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오토는 아르곤 대제가 어째서 로우레딘 왕국까지 왔는지를 알았다.
‘상단 운영이 어려워지니까 로우레딘 왕국을 집어삼켜서 아예 왕위에 오르려는 거겠지. 누군가에게 후원을 해 주면서 이용해 먹기엔 자금력이 부족하니까.’
아르곤 대제는 돈을 이용해 기생할 숙주를 현혹시키고, 나아가 뒤통수를 치는 것에 능했다.
그러나 오버하우저 상단이 망해 버린 이상 그 방법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 남은 자금을 탈탈 털어서 로우레딘 왕국으로 온 게 분명했다.
지금 아르곤 대제의 입장에서는 로우레딘 왕국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르는 게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한 지역을 장악하고 민심을 휘어잡는 중이라고요?”
“예, 전하.”
“흐음.”
오토가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내버려두죠. 귀여우니까.”
“예?”
“어차피 저 지역은 이쪽에서 싸움을 걸기도 좀 그렇고, 우리가 더 빨라요.”
“율리우스의 세력이 커지는 것보다 전하께서 로우레딘 왕국을 접수하시는 게 빠를 것이란 말씀이십니까요?”
“바로 그거죠.”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요.”
“일단 알겠습니다.”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 공급 계속해 주시고, 율리우스 세력 쪽에 적당히 훼방만 놔주세요.”
“예, 전하.”
오토는 아르곤 대제를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미 이오타 왕국군이 로우레딘 왕국에 들어온 이상 아르곤 대제에게 승산은 없었다.
있다면, 그건 100인의 군주 중 하나이자 성물의 주인인 리볼트와 아르곤 대제가 붙어 있는 것.
‘그럼 골치 아파지는데.’
그건 정말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리볼트는 엄청난 강자지. 실력이 드러나지 않은 강자. 아르곤 대제야 말할 것도 없고.’
리볼트는 여태 만났던 군주들 중에서 무력이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현재로서는 오토, 카미유, 카이로스 셋이 힘을 합친다 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
그건 아르곤 대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카이로스의 실력으로는 아르곤 대제를 못 이길 텐데.’
오토는 그게 걱정되었다.
카이로스는 새로운 육체를 얻어 부활한 지 이제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르곤 대제는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채 환생했으니 수준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옛날엔 카이로스의 무력이 압도적이었고, 아르곤 대제는 만년 2인자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오죽했으면 카이로스 하나를 잡으려고 아르곤 대제와 그의 가장 충성스럽고 강력한 부하들이 200명이나 달려들었음에도 끝끝내 죽이지 못했을까.
‘일단 그 둘이 못 붙어먹게끔 방해만 해야겠다.’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로 가 눈을 붙였다.
그렇게 몇 시간쯤 잤을까.
“…뭔데.”
오토는 문득 들려오는 소음에 잠에서 깨었다.
우르릉!
콰앙!
우당탕!
와르르르르!
어디선가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려와서, 도저히 계속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깬 건 비단 오토뿐만이 아니었다.
“깨셨습니까.”
난데없는 소음에 카미유를 포함해 잠들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뭔데 이 소리?”
“그게 그러니까.”
카미유가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잘 들어보십시오.”
“으응?”
“그 소리입니다.”
“그 소리라니?”
“술주정뱅이 부부가 첫날밤을 치르는 모양입니다.”
“아니.”
오토는 어이가 없었다.
“첫날밤을 치르는데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고?”
“예, 뭐.”
카미유가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감쌌다.
“도대체 첫날밤을 어떻게 치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요란하게 치르는 모양입니다.”
“…….”
“때려 부수는 소리도 들리고. 욕도 들리고. 그… 소리도 들리고. 아주 죽겠습니다.”
“…진짜 역대급 부부네.”
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귀마개를 차고 다시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아침.
“…살아 있는 거 맞냐.”
오토는 좀비가 되어 나타난 카이로스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불과 하룻밤 사이 카이로스는 피골이 상접한 미라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상조차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호호호!”
반대로, 아리엘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어찌나 생기가 넘치고 화사하던지, 족히 200년은 젊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리엘은 분명 아름답긴 했지만, 서서히 중년에 접어드는 나이인지라 젊은 날의 꽃다운 아름다움보다는 성숙한 아름다운이 더욱 돋보이는 여성.
하지만 어젯밤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먹었는지, 지금의 아리엘은 그 옛날 카이로스를 쫓아다니던 전성기 시절의 외모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흐, 흡혈귀냐?!’
오토는 어쩌면 아리엘이 카이로스의 정기를 쪽쪽 빨아먹고 회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엘프의 탈을 쓴 서큐버스든지.
‘꼴좋다.’
오토는 좀비처럼 움직이는 카이로스를 보고 내심 고소해했다.
진정한 남자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엘리제에게 잡혀 산다고 놀리더니, 정작 카이로스 본인은 아리엘에게 찍! 소리도 못하다니.
평소 심심하면 상남자에 대해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너 평생 잡혀 살겠다?”
“뭣이?”
카이로스가 발끈했다.
“짐이 한낱 아녀자에게 잡혀 살 거란 말이냐!”
“그럼 아냐?”
“당연한 소리를!”
카이로스가 가슴을 쭉 내밀고 허세를 떨었다.
“그냥 잡혀 주는 척하는 것뿐이다! 사내대장부가 마누라를 이겨 먹어서야 되겠느냐!”
“그래?”
“그렇다!”
“누ㄴ… 흡!”
카이로스가 황급히 오토의 입을 틀어막았다.
“뺀질아,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느냐.”
“읍! 읍읍!”
“제발 좀 닥치고 있어라! 이러다 짐이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읍읍!”
오토는 카이로스의 필사적인 태도를 보고, 아리엘에게 고자질하려는 걸 그만두었다.
“쯧쯧.”
오토가 카이로스를 보고 혀를 찼다.
“이쯤 되면 잡혀 사는 게 아니라 사육당하는 거지, 사육.”
“…….”
“앞으로 잘해라. 괜히 까불지 말고. 다 불어 버리는 수가 있어.”
카이로스는 오토의 협박에 발끈하려다가,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괜히 오토와 드잡이질을 했다가 아리엘에게 탈탈 털리느니, 그냥 참기로 한 것이다.
‘완전 억제기네, 억제기야.’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로스에게 지도를 보여 주었다.
“자, 봐봐.”
“음?”
“아르곤 대제가 여기 이 지역을 점령하고 세력을 불려 나가고 있어.”
“뭐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벌벌 떨던 카이로스가 버럭 분노를 토해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이 여기 숟가락을 들이밀었단 말이냐?”
“응.”
“그래서 이번엔 그놈을 어찌 요리할 생각이냐?”
“우선.”
오토가 지도의 다른 지역을 가리켰다.
“여기 이 세력. 리볼트란 놈의 점령지역이야. 여기부터 박살내자.”
“음?”
“이 리볼트란 놈이 엄청 강한 놈이야. 그런 놈이 아르곤이랑 붙어먹으면 어떻겠어.”
“골치 아파진다 이것이냐?”
“응.”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세력은 그냥 내버려둬도 돼. 어차피 크게 될 놈들이 없으니까. 우리한테 박살 나거나, 결국엔 항복해 올 놈들이거든. 근데 리볼트는 달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해질 거야.
“알겠다, 뺀질아.”
카이로스는 우선 오토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전략적인 부분은 오토에게 맡겨두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 *
이틀 후.
오토가 이끄는 이오타 왕국군과 카이로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즉시 리볼트의 점령지역으로 향했다.
‘시간이 생명이지. 지금 치면 허무하게 무너질 거다.’
오토는 리볼트가 이끄는 반란군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리볼트의 세력은 병력의 질적 수준이 매우 낮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군인이 아닌 평범한 민간인들이 병력의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반란군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약점이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고, 유능한 장교들의 숫자도 턱없이 부족해서 사실상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존 로우레딘 왕국군을 흡수하면서 해결될 문제이긴 했지만, 오토는 그 시간을 줄 생각이 단 1도 없었다.
‘지금은 리볼트의 개인 무력으로 연전연승하고 있을 뿐이지.’
오토는 그런 리볼트 세력의 장단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과감하게 병력을 움직였다.
현재 이오타 왕국군의 군사력이라면, 전략·전술을 따질 것 없이 냅다 밀고 들어가도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망설이지 않고 리볼트가 점령 중인 지역으로 병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전군, 진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은 오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적 요새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토는 뒤에서 뒷짐만 지고 있지 않았다.
“가자.”
“예, 전하.”
오토는 카미유와 함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카이로스와 영혼기사들 역시 전투에 참여해 적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오타 왕국! 만세!”
“만세!”
전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리볼트의 군대는 이오타 왕국군을 상대로 30분도 채 버티지 못했다.
단 한 명의 징집병 없이 오직 정규군으로만 이루어진 군대의 힘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백성들을 징집해 머릿수만 채운 군대로는 이오타 왕국군을 상대로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항복하는 자들은 절대 죽이지 마라.”
오토는 요새를 점령하자마자 엄명을 내렸다.
“불필요한 살상과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을 것이며,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예, 전하.”
오토는 전쟁범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전쟁범죄는 민심을 악화시키는 최악의 원인 중 하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도 평판이 나빠지고, 악명이 증가하는 등 악영향이 엄청났다.
항복한 적들을 학살하면 당장에는 분이 풀리고 재미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계속 진격한다.”
“예, 전하.”
오토는 기세를 몰아 군대를 더욱 깊숙한 지역까지 전진 배치했다.
리볼트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제일 좋은 방법은,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게 최고라는 걸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척! 척! 척! 척!
오토의 명령을 받은 이오타 왕국군은 계속해서 진격하며, 리볼트의 군대를 압박해 나갔다.
* * *
“뭐라!”
한편, 리볼트는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 방어선이 뚫렸다? 단 하루 만에?”
“예, 장군.”
부관이 지도를 펼쳐 리볼트에게 현재 전황에 대해 알려 주었다.
“이오타 왕국군이 카이로스란 자의 세력과 함께 우리 방어선을 뚫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이오타 왕국군? 카이로스? 이런 빌어먹을!”
리볼트는 적잖이 당황했다.
방어선이 뚫린 건 리볼트에게 있어 치명타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한창 로우레딘 왕국군을 쳐부수며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도중에, 후방의 방어선이 뚫렸으니 자칫 잘못했다간 양방향에서 포위·섬멸당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설마 로우레딘 왕국군을 지원하려는 세력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 좋기에 그렇게까지 말하나?”
“보고에 따르면 적들의 진격 속도가 어마어마합니다. 이대로라면 사흘째에 여기까지 들이닥칠 게 분명합니다.”
“당장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하라! 지금 당장!”
“예, 장군.”
리볼트는 즉시 이오타 왕국의 진격에 맞서 전투를 준비했다.
이오타 왕국군의 진격 속도가 워낙에 빠르기에,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점령지역을 지켜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카이로스 삽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