.
“그래서 지금은?”
“그야 당연히….”
“당연히 뭐. 어쩔 건데.”
“차근차근 서로를 알아나ㄱ….”
바로 그때.
“흡!”
아리엘의 입술이 카이로스의 입술을 덮쳤다.
뒤이어 사나운 야수로 돌변한 아리엘이 카이로스의 상의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크윽!”
“가만있어.”
“이건 너무 빠르지 않… 허윽!”
“450년을 참았는데 더 참으라고?”
“그, 그렇지만! 흐윽!”
“더는 못 참아. 얌전히 있어.”
“허어억!”
뒤이어 카이로스의 손아귀가 바닥에 깔아 놓은 카펫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 * *
같은 시각.
아르곤 대제는 자신의 사병(私兵)들을 이끌고 로우레딘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오버하우저 가문은 오랜 시간 아르곤 대제의 부활에 대비해 따로 기사단을 양성해 왔으며, 수천 명의 병사들도 보유해 온 집단.
그런 만큼 로우레딘 왕국에서 군벌 하나를 형성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조리 죽여라!”
“왕국군을 처부숴라!”
아르곤 대제가 이끄는 군대는, 로우레딘 왕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 하나를 순식간에 초토화시켜 버렸다.
“항복하는 자, 살려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에게는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황금색 갑옷을 입은 아르곤 대제는, 최전방에서 로우레딘 왕국군을 쳐부수며 그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였다.
그간 상인으로 위장해 사느라 부득이하게 무력을 숨기고 있었지만, 로우레딘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서 비로소 본래 실력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아르곤 대제는, 즉시 점령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다가 아니라, 민심을 얻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식량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부터 먹여라.”
“예, 폐하.”
아르곤 대제는 가진 군량미를 풀어 굶주린 로우레딘 왕국의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빌어먹을. 아까워 죽겠군.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을 먹여 살려야 하다니.’
사실 아르곤 대제는 식량을 풀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백성들에게 나눠 준 군량미는 아르곤 대제의 마지막 남은 밑천이었다.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기 위해 없는 형편에 피눈물을 흘리며 식량을 풀었던 것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장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굶주려 있던 로우레딘 왕국의 백성들은 그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마워했다.
아르곤 대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아르곤 대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임시로나마 병원을 세우고, 아픈 병자들을 치료하라.”
“예, 폐하.”
의료품들을 풀고, 마법사들을 시켜 치료 마법을 이용해 병든 백성들을 치료해 주기까지 했다.
그중 백미는 아르곤 대제가 직접 환자들을 돌본 것이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찌 치료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르곤 대제가 등창으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를 붙들고, 그를 위로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우선 등의 고름부터 제거해야겠습니다.”
다음 순간.
쭙, 쭈웁.
아르곤 대제가 등창이 난 환자의 등짝에 입술을 들이대고는, 고름을 빨아들였다.
“퉤!”
아르곤 대제가 피 섞인 고름을 뱉어내더니, 독한 술로 환자의 등을 소독해 주었다.
그런 뒤 마법사를 시켜 상처를 치료하게끔 했다.
“오오!”
“장군님께서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시다니.”
“맙소사. 어찌 저런 분이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로우레딘 왕국의 백성들은 아르곤 대제의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설마 하니 그 더러운 고름을 입으로 빨아들일 줄이야.
“장군님!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아이고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저 아픈 환자에게 해야 할 치료를 했을 뿐입니다.”
아르곤 대제가 고마워하는 환자에게 인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아르곤 대제의 겉과 속은 180도 달랐다.
‘역겨운 버러지 같으니.’
아르곤 대제는 백성들을 경멸했다.
황족이라는 혈통에 엄청난 자부심을 지닌 아르곤 대제는, 평범한 사람들을 결코 자신과 같은 선상에 두지 않았다.
아르곤 대제에게 있어 평민들이란 그저 이용해 먹을 대상에 불과했다.
다만 그 평민들이 수십, 수백, 수천만 명이 모였을 때 어떠한 힘을 내는지를 잘 알았기에 민심을 얻으려 하는 것일 뿐.
평민 개개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게 아르곤 대제의 가치관이었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세력을 넓힐 준비를 하라.”
“예, 폐하.”
“또한.”
아르곤 대제가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정보원들을 풀어 소문을 내라. 율리우스 장군의 점령지역이야말로 진정한 지상낙원이라고. 그곳으로 가면 식량을 주고, 귀족들의 횡포도 없다고.”
“예, 폐하.”
아르곤 대제는 한 지역의 점령에 성공하자마자 즉시 여론전을 펼치는 등 매우 노련하게 행동했다.
과거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 * *
그날 밤.
“…끄어어어어어.”
카이로스는 거의 좀비가 된 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양 볼은 움푹 패여 있었고, 눈은 퀭했으며, 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평소 강한 하체 단련으로 튼튼하고 굳건하기만 하던 두 다리는 힘이 다 풀려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그 와중에 하도 얻어터진 탓에, 얼굴에는 온통 멍 자국이 가득하기도 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토는 카이로스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카이로스가 호되게 당할 줄은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될 줄이야.
단 한나절 만에 사람이 썩은 고목나무처럼 변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반대로, 아리엘은 마치 만개한 꽃처럼 화사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활력이 넘쳤고, 피부는 빛이 날 정도로 매끄러웠으며, 입가는 마치 루비처럼 빛났다.
마치 몸보신이라도 거하게 한 사람처럼 말이다.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오토가 그렇게 생각할 때.
“얘.”
아리엘이 오토에게 말했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니?”
“부탁이요?”
“응.”
“무슨 부탁인데요?”
“이따 결혼식할 테니까 준비 좀 해 주렴.”
“예에?”
오토는 이게 맞나 싶어 제 귀를 의심했다.
결혼식이라니?
그게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소리란 말인가?
“겨, 결혼?!”
“벌써?”
“아니, 무슨 결혼을 이렇게 급하게.”
“허허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아리엘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당황했다.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왜. 뭐.”
아리엘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450년을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라고? 결혼이 별거야? 그냥 물 한 사발 떠다 놓고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런 아리엘의 발언에 오토를 포함한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못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서로의 마음이 중요한 거지.’
오토는 내심 아리엘의 발언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결혼을 지금 하자고?!”
놀란 카이로스가 소리쳤다.
“왜? 싫어?”
아리엘이 고개를 홱! 돌려 카이로스를 노려보았다.
“한번 했다 이거지?”
“그, 그게 무슨!”
“버리겠다는 거야? 또?”
“짐이 언제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그럼 하면 되잖아.”
아리엘이 카이로스를 향해 눈을 희번덕거렸다.
“…….”
“…….”
“…….”
사람들은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고, 입을 떡 벌린 채 어이없어 했다.
아리엘이 카이로스를 두들겨 팬 다음…….
“얘.”
아리엘이 오토를 돌아보았다.
“네에?”
“좀 준비해 주겠니?”
“어, 어떻게요?”
“돼지 한 마리 잡고, 술 좀 가져다 놓고, 꽃은 대충 풀밭에서 뜯어오면 되겠지.”
오토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