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카이로스에 대한 구타는 한나절 내내 계속되었다.
다들 분이 안 풀리는지, 때리다 지칠 때까지 카이로스를 두들겨 팬 것이다.
“끄어어어어어….”
덕분에 카이로스는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누님.”
오토가 지쳐서 헉헉대는 아리엘에게 다가가 젤리 몇 개를 내밀었다.
“필요할 때 쓰세요.”
아르곤 대제처럼, 카이로스에게도 병 주고 약 주고를 시전하란 뜻이었다.
“어머? 정말 고맙단다.”
“별말씀을요.”
“호호호.”
아리엘은 오토의 선물에 매우 만족했는지, 정말이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빼, 뺀질아! 짐을 배신하는 것이냐! 크윽!”
카이로스가 오토에게 소리쳤다.
“배신은 개뿔.”
오토가 눈알을 부라렸다.
“승천해 버린 주제에 말이 많다?”
“그, 그건.”
“네 편인 적 없거든? 그러니까 입 다물고 X나 맞기나 하세요. 남들한테 민폐 그만 끼치고. 너 때문에 영혼에너지 다 잃었잖아.”
영혼에너지가 고갈된 대학살의 서는 당분간 사용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문제는 채울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아르곤 대제의 부하들과 같이 죽어 마땅한 악인들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양측이 필사적으로 맞붙는 전쟁이 흔하게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세계대전이 벌어진다면야 날이면 날마다 영혼에너지를 흡수할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가뭄에 콩 나 듯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악당들이라도 찾아다녀야 되는 건가?’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로스를 버려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빼, 뺀질아! 뺀질아! 짐을 버리고 가는 것이냐! 도와다오! 뺀질아!”
“응. 안 도와 줘. 도와줄 생각 없어.”
“빼, 뺀질아아아!”
“수고.”
오토는 카이로스의 간절한 외침을 뿌리쳤다.
‘사실 다 계획한 주제에.’
오토는 카이로스가 지금 상황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그건 의심이 아닌 확신이었다.
허공법계에 접속해 단기간에 강해지는 방법을 알아내고, 그 힘으로 아르곤 대제를 쳐부수고, 한이 풀렸으니 승천해서 성좌가 되는 것까지.
그 모든 게 카이로스의 계획이자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물론 오토가 허공법계까지 쫓아와 뒷덜미를 낚아채 다시 현실로 데려올지는 계산하지 못했겠지만.
‘저거 은근히 음흉하단 말야.’
오토는 카이로스가 괘씸해서라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아리엘 옆에서 매 맞는 남편으로 살아 봐라. 히히히.’
앞으로 카이로스가 얼마나 잡혀 살게 될지 떠올려 보면, 통쾌함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 오토였다.
* * *
오토는 아르곤 대제가 다스리던 세력까지 흡수함으로써, 로우레딘 왕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니 로우레딘 왕국은 사실상 이오타 왕국에게 점령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국 각지의 반란 세력만 해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신흥강국인 이오타 왕국까지 쳐들어오니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전하, 반란군 지도자들이 항복을 해 왔습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반란군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항복해 왔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깨닫고, 너도나도 항복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왜?
지금 줄을 잘 서야 그나마 한 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괜히 이오타 왕국에 싸움을 걸어봤자 모든 것을 잃을 뿐이라는 걸 반란군 지도자들 역시 알았던 것이다.
“일단 다 와서 충성부터 맹세하라고 해. 지방 귀족이나 영주 자리 정도는 준다고.”
“예, 전하.”
그로부터 며칠 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여러 세력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오토에게 찾아와 한쪽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용병, 귀족, 영주, 농민 등등등.
그들은 각자 출신 성분이 다양했으며, 활동하는 지역 역시도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속마음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난 다 알지.’
오토는 누가 괜찮은 사람이고, 누가 탐관오리의 자질을 가진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오토의 머릿속에는 이 세계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고, 그건 로우레딘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지도자들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대로는 못 참겠단 심정으로 세상을 바꿔 보려 반란을 일으켰지만, 누군가는 혼란한 틈을 타 한몫 단단히 잡아 보려는 심산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도 여럿 있었던 것이다.
‘정보를 알긴 아는데. 진짜 속마음까지 그런지 확인은 해야 하니까.’
항복을 해 온 이상 모두를 받아주긴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고, 중요한 일을 맡길 순 없었다.
근본부터 썩어 버린 인물이 몇 있었기에, 무작정 포용했다간 나라 안에 암세포를 심어 놓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토는 항복해 온 반란군 지도자들을 감별(?)해내는 일을 카이로스에게 외주(?)를 주기로 했다.
혹시나 알고 있는 인물 정보와 실제 인물이 다를 수도 있었기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인재를 검증하는 일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감히 짐을 부려 먹으ㄹ….”
카이로는 오토가 일을 시키자 버럭 성질을 내려다가, 이내 곧 꼬리를 내밀고 고분고분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냥. 해.”
아리엘이 떡 버티고 서서 명령을 내리자 카이로스는 군말 없이 오토의 지시를 따랐다.
물론 굳이 아리엘이 아니더라도 오토가 시킨 일을 거부하진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튕겨 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놈들 중에서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있거나 비열한 놈들을 걸러내라는 말이냐?”
“바로 그거지.”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다 아는 수가 있잖아.”
“끌끌.”
카이로스가 웃었다.
“그렇다. 짐은 다 아는 수가 있느니라. 알겠다. 짐이 가려내 주마. 어떤 놈이 쓸 만한 놈인지. 어떤 놈이 똥막대기인지 말이다.”
“그래, 수고.”
카이로스는 심안을 이용해 항복해 온 반란군 지도자들을 일일이 만나 보고, 그들을 판별해 주었다.
결과는 오토가 알고 있던 정보와 같았다.
‘역시. 인물 정보는 안 틀리네. 신뢰성이 높아.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지만.’
오토는 카이로스가 짚어낸 <쓸 만한 놈>과 <똥막대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 정보와 일치한다는 걸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해 보았는데, 결과가 똑같으니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기존 바르도 영지의 영주였던….”
오토는 그 정보를 토대로 항복해 온 자들에 대한 대우를 다르게 해주었다.
똥막대기들은 적당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해 주되, 눈곱만큼의 권력과 권한도 쥐어주지 않았다.
대신에 쓸 만한 놈들에게는 귀족의 작위를 내려주고, 일을 맡겼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오토가 항복해 온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누군가는 불만을 품고 있고, 누군가는 만족했겠지. 그러나 그대들의 속내도 각자 다른 만큼,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라. 과인이 자신을 홀대한다 생각되거든,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어떠한 대우를 받았든 찍! 소리도 못했다.
이미 카이로스를 만나 속마음을 훤히 들켜 버렸기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됐고.”
그로써 오토는 로우레딘 왕국의 모든 반란군 세력들을 아주 깔끔하게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 * *
같은 시각.
이오타 왕국이 한창 로우레딘 왕국을 공략하는 동안 옆 나라인 체로키 왕국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칼마르 국왕은,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대소신료들을 불러 모았다.
“경들도 알다시피, 서쪽으로부터 이오타 왕국의 위협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오.”
체로키 왕국은 그간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외부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칼마르가 왕위에 오른 이상 체로키 왕국으로서는 바로 옆 나라인 이오타 왕국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인접한 발틴·슬레인·로우레딘이 작은 나라들인지라 그간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 세 나라가 이오타 왕국에 흡수되면서 이제는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실제로, 이제 이오타 왕국의 국토와 인구수는 체로키 왕국과 거의 맞먹을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이야 이오타 왕국이 내정에 집중하느라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놓고 보면 이건 아주 커다란 위협이었다.
발틴·슬레인·로우레딘 3국이 합쳐진 이오타 왕국은 국토의 면적, 인구수, 자원 등등 여러 가지 면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성장 잠재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냈다가는 이오타 왕국이 강대국으로 거듭날 테고, 그렇게 되는 날엔 본국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칼마르의 국왕의 물음에 대소신료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내어놓았다.
“예, 전하. 신이 생각하기에도 크나큰 위협이옵니다.”
“졸지에 바로 옆 나라에 강대국이 하나 생기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체로키 왕국의 대소신료들은 하나같이 애국심이 뛰어나고 유능한 인재들이라, 칼마르 국왕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소.”
칼마르 국왕이 희게 웃으며 말했다.
“이에 과인은, 지금이야말로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오. 냉정히 말하면 좋은 기회는 이미 날려 버린 셈이오. 이오타 왕국이 발틴, 슬레인, 로우레딘을 집어삼키게 내버려 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소. 참으로 아쉬운 일이오.”
칼마르 국왕의 말마따나, 체로키 왕국의 입장에서 이오타 왕국의 대륙 진출을 막지 못한 건 그야말로 뼈아픈 후회였다.
제때 움직이기만 했어도 발틴·슬레인·로우레딘을 먼저 집어삼키고, 이오타 왕국의 대륙 진출을 미리 저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만한 내부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오.”
칼마르 국왕이 힘주어 말했다.
“지금이라면 이오타 왕국이 성장하기 전에 그 싹을 잘라 버릴 수 있을 것이오. 다들 어찌 생각하시오?”
그러자 신하들이 대답했다.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전하!”
“옳으신 줄로 아뢰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칼마르 국왕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국노가 아니고서야 미래에 큰 위협이 될 이오타 왕국을 가만 내버려두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전쟁을 반대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체로키 왕국의 군사력은 강력했고, 경제 상황도 좋아서 얼마든지 전쟁을 수행하는 게 가능했다.
또한, 이제 갓 왕위에 오른 칼마르 국왕의 왕권 역시도 매우 강력한 상태였다.
왕세자 시절부터 귀족들뿐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았던 칼마르인지라, 전쟁을 일으키는 게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즉, 지금은 전쟁 반대론자들이 뭔가 의견을 낼 만한 상황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복전쟁이 아니오.”
칼마르 국왕이 선언했다.
“본국의 미래를 위한 예방전쟁(豫防戰爭)이오. 우리 젊은이들은 결코 과인의 야망을 위해서가 아닌, 본국의 미래를 위해 피를 흘리게 될 것이오. 후손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렇게 체로키 왕국은, 국왕 칼마르를 중심으로 이오타 왕국 침공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