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비결이 뭐냐?”
“응.”
“빌렸다.”
“뭐?”
“미래의 짐에게 강함을 빌렸다.”
“그게 뭔 개소리야!”
오토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강함이 돈이냐? 막 대출해 주는 거냐?”
“그렇다.”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오토가 카이로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알려 주기 싫으면 말던가. 그 말을 믿으라고?”
“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카이로스는 오토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이다.”
엘리제가 나서서 오토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어르신께서는 대자연의 기운을 흡수해서 마나를 채우고, 육체를 더욱 강화시킨 거다.”
“그게 돼?”
“봐라.”
엘리제가 주변을 가리켰다.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어 있지 않은가.”
“어? 그러네?”
“이런 식으로 대자연의 기운을 흡수해 마나를 채우는 마나운용법이 있다고는 들었다.”
“아?”
그러자 카이로스가 거 보란 듯 말했다.
“뺀질아! 짐의 말은 안 믿더니 약혼녀 말은 믿는 것이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짐은 짐만의 마나운용법으로 대자연의 기운을 강제로 흡수했을 뿐이니라. 게다가 짐은 이미 과거에 위대한 경지를 이룩해 본 경험이 있으니, 단기간에 강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미, 미안.”
오토가 사과했다.
“너무 단기간에 강해지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다 짐이니까 가능한 일이니라! 다른 허접한 놈들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 그래.”
“물론 무리하게 대자연의 기운을 흡수했으니 부작용도 상당할 터. 아르곤 놈과 싸우고 난 이후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거였어?”
“그렇다.”
카이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아르곤 그놈을 때려잡을 수 없으니, 이런 편법이라도 써야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
오토고 카이로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만약 카이로스가 아르곤 대제에게 두들겨 맞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서럽겠는가?
‘하긴. 나 같으면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 같긴 해.’
아르곤 대제는 카이로스의 불구대천의 원수.
카이로스로서는 아르곤 대제를 일대일 결투로 보란 듯 승리하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오토 말마따나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각오가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어떤 부작용을 겪는다 해도.
“한 며칠 더 도와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엘리제는 흔쾌히 카이로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고맙다. 그럼 난 마나를 보충하고 있을 터이니, 너는 네 약혼자 녀석과 놀아주고 있도록 해라.”
“예, 어르신.”
카이로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숲속으로 들어가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어어? 어어어?”
오토는 저 멀리 숲속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시들어가는 걸 보고 경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어? 나까지?”
거의 100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도, 마나홀의 마나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카이로스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주변의 모든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 * *
엘리제는 1주일이나 머무르며 카이로스의 수련을 도와주었다.
물론 카이로스만 도와준 건 아니었다.
엘리제는 오토와도 대련을 해 주며,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오토와 카이로스는 매일 밤 끙끙 앓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카이로스나 오토나 엘리제에게 탈탈 털리기는 마찬가지라, 하루 수련이 끝나면 앓아눕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렇게 1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아쉽지만 한 달 후에 보자.”
“조심히 가. 그리고 이거.”
오토가 엘리제에게 뭔가 한가득 든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
“보습용 화장품 몇 개랑 간식 좀 넣었어. 직접 챙기기 힘들 거 같아서.”
엘리제가 그 흔한 보습용 화장품조차 잘 챙기지 못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오토였다.
그 춥고 척박한 장벽 너머에서는 피부가 건조해지기 십상이라, 수시로 보습용 화장품들을 발라 주어야 했다.
“고, 고맙다.”
엘리제가 얼굴을 붉혔다.
“선물해 준 만큼, 아무리 바쁘다 해도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발라 보겠다!”
“으, 으응.”
오토는 엘리제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당황했다.
‘왜 임무 완수하겠단 표정이냐고.’
춤출 때도 그렇고, 엘리제는 쓸데없이 전투적일 때가 많았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검을 쥐고 살아와서 그런 거겠지.
“사실….”
엘리제가 수줍게 말했다.
“나도 준비한 게 있다.”
“뭔데?”
“잠깐만 기다려라.”
엘리제는 오토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말안장에서 커다란 자루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화염곰의 쓸개들을 좀 모아 봤다.”
“헉?”
화염곰은 북부 장벽 너머에 서식하는 무시무시한 몬스터로서, 몸길이가 무려 10미터에 달하는 괴수였다.
입에서 뿜어내는 화염이 강철도 녹여 버릴 정도에다가, 몸에서 늘 불이 붙어 있는 화속성 몬스터이기도 했다.
“화염곰의 쓸개라면… 웅담???”
“그렇다.”
“웅담은 왜?”
“그, 그냥.”
엘리제가 살짝, 아주 살짝 몸을 꼬았다.
그 각도가 매우 미세해서, 눈썰미가 아주 좋지 않은 사람은 절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네 건강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구해 왔다.”
“잠깐.”
오토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웅담이… 정력에 좋은 음식 아냐?”
“나, 나는 그저.”
엘리제가 슥 시선을 돌렸다.
“약혼자 네 건강이 걱정되었을 뿐이다. 절대 몸보신하라는 의미에서 준 게 아니다. 절대로.”
“…….”
“화염곰의 쓸개가 추위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준다는 얘기가 있어 구해 온 것뿐이다.”
“그, 그래.”
오토는 엘리제의 말을 믿어주는 척 하기로 했다.
‘정력에 좋다니까 가져다준 거 맞잖아.’
아무래도 아기를 많이 낳아 대가족을 이루고 싶다던 엘리제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부디 꼬박꼬박 잘 챙겨 먹길 바란다.”
“으응.”
“아, 그리고.”
엘리제가 덧붙였다.
“많이 쓰다고 들었는데, 본래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꾹 참고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한다. 알겠나.”
“그, 그럴게.”
누가 선물해 준 건데 안 먹을까.
오토는 화염곰의 쓸개가 맛이 어떻든 목숨을 걸고 다 먹어치우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육아는 잘할까?’
오토는 문득 궁금했다.
엄마가 된 엘리제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애들 사춘기 걱정은 없겠네.’
만약 엄마가 엘리제라면, 자식들의 질풍노도의 시기 따위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라고 해도, 평생 엘리제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 * *
그날 저녁.
“야, 내일….”
오토는 카이로스의 막사를 찾았다가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ॐ मणि पदमे हुं… ॐ मणि पदमे हुं.”
카이로스는 가부좌를 튼 채로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정말이지 기괴했다.
“뭐, 뭐야!”
오토가 화들짝 놀랐다.
카이로스의 얼굴이 마치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야! 뭐야! 괜찮냐! 야!”
“…조용히 해라.”
카이로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ॐ मणि पदमे हुं… ॐ मणि पदमे हुं… ॐ मणि पदमे हुं… ॐ मणि पदमे हुं….”
그 결과.
스르륵.
카이로스의 얼굴이 변형되더니, 이내 곧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
오토는 카이로스의 달라진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모습.
과거 식인황제라 불렸던 폭군의 초상화와 거의 흡사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후우!”
카이로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뭘 그렇게 빤히 보느냐? 뺀질아?”
“누, 누구세요?”
“끌끌끌! 이게 짐의 본모습이다! 멋있지 않으냐!”
확실히, 본래의 모습을 찾은 카이로스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위엄이 넘쳐 보였다.
게다가 단기간에 근육량을 엄청나게 늘린 덕분에, 체격도 상당히 커져서 이제는 진짜 남자 중의 남자 같았다.
“너 얼굴도 바꿀 수 있었냐?”
“짐에게 불가능이 어디 있겠느냐! 정신력으로 해결 못할 일이 없다!”
“눼에, 눼에. 어련하시겠습니까.”
오토는 툭하면 정신력 타령하는 카이로스에게 완전히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근데 어쩐 일이냐?”
“슬슬 아르곤 대제의 세력을 쳐부수러 갈까 해서.”
“드디어.”
카이로스가 올 것이 왔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런 카이로스의 두 눈에서 시퍼런 귀화(鬼火)가 뿜어져 나왔다.
“너 설마 아르곤 그 새끼 때문에 옛날 얼굴로 돌아간 거냐?”
“당연하지 않겠느냐.”
카이로스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대꾸했다.
“그래야 아르곤 그놈이 짐의 재림을 더 확실하게 깨닫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
바로 그때.
“뭐, 뭐야?”
때마침 카이로스의 막사를 찾았던 아리엘이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카이… 로스?”
“와, 왔소.”
카이로스가 땀을 삐질 흘렸다.
늘 그렇듯 아리엘 앞에선 고양이 앞에 쥐 신세였던 것이다.
“옛날 모습을 되찾은 거야?”
“그, 그렇소.”
“x발.”
아리엘이 욕설을 퍼붓더니 카이로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마치 한 마리의 암사자처럼 그를 덮쳤다.
“x나 섹시해.”
“흡! 흐읍!”
“얌전히 있어.”
아리엘은 옛 모습을 되찾은 카이로스를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오토가 있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빼, 뺀질아! 나 좀 구해 다오! 뺀질아!”
카이로스가 오토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오토는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아리엘한테 얻어맞기 싫었던 것이다.
“예, 선생님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쇼.”
오토는 그 말을 넘기고 막사를 떠났고, 카이로스는…….
“흐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
다음 날.
재정비를 마친 이오타 왕국군은 즉시 아르곤 대제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아르곤 대제 역시 첩보를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르곤 대제도 바보도 아니었으므로, 로우레딘 왕국 전국 방방곳곳에 첩보원을 심어두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개 같은!!!”
아르곤 대제는 이오타 왕국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로우레딘 왕국을 접수해 왕조를 세움으로써 보란 듯 재기해 보려고 했는데, 이오타 왕국의 개입으로 그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릴 줄이야.
만약 이오타 왕국군이 다른 군벌들을 먼저 쳤다면, 아르곤 대제는 세력을 키울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보고에 따르면 이오타 왕국군은 아르곤 대제가 점령한 지역을 향해 쭉 밀고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필요한 아르곤 대제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안 좋은 소식이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 아르곤 대제가 가진 세력으로는 이오타 왕국군과 싸워서 절대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
때마침 도착한 전령이 아르곤 대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소식을 전했다.
“이오타 왕국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폐하께 서신을 보내왔사옵니다.”
“뭐라?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예, 폐하.”
“읽어 보라.”
“그, 그것이….”
전령은 쉽사리 오토가 보낸 서신을 읽지 못했다.
“어서 읽지 못할까.”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전령이 서신을 읽기를 거부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아르곤 대제는 그런 전령의 행동을 보고, 오토가 보낸 서신의 내용을 단번에 알아맞췄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짐에게 항복을 권했는가?”
전령에게 묻는 아르곤 대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