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흥분해 주면 나야 좋지.’
지나친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한 빈틈을 만들어 내는 법.
오토는 바야바가 화를 내든 말든 평정심을 유지했다.
“네놈만은 반드시 죽인다.”
바야바야 오토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그 거대한 마상창을 쭉 내질렀다.
휘이이이이이!
그러자 마상창으로부터 소용돌이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오며 오토를 덮쳤다.
‘피하고.’
오토는 몸을 날려 바야바의 공격을 피해내는 한편, 석화의 눈과 맹독응시를 동시에 사용했다.
또한, 야만용사의 함성을 통해 바야바에게 슬로우 효과를 걸었다.
석화, 중독, 그리고 슬로우까지.
적을 약화시키는 모든 수단들을 동원해 바야바를 압박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해져라.”
오토는 스스로의 전투력을 올려주는 권능까지 사용해 바야바와 맞섰다.
“마검사인가.”
바야바가 살짝 놀랐다.
마검사는 매우 희귀한 존재.
검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바야바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오토 드 스쿠데리아.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다.”
“아.”
바야바는 그제야 오토의 정체를 깨달았다.
검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금발의 미남자라면, 쿤타치 가문의 혈통을 지녔다고 알려진 신흥강국 이오타의 국왕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좋군.”
바야바가 살기 띤 미소를 지었다.
“네놈을 죽이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
바야바의 입장에선 그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인 건 사실이었다.
2개 군단의 궤멸이라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적국의 왕인 오토를 처치했다고 하면 충분히 사면 받을 여지가 있을 테니까.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살아 돌아갈 것이다.”
바야바는 그렇게 선언하고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오토를 향해 달려들었다.
“꿈도 크네.”
오토는 검을 들어 바야바의 공격을 막아내는 한편, 계속해서 마법을 이용해 그를 약화시켰다.
화아아아악!
바야바는 마나를 뿜어내어 오토의 마법에 저항하면서, 자신이 왜 신창이라 불리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마상창을 휘두르는 바야바의 창술은 그야말로 정교했다.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창이란 무기의 활용법의 모든 걸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
오토는 바야바의 창술 완성도가 거의 완벽에 가까워져 있다는 것에 놀랐다.
강하고 말고를 떠나서, 창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그 이해도가 가히 절대자들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검술이 더 완벽하다.’
오토는 바야바의 뛰어난 창술을 보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무적검술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비록 바야바의 창술이 뛰어나긴 했지만,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무적검술의 장점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집중.’
오토는 정신을 집중해 바야바의 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 이 무슨?”
바야바는 오토가 자신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방어해낸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창술을 완벽하다 자부했는데, 그보다 더 뛰어난 검술을 지닌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바야바는 정말로 경악했다.
‘고작 저 나이에 이렇게 완벽한 검술을 수련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바로 그때.
촤락!
오토의 검이 바야바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크윽!”
신음하는 바야바.
“화를 내야 할 건.”
오토가 계속해서 바야바를 몰아붙이며 말했다.
“네가 아니라 나 같은데.”
“……!”
“딴 생각을 해? 감히?”
바야바는 그제야 깨달았다.
무시를 당한 게 아니라, 자신이 오토 일당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대가는 치러야겠지?”
오토가 바야바를 향해 무적검술을 전개하며, 본격적으로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 * *
‘보인다.’
오토는 자신이 어느 순간 바야바의 모든 약점들을 파악해 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바야바의 창술은 명성에 걸맞게 뛰어났고,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빈틈이 많았다.
오토가 수련한 무적검술의 수준이 바야바의 창술보다 최소한 두세 단계는 더 완성도가 높다는 증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제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바야바는 분명히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강자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창술의 정교함과 완성도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엘리제나 카이로스와 같이 초인의 경지를 이룩한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토는 그런 엘리제와 한 달에 한 번 대련하며 수련해 온 사람.
게다가 얼마 전 리볼트라는 강자를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촤락!
촤라라락!
오토의 검이 돌연 사나운 파도처럼 바야바를 향해 몰아쳤다.
쾅!
콰앙!
검에 실린 파괴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거대한 마상창을 든 바야바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어느새 검에 강력한 파괴력을 담아낼 정도로 오토의 실력이 진일보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순간.
콰아앙!
와장창창!
오토의 검과 충돌한 바야바의 마상창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갔다.
마상창이 검에 실린 그 엄청난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고만 것이다.
“……!”
놀란 바야바.
푸욱!
오토의 검이 바야바의 가슴 정중앙을 관통했다.
“커헉!”
바야바가 피를 토하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가.”
바야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결례를… 저질렀군… 이런 강자를 알아보지 못… 내 무례를….”
거기까지.
툭.
바야바의 고개가 힘 없이 떨어졌다.
“……!”
“……!”
“……!”
한편,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이 믿지 못할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바야바가 신흥강국의 왕에게 결투에서 패배하고, 그대로 전사할 줄이야.
“여봐라.”
오토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 전하.”
몇몇 마검사들이 오토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적 총사령관이다. 시신을 잘 수습해서 체로키 왕국으로 보내라.”
“예.”
오토는 바야바의 명예 정도는 지켜주기로 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자만심을 뉘우쳤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우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검사들이 바야바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이.
“총사령관 바야바는 전사했다. 그러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오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분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만 전투를 끝내고 싶었다.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될 지경.
체로키 왕국군 전사자들의 숫자를 세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분지를 가득 채운 피 냄새 때문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하, 항복!”
“항복이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그러자 체로키 왕국군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하나둘 항복하기 시작했다.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살육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총사령관까지 전사했으니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 * *
체로키 왕국군들이 항복하기 시작했음에도, 전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죽어라!”
“이 개새끼들! 죽어! 죽으란 말이다!”
오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항복하는 체로키 왕국군들을 마구잡이로 죽여 대는 이들이 있었다.
그건 이오타 왕국군과 로우레딘 왕국군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 현상이었다.
“제, 제발 그만! 제발 살려 ㅈ… 크악!”
“흐흐흐!”
그건 그들이 미치광이 살인마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전투가 주는 긴장감과 흥분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거였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적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보니 그만 정신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건 일종의 PTSD로서, 실전을 경험한 군인들이라면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정신적인 문제였다.
육체의 상처는 치유된다.
비록 후유증이 남을지라도, 치료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적인 상처를 입으면, 그 치유는 쉽지 않다.
계속된 전투로 정신이 망가진 장병들은, 비록 육체는 치유될지언정 평생 악몽 속에 살아가야 할 게 분명했다.
“…전투는 병사가 죽어야 비로소 끝난다는 건가.”
오토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씁쓸해했다.
지금 미쳐 날뛰거나, 혹은 주저앉아 괴로워하는 장병들의 인생이 앞으로 얼마나 고달플지 생각해 보면 도저히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들이 거듭된 전쟁과 전투로 인해 받은 정신적인 상처와 고통은 무엇으로 보상하나.
오토는 문득 마음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우두커니 선 채로 괴로워했다.
죽은 체로키 왕국군도 불쌍하다.
또한, 승리한 아군 장병들 역시도 불쌍하긴 매한가지였다.
‘저들은 전쟁터로 몰아넣은 건 나다.’
문득 자책감도 밀려들었다.
그건 전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뇌였다.
“뺀질아.”
그런 오토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카이로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과거 수천 번도 넘는 전투를 치러본 카이로스로서는 현재 오토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무게감에….”
“아니.”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있어.”
“……?”
“내가 책임지면 돼.”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학살의 서를 꺼내 들었다.
“저들은 전쟁터로 내몬 건 나야.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지.”
스으으으!
영혼에너지를 듬뿍 빨아들인 대학살의 서가 선명한 초록색 섬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 왜 여기서 멈추는가? 더 죽여라! 충만한 힘이 느껴지지 않나? 권능을 사용하라!
목소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더 죽이라고.
더 죽여서 영혼에너지를 흡수하라고.
하지만 오토의 다음 행동은 목소리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촤라락!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펼쳤다.
“…येषां प्रा.”णाः
뒤이어 오토의 입에서 고대의 언어로 이루어진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토는 두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노랫말이 분지에 울려 퍼지며, 분지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내가 무슨 짓을.”
“이래서는 안 돼. 난 살인마가 아니야.”
“아아아.”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던 장병들이 마치 순양 양처럼 돌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편안해… 한없이 편안해.”
“부디 죽어서는 안식을 되찾기를.”
다른 장병들 역시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토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건 영혼에 상처를 입은 자들을 치유하는 권능이 담긴 고대의 노래였다.
그렇게 이번 전투로 충전된 영혼에너지는, 장병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데 쓰였다.
즉, 오토는 대학살의 서를 살인이 아닌 모든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노래는 그간 거듭된 전쟁과 전투로 누적된 장병들의 정신적 고통이 말끔하게 씻어내 주었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악몽을 꾸지 않고, 평생 편안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으리라.
“전장을 정리하라.”
노래를 마친 오토가 명령을 내렸다.
“예, 전하.”
그러자 이오타 왕국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장을 정리하는 장병들의 표정은 담담하고, 평온했다.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이용해 불러준 노래 덕분이었다.
오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저, 전하!”
“전하! 휴식을 취하소서!”
오토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수 소매를 걷어붙이고 시체를 옮기는 등 전장 정리에 참여했다.
왕이랍시고 나 몰라라 내빼고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장병들과 노고를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