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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208화 (209/401)

208화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전령이 바짝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곤 대제는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다.

“항복, 항복이라.”

그 단어를 곱씹던 아르곤 대제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신하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맞서 싸우자니 상대가 안 되고.

그렇다고 항복에 찬성하자니 감히 아르곤 대제에게 항복을 권유한 꼴이 되고.

신하들로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건 기회다.”

아르곤 대제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비록 로우레딘 왕국을 접수해 크라레스 왕조를 열 수는 없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흥강국인 이오타 왕국에 침투할 수 있다면, 그게 더욱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아르곤 대제는 기생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과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카이로스라는 숙주에 기생했기 때문이고, 본래 계획도 앞으로 크게 될 숙주를 찾아 기생하려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 오토는 아르곤 대제가 숙주로 삼을 여러 군주들 중 하나.

항복하게 되면, 물 흐르듯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오토의 밑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연출될 터.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먼저 항복해 온 리볼트를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처형했다.’

아르곤 대제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건 리볼트가 거짓으로 항복해왔고, 그걸 눈치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게는 먼저 항복을 권유해 왔다. 이는 내가 거짓으로 항복할 가능성을 낮게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 내 절박한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부득이하게 항복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사를 전달한다면, 오토 드 스쿠데리아도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항복에 성공한다면, 아르곤 대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 있는 로우레딘 왕국을 재건하고, 대업을 노리는 것.

신흥강국인 이오타 왕국에 기생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오타 왕국에 기생하는 것이 100배 1,000배 나았다.

대업을 이루는 데에는 뱀 머리보다는 용꼬리가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왜?

결국 용머리가 되면 되니까.

“내 직접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서신을 보내겠다.”

아르곤 대제는 직접 깃펜을 들어 오토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절박하니 이대로는 항복할 수 없다, 항복을 바란다면 부디 자비를 베풀어줘라, 그렇게만 하면 충성을 다하겠다, 하는 내용의 서신을.

* * *

아르곤 대제가 보낸 서신은 곧장 오토에게로 전해졌다.

“리볼트처럼 될까 봐 신경을 좀 썼네.”

오토는 서신에 담긴 아르곤 대제의 속마음을 귀신 같이 알아챘다.

“역시 먼저 항복을 권하길 잘했어.”

만약 다짜고짜 공격했다면, 아르곤 대제는 항복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토가 먼저 항복해 온 리볼트를 처형하고, 그 세력을 흡수해 버리는 바람에 신용도가 크게 하락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판을 관리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일국의 군주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주변국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했다가 신용을 잃으면, 작은 일도 매우 복잡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오토가 리볼트를 처형하지 않았더라면, 아르곤 대제가 의심하고 경계할 이유도 없을 터.

“보자… 어떻게 써서 보내야 하나….”

오토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르곤 대제가 만족할 만한 내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버하우저 상단의 빚을 갚아주고.

아르곤 대제에게 후작의 작위를 주고, 그 신하들에게도 귀족의 신분을 인정해 주고.

믿음의 증거로, 오토 일행이 먼저 아르곤 대제의 진영까지 가 항복한다는 내용의 협정서에 서명하기로 했다.

‘그래. 우리 쪽에서 먼저 간다고 하면 믿겠지.’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간다는 게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오토가 먼저 가지 않으면 아르곤 대제는 의심할 테고,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어차피 아르곤 대제야 카이로스가 상대할 테니까.’

오토는 자신과 카미유, 그리고 마검사들의 힘을 믿기로 했다.

만약 일이 좀 잘못되더라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카미유.”

“예, 전하.”

“준비해.”

“알겠습니다.”

카미유는 오토의 명령에 따라 아르곤 대제의 진영으로 갈 준비를 했다.

* * *

오토는 다시 카이로스를 찾았다.

“내일 아침 일찍 간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냐.”

“그래.”

카이로스의 물음에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좀 어때?”

“어떨 것 같으냐?”

오토는 카이로스의 되물음에 순간 맹수 앞에 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싹!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웠던지, 전신의 털이 다 빳빳하게 곤두설 지경이었다.

‘이게 카이로스의 전성기 시절 모습이라는 건가?’

과거 카이로스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저게 황제의 위엄인가.’

달랑 철퇴 한 자루로 제국을 일군 사나이의 모습이란, 과연 달라도 달랐다.

아르곤 대제와 같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온갖 협잡질, 기만질, 정치질로 대업을 이룬 자와는 근본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내일.”

카이로스가 선언했다.

“짐은 전생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고맙다, 뺀질아.”

카이로스가 몸을 일으켜 오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단기간에 체구가 커진 카이로스의 체격은 오토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였다.

오토 역시 훤칠한 장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래?”

오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국왕 전하의 머리를 쓰다듬냐? 불경하게.”

“짐은 황제 출신이고, 네 녀석은 일개 국왕에 불과하니 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느냐.”

“치워라.”

“끌끌.”

카이로스가 웃으며 오토의 머리칼에서 손을 뗐다.

“그놈 성깔 하고는.”

그때.

‘뭐지?’

순간 오토는 카이로스의 모습에서 어떠한 불안함을 느꼈다.

마치…….

‘갑자기 왜이래?’

오토는 카이로스가 뭔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무튼, 정말 고맙다.”

“……?”

“네 녀석 덕분에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고마우면 앞으로 잘하시던가.”

“끌끌끌.”

곧 죽어도 잘하겠단 말은 안 하는 걸 보면, 앞으로도 말은 지지리도 안 듣겠다는 뜻 같았다.

“컨디션 관리 잘하고. 쉬고 있어.”

“알겠다.”

그렇게 오토는 카이로스에게 덕담을 건네고는,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오토 일행은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아르곤 대제의 진영으로 향했다.

* * *

아르곤 대제는 매우 깍듯하고 예의 있게 오토 일행을 맞아주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곤 대제는 몸소 오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취했다.

“전하와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하.”

“어느새 신흥강국의 군주가 되셨으니, 전하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날지는 능히 짐작이 가는 바입니다. 전하와 같은 훌륭하신 주군을 모시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저야 감사하죠.”

오토는 아르곤 대제의 새빨간 거짓말을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그날 오후.

협정서에 서명한 오토는, 아르곤 대제의 진영에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아르곤 대제가 오토를 위해 연회를 열어 준 것이다.

아르곤 대제는 카이로스와 영혼기사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근위기사단으로 위장한 카이로스와 영혼기사들이 투구까지 푹 눌러 쓰고 있었기에, 신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하께서 베푸신 은혜에 망극, 또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아르곤 대제는 오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단 항복한 이상 오토의 눈에 들어 요직을 차지하고, 이오타 왕국 내에서 세력을 키우는 게 아르곤 대제의 목표.

그러기 위해서는 오토로부터 신뢰를 받고,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그간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아르곤 대제에게 말했다.

“잘나가던 오버하우저 상단이 갑작스레 기울어 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 전하.”

아르곤 대제가 애써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세상일이라는 참 마음 같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왜 노동자들을 잡아다가 강제노역을 시키고, 죽이고, 언데드로 만들어 부리셨어요.”

“…예?”

순간 아르곤 대제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들은 게 맞나?’

청천벽력 같은 발언이라, 아르곤 대제는 얼떨떨해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과거 크라레스 제국의 초대 황제 아르곤 대제의 황릉을 도굴하려다가 일이 틀어진 거 아닙니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대금을 못 갚아서 상단이 재정적으로 어려워졌고. 흠. 이건 영 내 입에 안 맞네.”

오토가 잔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자 잔에 들어 있던 와인이 식탁 위로 쏟아졌다.

“그, 그게 무슨.”

당황한 아르곤 대제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그쯤 했으면 더 살려 두려고 했는데. 칼리프 왕국이랑 노예무역을 시도하질 않나. 이제는 로우레딘 왕국의 백성들을 징집한답시고 모집해 놓고 사하라 왕국에 팔아넘겼지.”

“……!”

“지켜보면서 가지고 놀려고 했는데, 적당히 했어야지. 선을 자꾸 넘으면 곤란하지. 내가 널 죽이고 싶어지잖아.”

“…….”

“안 그래? 율리우스?”

오토가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곤 대제를 향해 물었다.

“아니.”

오토가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르곤 대제라고 불러야 하나?”

아르곤 대제는 깨달았다.

오토가 자신에 대한 모든 것 알고 있음을.

* * *

챙!

채앵!

아르곤 대제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로써 화기애애하기만 하던 연회는, 당장에라도 피바람이 휘몰아칠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로 변해 버렸다.

“다 알고 왔다는 건가.”

아르곤 대제가 몸을 일으켰다.

“다 알고만 있었을까.”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 네가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은 게 누구라고 생각해?”

“…….”

“황릉 발굴, 밀무역, 그리고 이번 노예매매 사건까지. 넌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거야, 이 기생충 같은 새끼야.”

“큭큭.”

아르곤 대제가 웃었다.

“큭큭… 큭큭큭큭!”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분노였다.

그간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점점 더 궁지에 몰렸던 원흉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조롱하다니.

“네놈이… 네놈 따위가… 감히… 감히 짐을 가지고 놀아!”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악!

아르곤 대제의 몸에서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연회장을 휩쓸었다.

한계치 이상으로 치솟아 오른 분노로 인해 숨겨두고 있던 힘이 한순간에 개방된 것이다.

“네놈 같은 근본 없는 버러지가… 짐을 놀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당연하지.”

오토는 아르곤 대제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따로 있었으니까.

“나한테 따지기 전에.”

오토가 고개를 슥 돌리며 말했다.

“네 형님 폐하랑 얘기부터 하고 와. 그때도 네가 살아남아 있으면, 내가 얘기는 들어줄게.”

“……?”

“형님 폐하 몰라?”

그때.

저벅저벅!

카이로스가 눌러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던지며, 아르곤 대제를 향해 다가섰다.

“오랜만일세, 아우.”

카이로스가 씩 웃으며 아르곤 대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악!”

아르곤 대제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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