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칼마르는 최전방에서 올라온 보고를 듣고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멸…?”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이오타 왕국의 국경을 공략하던 군대가 전멸했단다.
심지어, 만 명이 넘는 장병들이 포로로 붙잡혔단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 로베르토를 포함해 기사단 전원이 전사했다는 소식까지도 들려왔다.
반대로, 이오타 왕국군의 전사자는 300명도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즉, 이오타 왕국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체로키 왕국은 국력이 휘청거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
칼마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보고에 한동안 입을 꽉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무려 1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보고를 아무리 곱씹어 본다고 한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토 안을 휘젓고 다니던 이오타 왕국의 기병대 역시 유유히 빠져나가 버려서, 이를 추격하던 체로키 왕국군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쯤 되면 왕위에 오르자마자 개망신을 아주 단단히 당한 셈이었다.
“전사자들을 수습하고… 재정비를 실시하시오. 전사자들에 대한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를 것이오.”
이런 참패를 당했는데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해 주지 않는다면, 민심이 얼마나 흉흉해질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피곤하니 잠시 들어가 쉬겠소.”
칼마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전을 떠나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그렇게 침소에 도착한 칼마르는…….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칼마르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차마 신하들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서, 꾹 참고 있다가 홀로 있게 되었을 때 감정을 터뜨린 것이다.
와장창!
콰앙!
쨍그랑!
칼마르는 가구, 거울, 유리잔, 테이블 등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때려 부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우, 우리… 군이… 흐으….”
칼마르가 광기와 분노로 점칠된 눈을 희번덕거리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지다니… 흐으… 이런… 개 같은… 치욕을… 흐… 흐으으으….”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듯 연거푸 패배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칼마르였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피해라도 주었어야 체면치레를 할 텐데, 이런 패배라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쟁에서 패한 무능한 왕이라고.
“내 반드시… 반드시 네놈의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서… 집어 삼키고 말 것이다….”
칼마르는 이오타 왕국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떠올리며 이를 이를 갈았다.
파직!
이를 얼마나 세게 악물었으면, 어금니 하나가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갈 정도였다.
칼마르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네놈을 수천, 수만 조각으로 회를 떠 버릴 것이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네놈에게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줄 것이란 말이다… 흐으.”
그렇게 칼마르는 나 홀로 분노를 삭이며, 겨우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나 평점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며칠 후.
“…몸값이 얼마라고 하였소.”
칼마르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오타 왕국에서 포로로 붙잡은 병사들에 대한 몸값으로, 나라의 1년 예산보다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 * *
“…….”
칼마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몸값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현재 이오타 왕국에는 2만 5천 명의 포로들이 붙잡혀 있는 상태였는데, 이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외면하자니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고.
그렇다고 정당한 몸값을 치르자니 해도 해도 너무 비싸고.
칼마르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칼마르는 마음 같아선 이오타 왕국이 포로들을 학살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오타 왕국에 대한 백성들의 적개심이 끓어오를 테고, 앞으로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더 유리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여우 같은 이오타 왕국은 포로들을 매우 잘 대해 주고 있었다.
때 되면 밥 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러니 칼마르로서는 이오타 왕국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사신을 보내서… 우리 장병들에 대한 몸값을 좀 깎아 달라고 부탁해 보시오.”
결국, 칼마르는 이오타 왕국을 상대로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을 데려오긴 해야 하는데, 몸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예, 전하.”
명령을 받은 외교관은 즉시 이오타 왕국으로 가 칼마르의 말을 전했다.
“몸값은 깎아 달라 했나?”
오토가 체로키 왕국의 외교관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전하. 부디 우리 장병들의 몸값을 줄여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싫다면?”
“…….”
“전쟁은 귀국에서 먼저 일으켰다.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우리 국경을 침공해 오지 않았나.”
“그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외교관은 능구렁이답게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은 서로의 오해가 빚어낸 우발적인….”
“2배.”
오토는 외교관이 개소리를 늘어놓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자고로 외교관이란 족속들은 말을 빙빙 돌리기를 좋아하고, 궤변을 늘어놓기 일쑤.
그 페이스에 말려들기라도 한다면, 상대방의 의도에 따라 휘둘리기 마련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헛소리 한 번 할 때마다 몸값은 2배로 오를 것이다.”
“저, 전하!”
체로키 왕국의 외교관은 오토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몸값을 깎으려고 왔는데, 되려 2배로 뛰어 버릴 줄이야.
“귀관은 과인을 농락하려 들지 마라.”
오토가 외교관에게 주의를 주었다.
“본국은 전범국과 협상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포로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으나, 아무것도 모르고 명분 없는 침략에 동원된 젊은 인생들이 불쌍해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
“만약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겠다면, 귀국의 포로들로 하여금 강제노역을 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도.”
오토가 덧붙였다.
“앞으로 귀국과의 전쟁에 쓰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데 동원되겠지.”
“…….”
“물론 포로로서 인간적인 대우를 해 줄 것이나, 적어도 본국이 멸망할 때까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노역을 해야 할 테지.”
능수능란한 언변, 그러니까 말빨로 몸값을 깎아 보려던 외교관은 눈앞이 캄캄해져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저, 전하.”
외교관이 읍소했다.
“부디 본래 몸값이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2배라고 했을 텐데.”
“몸값을 깎아 보려던 것은 우리 국왕 전하에 대한 소인의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뿐이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외교관은 오토가 협상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올라간 몸값이라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만약 몸값을 2배로 불려서 돌아갔다간 외교관의 목이 뎅겅 떨어져 나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주도록 하겠다. 한 달 내로 몸값을 지불할 수 있도록 귀국의 국왕인 칼마르에게 전하라.”
“예, 전하.”
오토는 못 이기는 척 2배로 올렸던 몸값을 원래 값으로 돌려주었다.
“아, 그리고.”
“예?”
“과인은 남자답지 못하게 할부 같은 지불 방식은 안 받는다. 그러니 반드시 일시불로 지불하도록.”
“저, 전하!”
“만약 한꺼번에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매달 30퍼센트의 이자를 붙일 테니, 그리 알라.”
“예, 전하….”
체로키 왕국의 외교관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선전포고도 안 했고.
기습적으로 침략한 주제에 대패를 당한 전범국의 입장인지라 오토의 강경한 태도에 항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 * *
체로키 왕국의 외교관이 돌아간 직후.
“전하?”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응? 나 완전 멀쩡한데? 갑자기 왜?”
오토는 카미유가 뜬금없이 자신의 건강 상태를 걱정해 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값을 2배로 올리셨다가 다시 낮추셨잖습니까.”
“그게 뭐 어때서?”
“평소의 전하라면 절대….”
“야 이.”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어?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아?”
“보통 그러시지 않습니까?”
“아니야!!!”
오토가 빽! 소리를 질렀다.
“2배로 올리면 한 푼도 못 받으니까 못 이기는 척 깎아준 거잖아!!!”
“그런 겁니까?”
“처음 부른 금액도 말이 안 되는 금액이었잖아!!!”
“아.”
카미유는 그제야 오토가 자비를 베푸는 척한 이유를 깨달았다.
오토가 체로키 왕국에 요구한 금액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어서, 받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번만큼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2배나 되는 금액이라면 제아무리 체로키 왕국으로서도 들어주기 힘든 요구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제 앞으로 어떡하실 겁니까?”
“글쎄.”
오토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좀 걸으면서 생각해 보려고.”
“예, 전하.”
오토는 카미유와 함께 왕궁을 거닐었다.
“체로키 왕국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하지.”
오토가 카미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재정비만 마치면 다시 침공해 올 걸?”
“대비해야 합니다.”
“당연히 대비해야지.”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오토가 카미유에게 말했다.
“드레이크한테 연락해서 오라고 해.”
“드레이크는 해군이잖습니까. 본국과 체로키 왕국은 내륙국이라 해군이 필요할 일이….”
“있지.”
“……?”
“다음에 벌어질 전쟁에선 해군의 역할이 클 거야.”
카미유는 오토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다나 큰 강이 없는 내륙 국가들끼리의 전쟁에서 해군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드레이크나 불러 줘.”
“알겠습니다.”
오토는 카미유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후 고블린 상인 에고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사옵니까요, 전하.”
“지금 의료품 가격이 어떻죠?”
“어떤 의료품을 말씀하십니까요?”
에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뭐. 여러 가지죠. 각종 포션, 약초, 붕대, 담요, 약 그런 것들이요.”
“소인이 알기에 가격이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요.”
“그럼 다 사죠.”
“예에?!”
에고가 눈을 크게 떴다.
“시장에 풀린 의료품들을 모조리 매점매석 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요?!”
“네.”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 매점매석은 자칫 잘못했다간 큰 손해를….”
“아아.”
오토가 에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단 제스처를 취하며 대답했다.
“의료품 매점매석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그냥 해 주세요.”
“……?”
“그럼, 부탁합니다.”
오토는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서, 이번에는 드워프들을 만났다.
“지금부터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작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드워프 에릭슨은 오토가 뜬금없이 토목공사를 진행하겠단 말을 하자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딱히 토목공사가 필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이나 호수. 지대가 낮은 곳에 제방을 쌓을 겁니다.”
“제방이라 하심은… 물난리가 날 것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거죠.”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토가 덧붙였다.
“구명정도 많이 제작할 수 있을까요?”
“몇 척이나 필요하십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한… 만 척 정도?”
“예에?!”
에릭슨은 오토의 말을 듣고 너무나도 놀라서, 그대로 나자빠질 뻔했다.
무슨 놈의 구명정을 만 척이나 만든단 말인가?
“전하.”
에릭슨이 오토에게 말했다.
“저희 드워프들은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라도 알고 있어야….”
“10월쯤.”
오토가 대답했다.
“대홍수가 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