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안 그래도 잔뜩 흥분해 있던 까막이는 암컷 와이번이 제 앞을 가로막자 매우 화가 난 모양이었다.
“캬아아아아악!”
까막이가 비키라는 듯 암컷 와이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승기를 잡은 이상 까막이로서는 지금 대장 와이번을 끝장내야 했다.
불을 무한정 뿜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까막이 역시 꽤나 지쳐 있는 상태인지라 지금이 아니라면 승리를 거머쥐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캬악! 캬악! 캬아아아악!”
암컷 와이번이 까막이에게 무어라 소리쳤다.
“캬악?!”
그러자 까막이가 순간 당황했는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뒤이어 다른 암컷 와이번 한 마리가 다가와 쓰러져 있는 대장 와이번을 감쌌다.
“이, 이게 뭔 상황이야?”
“귁? 펭이도 모르겠다! 귁! 와이번이랑은 말 안 통한다! 귀익!”
카심과 펭이는 이게 뭔 상황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자연계에서는 우두머리를 가리는 싸움이 시작되면 다른 개체들은 끼어들지 않는 게 불문율이요, 자연의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캬악! 캭! 캭캭캭!”
어린 암컷 와이번이 까막이를 향해 무어라 무어라 소리치며 압박했다.
“캬, 캬악?!”
까막이가 또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캭! 캭캭! 캬아아악! 캭!”
“캬아악….”
“캬아악! 캭! 캭캭캭! 캭! 캬아아아아아아!”
“캬, 캬아아악. 캭캭….”
“캬아아악! 캭! 캬아아아악!”
“…캭캭.”
“캬아아아악!”
어찌된 일인지, 까막이는 암컷 와이번의 기세에 밀려 더 이상 대장 와이번을 공격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용히 물러나 카심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까막아? 너 왜 그래?”
카심이 까막이에게 물었다.
“우리 까막이가 이겼잖아? 왜 물러서는 거야?”
“…캬아악.”
까막이가 쭈그리처럼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뭐, 뭐지.”
카심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중.
“아!”
뭔가 깨달은 카심이 탄성을 내질렀다.
“까막아! 저 암컷 와이번이 대장 와이번의 딸이야?”
카심이 까막이에게 물었다.
“캬, 캬악!”
그러자 까막이가 카심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비로소 상황을 이해한 카심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려니 했다.
저 암컷 와이번이 대장 와이번의 딸이라면, 모든 게 깔끔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고오.”
카심이 까막이를 위로했다.
“하필 골라도 대장의 딸을 골랐구나. 에구, 내 새끼.”
“캬, 캬아악.”
“괜찮아. 다른 암컷 와이번을 찾아보면 돼.”
“캬아아악….”
카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까막이는 상심이 매우 큰 듯했다.
장인어른(?)을 두들겨 패고 그 자리를 뺏으려고 한 꼴이 되어 버렸으니, 점찍었던 암컷 와이번과의 관계는 사실상 파탄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우두머리가 된 이상 강제로 짝짓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까막이가 하는 행동을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캬아악….”
카심이 까막이를 위로해 줄 때.
“캬아아악.”
쓰러져 있던 대장 와이번이 몸을 일으키더니, 까막이를 향해 다가왔다.
“캬악! 캬아아아악!”
대장 와이번이 까막이를 향해 무어라 울부짖었다.
“캬악?!”
까막이가 대장 와이번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캬악?! 캬악! 캬아아악! 캬아악!”
“캬악! 캬아아악! 캬악!”
“캬아아악! 캬악!”
“캭! 캭캭! 캬아아악!”
“캬아아아악?!”
“캬악! 캭캭! 캭캭캭칵!”
까막이와 대장 와이번은 한참 동안이나 대화(?)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나누었다.
“뭐라는 거야?”
“귁! 펭이도 모른다! 귁귁!”
카심과 펭이는 영문도 모른 채 까막이와 대장 와이번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약 5분쯤 흘렀을까?
“캬악!”
대장 와이번이 까막이의 앞발을 들어 보이며, 승리를 인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캬, 캬악!”
까막이는 대장 와이번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이내 곧 늠름하고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포효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것은 승리의 함성이었다.
즉, 까막이는 장인어른(?)으로부터 이 무리의 새로운 우두머리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 * *
까막이와 대장 와이번의 대화를 유추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너를 새로운 우두머리로 인정하겠다.’
‘예?’
‘너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블랙 와이번. 언젠가 우두머리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면, 젊은 블랙 와이번이길 바랐다.’
‘어, 어르신!’
‘너는 나를 이겼다. 그러니 이제부터 네 녀석이 우리 무리의 우두머리다.’
‘……!’
‘날개들이여! 새로운 우두머리가 탄생했다!’
물론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와이번들만의 의사소통 방식으로 이루어진 대화인지라, 정확한 건 아니었다.
단지 내용이 저럴 것이다, 하고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 추측이 꽤나 그럴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캬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아악!”
“캬악! 캬아아악! 캬아아악!”
와이번들이 까막이를 둘러싸고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마치 새로운 우두머리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처럼 말이다.
“캬악! 캭캭캭! 캬악!”
대장 와이번.
아니, 이제는 장로(長老) 와이번이 된 개체가 까막이를 향해 제 딸을 슬쩍 떠밀었다.
앞으로 장로 와이번은 이 무리의 전(前) 우두머리이자 지혜로운 연장자이며, 까막이의 장인어른으로서 이 무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면, 와이번이란 생명체는 꽤나 지능이 높고 사회성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 우두머리를 제거하거나 쫓아내지 않고, 전 우두머리 역시 새로운 우두머리를 인정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게 분명했다.
“캬, 캬앗!!!”
암컷 와이번은 아버지가 등을 떠밀자 못 이기는 척 까막이의 날개 아래로 파고들었다.
“캬악!!!”
까막이가 암컷 와이번을 자신의 날개로 품으며, 늠름하고도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오오오오!”
“귀이이익!”
그 광경을 본 카심과 펭이는 환호했다.
그건 까막이가 이 와이번 무리의 우두머리로 등극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짝을 찾았다는 걸 의미했다.
“까막아! 축하한다!”
“귁! 축하한다! 귀익!”
카심과 펭이는 까막이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알에서 깨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어엿이 한 무리의 우두머리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 되다니.
주르륵!
카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고, 내 새끼. 다 컸구나, 다 컸어.’
까막이를 바라보는 카심의 마음은 자식을 장가보내는 아버지와 같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져서, 괜히 섭섭한 마음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캬악! 캬아아악!”
“캬아아악!”
까막이와 암컷 와이번은 서로의 목을 휘감으며 구애의 몸짓에 열중했다.
이대로라면 곧 짝짓기를 끝마치고 알까지 초고속으로 낳을 기세였던 것이다.
* * *
그 후 카심은 한동안 와이번들의 둥지에서 머물며 까막이와 암컷 와이번이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심과 펭이는 암컷 와이번에게 꽃순이란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까막이와 꽃순이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구애 활동과 애정행각을 하더니, 기어코 동굴에 들어가 짝짓기까지 나누었다.
“…나도 아직 미혼인데.”
카심은 까막이가 부러웠다.
워낙에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애인 하나 없는 카심으로서는, 당당하게 결혼(?)에 성공한 까막이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귁! 힘내라! 귁귁! 카심도 예쁜 색시 생길 거다! 귀익!”
펭이가 카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까막아. 이제 가야 돼.”
“까악?”
“아빠가 좀 바빠서. 여기 있어. 데리러 올게.”
카심은 언제까지 와이번들의 서식지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까막이와의 이별을 고했다.
언제 체로키 왕국이 침공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세월아 네월아 와이번들의 서식지에 머물러 있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았고.
“까아아아아악!”
그 말에 잠깐 카심의 사돈(?)인 장로 와이번과 눈을 맞춘 까막이가 카심을 향해 몸을 바짝 엎드렸다.
“응? 타라는 거야?”
“까악!”
“데려다주려고?”
“까아악!”
“그래, 고맙다.”
카심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까막이의 등에 올라탔다.
펄럭!
까막이가 날아오르고.
펄럭, 펄럭!
뒤이어 다른 와이번들 역시 하늘 높이 솟구쳐 놀랐다.
“어어?”
카심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50여 마리의 와이번들이 일제히 까막이를 뒤따라 편대비행을 시작했다.
새로운 우두머리를 따라 무리 전체가 떼 지어 이동하는 것이다.
“왜 다 같이 가는 거야???”
“까악! 까아악!”
까막이가 무어라 대답했지만, 카심은 그 울음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카심은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까막이와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긴 했지만, 말뜻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이럴 땐 그저 흘러가는 대로 떠밀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 *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슬슬 서늘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륵!
주르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비로군.”
체로키 왕국의 국왕 칼마르는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이 비가 그치면… 이오타로 진격할 것이다.”
칼마르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체로키 왕국은 지난 번 패배 이후 모든 국력을 총동원해서 전쟁에 대비했고, 지금 당장에라도 이오타를 침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비가 그치면, 칼마르는 공식적으로 이오타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움직일 예정이었다.
“전군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채 출정에 대비하라.”
“예, 전하.”
하지만 그런 칼마르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부슬부슬 마치 봄비처럼 내리던 가을비가 하루 이틀이 지나도 계속 내렸다.
칼마르는 기다렸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출정식 날에 비가 온다는 건 불길한 징조라는 속설이 있어서, 웬만하면 날이 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빗줄기를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처음에는 이게 비인가 싶을 정도로 약하던 빗방울들이 어느새 어른 손가락만 한 굵기로 커졌고, 온종일 쉴 새 없이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가 거세진 지 딱 24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 맙소사.”
칼마르는 비로소 깨달았다.
“설리번 그놈의 예측이 옳았다는 말인가?”
난리도 아니었다.
“전하! 수도 곳곳이 잠겼사옵니다!”
“물이 왕궁 입구까지 차올랐사옵니다!”
“전하! 강이 범람해 근처의 도시들이 모조리 물바다가 되었다고 하옵니다!”
물난리로 인한 수해(水害)에 대한 보고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나라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이게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렸다.
저녁 때 즈음에는 왕궁 절반이 물에 잠겨 버려서, 국왕인 칼마르와 신하들이 높은 층으로 피신해야 했을 지경이었다.
“이, 이 무슨.”
첨탑 위에 올라선 칼마르는 수도를 내려다보며 절망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나라의 수도이니만큼, 그 거대한 대도시가 시커먼 흙탕물에 잠겨 흔적조차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을지 감히 짐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아… 아아아아….”
칼마르는 털썩 주저앉아 절망했다.
설리번의 예측이 현실이 된 이상 체로키 왕국에 희망이란 없었다.
한낱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막을 어떻게 막겠는가?
칼마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물에 빠져 죽지 않게 도망치는 것과 나라 전체가 물에 잠겨 멸망하는 걸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설리번을 이오타 왕국의 간첩이라 의심하고, 물난리에 대비하지 않았던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