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로우레딘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자리한 체로키 왕국의 요새.
척! 척! 척! 척!
요새의 지휘관은 본대가 귀환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성벽 위로 향했다.
‘왜 벌써?’
로우레딘 왕국의 수도를 점령하러 간다던 2개 군단이 돌아온 건 분명히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그리고 그런 지휘관의 예상은 적중했다.
척! 척! 척! 척!
저 멀리 복귀하는 체로키 왕국군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지휘관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되돌아온 병력이 고작해야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몰골이 말이 아니라서, 누가 봐도 패잔병의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검은 천으로 덮인 수천 대의 수레들이었다.
저 수레들에 뭐가 실려 있는지는 굳이 천을 걷어 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장 선두에 선 기사들이 들고 있는 관은 최고 지휘관들이 전사했을 때나 사용하는 거였다.
그렇다는 말은…….
‘바야바 총사령관이… 전사했다.’
지휘관은 그 사실을 깨닫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저히 분간하지 못했다.
로우레딘 왕국으로 향했던 2개 군단이 10분의 1로 줄어들어 돌아오질 않나.
수천 대의 수레에 수만 구의 시신이 실려 오질 않나.
거기에 더해 최고사령관인 바야바까지 전사했다?
이는 체로키 왕국 전쟁사에서도 최단기간 가장 처참한 패배로 기록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지휘관은 몸소 요새 밖으로 나가 귀환하는 체로키 왕국군을 맞이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적들의 계략에 당했소.”
바야바를 대신해 패잔병들을 인솔해 온 지휘관이 대답했다.
“분지에서 숙영 중에 이오타 왕국군의 기습을 받았소이다. 함께 있던 로우레딘 왕국군 역시 돌변해서 우리 군을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바야바 사령관께서 전사하셨소이다.”
“…….”
“국경을 열어 준 것 자체가 놈들의 함정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소.”
“어찌 그런 일이….”
“만 오천 명이나 되는 우리 군 장병들이 적들에게 포로로 붙잡히기까지 했소. 전투가 빨리 끝났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로 다 죽었을 것이오.”
이 충격적인 소식에 국경 요새를 담당하는 지휘관은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번 패배는 일개 야전 지휘관 따위가 생각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소식이 국왕의 귀에 전해진다면 그 여파는…….
‘어쩌면 전사하신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국경 지휘관은 바야바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총사령관으로서 이 정도 패배했는데 살아 돌아왔다는 건 차라리 죽느니만 못했다.
살아 돌아왔다 한들 결국엔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 테고, 그 대가는 처형이라는 불명예일 게 뻔했다.
차라리 전사하는 편이 명예로운 죽음이었던 것이다.
* * *
바야바의 패전 소식은 매우 빠르게 칼마르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워낙에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여러 명의 전령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서 이 사실을 보고했던 것이다.
“…뭐라 했는가.”
칼마르는 이 보고를 듣고 제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좋지 못한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토르문트… 이 비열한 작자가 감히!”
칼마르는 이번 사건의 원흉인 토르문트를 떠올리며 분노했다.
토르문트를 믿고 진행했던 군사 작전이었는데, 이오타 왕국과 짜고 이런 비열한 계략을 준비했을 줄이야.
“내 반드시… 반드시 그 토르문트라는 자에게 복수할 것이오. 내 언젠가 토르문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처형하고야 말겠소.”
칼마르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진행했던 군사 작전이 이렇듯 비열한 계략에 의해 완벽한 실패로 끝나 버릴 줄이야.
심지어 그 피해도 가히 어마어마했다.
딸려 보냈던 식량, 물자, 금괴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어디 그뿐인가?
전사자들의 가족들에게 지급해야 할 위로금과 연금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재정적 지출이 발생할지 가늠하기도 두려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런 빌어먹을. 개전 초기부터 이렇게 피해가 누적되면.’
민심의 악화.
그게 가장 뼈아팠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 있게 일으킨 전쟁이 개전 초부터 처참한 패배만을 기록하고 있으니, 칼마르에 대한 불만이 쌓이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불과 2주일 사이에 무려 3만 명이 넘는 전사자들이 발생했으니, 체로키 왕국으로서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전하! 이오타 왕국의 기병대가 아군의 보급 행렬을 습격해, 보급품을 모두 불태웠다고 하옵니다!”
“이오타 왕국의 기병대가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와 학살을 벌이고 있사옵니다!”
“전방으로 이동하던 우리 군의 추가 병력들이 적 기병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옵니다!”
아무칸이 이끄는 이오타 왕국의 기병대가 후방을 뒤흔들고 있다는 보고까지 올라오자 칼마르는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오타 본토 공격은 어떻게 되었소.”
칼마르가 물었다.
“그, 그것이.”
신하가 대답했다.
“계속해서 공격하고는 있으나… 워낙 철옹성 같은지라 쉽지 않은 상황이라 하옵니다.”
“이오타 왕국군의 피해는 얼마나 되오?”
“마, 망극하옵니다.”
신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이오타 왕국군 측 전사자는 100명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주 동안 수십 차례의 공성전을 치렀음에도, 고작 그 정도의 피해밖에 입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이오타 왕국군과 체로키 왕국군의 교환비가 20대 1은 가볍게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오타 왕국군의 전투력은 신흥강국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여느 강대국들에 못지않을 만큼.
‘이건 위험하다.’
칼마르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자신 있게 일으킨 전쟁이 초반부터 이렇게 꼬였으니,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좋지 못했다.
뭔가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국왕인 칼마르라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컸다.
“전선에 백사자 기사단을 투입하겠소.”
결국, 칼마르는 초강수를 두었다.
근위기사단이자 왕국 내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기사들을 투입해 어떻게든 국경 요새를 뚫어내겠단 의지를 보인 것이다.
* * *
체로키 왕국군 2개 군단을 격파한 오토는 약간의 병력만을 남겨 둔 채 로우레딘 왕국을 떠났다.
어차피 로우레딘 왕국은 사실상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굳이 병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이로스를 총독으로 임명한 뒤 로우레딘 왕국에 박아 두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행군 속도를 더 높이세요.”
“예, 전하.”
오토는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고 서둘러 헬무트가 있는 요새로 향했다.
“행군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말했다.
“아무리 우리 군이라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부담이 클 거 같습니다. 속도를 좀 줄….”
“아니.”
오토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빨리 가야 돼. 1분 1초가 아까워.”
“헬무트 후작님이 걱정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오토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듯 대꾸했다.
“아무리 헬무트 후작이라도 한계는 있어. 지금쯤 헬무트 후작뿐 아니라 국경 요새를 지키고 있는 우리 장병들도 다 지칠 대로 지쳐 있을 거야. 그리고.”
오토가 덧붙였다.
“지금쯤 칼마르 국왕의 마음이 급해져 있을 거야. 개전 초기부터 연거푸 삽질만 하고 있으니까. 무리해서라도 어떻게든 국경 요새를 뚫어내려고 할 거야.”
오토는 멀리 떨어진 칼마르의 심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능력도 뛰어나고. 좋은 성물도 가지고 있고. 그걸 이용할 줄도 알고. 팔방미인이지. 이제 갓 왕위에 오른 젊은 왕이라 의욕이 앞서 무리수를 자주 둔다는 것만 빼면.’
오토는 칼마르라는 캐릭터의 성격과 행동 패턴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오토는 행군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칼마르가 무리해서라도 총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최대한 빨리 헬무트를 도와주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 * *
오토의 예상대로, 헬무트를 포함한 이오타 왕국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원군의 소식은 없는가.”
헬무트는 오늘 하루에만 벌써 열 번도 더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아직 본국에서 도착한 소식이 없습니다, 각하.”
부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허어.”
헬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하께서 우릴 버리실 리 없거늘. 어찌 이리도 늦으신단 말인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전하께서 오실 것입니다.”
부관이 헬무트를 위로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3일도 채 버티지 못한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을 때, 그게 한계였다.
장병들도 지쳐 있을뿐더러, 슬슬 성벽의 내구도도 위태위태했다.
제아무리 변경백의 결의를 사용했다 한들 성벽의 내구도가 무한이 될 순 없는 법.
이대로 몇 번의 전투를 더 치렀다간 성벽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게 분명했다.
즉, 한시라도 빨리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헬무트의 간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야속하게도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그 후로 3일이 더 지나도록.
“저, 적들이 또 몰려옵니다! 이번엔 그 규모가 역대급입니다!”
“안 돼!”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그만 와! 그만 오라고!”
이오타 왕국군은 벌떼처럼 몰려드는 체로키 왕국군을 바라보며 절망했다.
그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음에도 끝도 없이 몰려드는 체로키 왕국군의 숫자에 그만 기가 질려 버린 것이다.
제아무리 사기가 높은 군대라 할지라도 체력적, 정신적 한계에 몰리다 보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법.
‘후회해야 하나?’
헬무트는 순간 고민했다.
더는 버티기 힘든 상황.
어쩌면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으면 어찌어찌 꾸역꾸역 한 번의 공세는 막아낼 것이고.
조금이라도 운이 나쁘다면 이대로 요새를 함락당하고, 이곳에 자리한 장병들의 절반 이상은 살아서 후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사실 지금이라도 요새를 비우고 후퇴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요새를 지켜내지 못하면 본토가 위험하다.’
문제는 요새를 잃는 순간 전쟁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힌다는 것.
이곳은 이오타 왕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다.
설령 그것이 전멸이라 할지라도.
으득!
헬무트는 이를 악물었다.
“곧 지원군이 올 것이다!!!”
헬무트가 크게 소리쳤다.
“전하께서 2시간 내로 지원군을 끌고 오신다 하셨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 딱 2시간만 버티면 된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했다.
아직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무트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헬무트의 임기응변은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2시간이다!”
“그래! 와 봐! 이 개새끼들아!”
“이 악물고 버텨!”
“전하께서 곧 오신다! 2시간! 2시간만 버티자!”
헬무트의 거짓말에 전의를 잃어가던 이오타 왕국군 장병들이 이를 악물고 적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