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체로키 왕국이 수해로 인해 물난리를 겪고 있을 무렵.
이오타 왕궁에서는…….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오토는 낙엽이 진 정원의 정취를 즐기며 한가롭게 티타임을 가졌다.
“이야. 날씨 조오타아.”
오토는 하늘을 바라보며 선선한 가을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은 드높았고, 또한 맑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럼, 좋지.”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기분이 안 좋겠어.”
“저도 그렇습니다.”
“으응?”
오토는 카미유가 기분 좋다는 말을 하자 제 귀를 의심했다.
기본적으로, 카미유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특히나, 무언가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오토가 괜히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감정 기복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카미유가 다혈질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정도.
그런 카미유의 입에서 기분이 좋다는 말이 튀어나왔으니, 오토의 입장에선 귀를 의심할 수밖에.
“기분이… 좋다고?”
“안 됩니까?”
“그건 아니긴 한데. 보통 기분이 좋아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지 않나? 내 기억엔 아예 없는 거 같은데?”
“오해십니다.”
“오해는 개뿔.”
카미유가 피식 코웃음 쳤다.
“내가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데.”
“하하.”
“우, 웃기까지 한다고?!”
오토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싹!
어찌나 놀랐느냐 하면, 팔에 솜털이 곤두서고 닭살이 쫙 돋았을 정도였다.
“제가 웃는 게 이상하십니까?”
“이상하지 안 이상해?”
오토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듯 되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큰 병 걸렸어? 쫌 있으면 죽어?”
“…….”
“불치병 같은 건 아니지?”
카미유는 오토의 물음이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그, 그게.”
“……?”
“사실.”
카미유는 차마 말을 꺼내기 힘들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결혼합니다.”
“아.”
오토의 얼굴에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단 표정이 떠올랐다.
“뭐. 그럴 나이긴 하지.”
“안 놀라십니까?”
“어차피 결혼할 거였으면서. 난 또 뭐라고.”
오토는 카미유의 결혼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이미 게임을 통해 여러 번 겪어본 이벤트인지라 딱히 놀랍지 않았던 것이다.
“별일 아니네, 뭐. 축하할 일이지.”
“감사합니다.”
“언젠데?”
“내년 봄에 하기로 했습니다.”
“시기도 좋네.”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결혼식은….”
“가까운 지인 몇 명만 모여서 소박하게 치르고 싶다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꼭 알아야 아나.”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전하! 체로키 왕국에 큰 비가 내려 국토 전체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전령이 다가와 보고했다.
“알겠습니다.”
오토는 보고를 받자마자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오토는 즉시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고 체로키 왕국과의 국경지대로 향했다.
쏴아아아아아아!!!
국경 건너편에는 그야말로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정말이지 비현실적이었다.
이오타 왕국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반면 체로키 왕국의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국경을 경계로 세상이 둘로 나뉜 것처럼…….
촤아!
촤아아아!
국경 근처에는 체로키 왕국에서부터 밀려든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이오타 왕국에는 단 한 방울의 물방울도 넘어오지 못했다.
오토가 지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제방.
드워프들이 설계하고, 체로키 왕국군 포로들의 노동력으로 쌓아 올린 제방이 무시무시한 물폭탄으로부터 이오타 왕국을 굳건히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구명정들과, 구명조끼를 입은 이오타 왕국군들이 진영을 갖춘 채 오토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오타 왕국군!”
오토가 이오타 왕국군을 사열(査閱)하며 소리쳤다.
“오늘 우리의 적은 체로키 왕국군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물과 싸울 것이다! 우리 이오타 왕국군의 적은! 대자연이다! 우린 자연과 맞서 싸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오타 왕국군 장병들이 일제히 거대한 함성을 내질렀다.
“지금부터 우리의 임무는! 대홍수에 난 체로키 왕국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죽이는 것만이 전투가 아니다! 살리는 것도 전투다! 구해라! 그리고 살려라! 우리 임무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거기에 적과 아군은 없다! 알겠나!”
“예!!!”
이오타 왕국군 장병들이 마치 벼락과 같이 소리치며, 오토의 연설에 응답했다.
그런 장병들의 모습에 오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기회가 되기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곁에 있던 카미유가 오토의 혼잣말을 듣고 물었다.
“아, 그게.”
오토가 희게 웃었다.
“항상 죽이기만 했잖아.”
“예?”
“우리 장병들 말야. 늘 전투에 나서서 적들을 죽이고, 죽었잖아.”
“그야….”
“전쟁이 그렇지 뭐. 근데.”
“……?”
“늘 전쟁터에서 적들을 죽이기만 하다가,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한다면 느낌이 좀 다르지 않겠어?”
“……!”
“난 우리 장병들이 이번 기회에 그걸 좀 느꼈으면 해. 전쟁터에서 적과 싸워 죽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지키고 구할 수도 있다는걸.”
“저, 전하.”
카미유는 오토의 말을 듣고 정말이지 놀랐다.
이렇게까지 속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우리 장병들이 입은 정신적인 상처가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치료됐으면 좋겠어, 나는.”
오토는 군인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로우레딘 왕국에서 벌어졌던 전투 당시에도 대학살의 서를 이용해 장병들의 정신을 치유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아무튼, 우리도 가자.”
“예, 전하.”
오토는 카미유와 함께 제방 위에 올라서서, 품속에 있던 유리병을 물바다가 된 체로키 왕국을 향해 내던졌다.
풍덩!
촤라라라락!
그러자 검은 함대가 그 위풍당당하고도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내며, 물 위에 둥둥 떠올랐다.
“지휘해.”
오토가 드레이크를 돌아보았다.
“예, 전하.”
그러자 드레이크가 꼬르륵 군도에서 데려온 해군 장병들을 검은 함대에 승선시켰다.
그와 동시에 이오타 왕국군 역시도 구명정을 띄우고, 거기에 탑승했다.
그렇게 검은 함대와 수천여 척의 구명정들은, 물바다가 된 체로키 왕국의 수도를 향해 나아갔다.
육지에서 펼쳐진 수전(水戰)이 시작된 것이다.
* * *
체로키 왕국으로 들어간 이오타 왕국군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오토는 미리 체로키 왕국의 지형정보를 분석해 놓았기에, 어느 지역이 위험하고 어느 지역이 안전한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토는 함대를 이끌고 물바다가 된 지역을 돌아다니며, 물에 빠진 체로키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가,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구조를 받은 체로키인들은 이오타 왕국군 장병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일단 이 담요부터 덮고, 따뜻한 우유부터 드십시오.”
이오타 왕국군은 그런 수재민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적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각인시켜 주었다.
오토가 미리 사재기해 놓았던 식량과 의료품들은, 그렇게 체로키인들을 위해 쓰였다.
그 후로도 이오타 왕국의 함대는 체로키 왕국을 순회하며,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안전한 지역에 데려다 놓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
“그래, 우린 살인마가 아니야. 우린 군인이다.”
구조 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이오타 왕국군 장병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체로키인들을 구하면서, 전쟁 중 얻은 정신적인 고통과 죄책감을 상당 부분 덜어냈던 것이다.
한편, 오토의 마음은 의외로 착잡했다.
‘꼭 이렇게 누군가는 죽어야 하네.’
물바다가 된 체로키 왕국의 국토를 바라보고 있자니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마땅치 않았다.
둥둥 떠내려가는 시체들을 볼 때마다 밀려드는 죄책감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바루나의 물기둥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오타 왕국이 물바다가 되었을 테지만…….
“전하께선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카미유가 씁쓸해하는 오토를 위로했다.
“대신 이렇게나마 체로키인들을 구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
“모두를 구할 순 없습니다.”
“그래, 그런 거겠지.”
오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수도로 가자. 가서, 칼마르를 잡자고. 그래야 이 비가 그쳐.”
오토는 이 비가 그치지 않으리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비는 앞으로도 몇 주는 계속해서 퍼부을 테고, 그때가 되면 그나마 안전했던 지역들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토가 칼마르를 체포해서 왕권을 이양받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체로키 왕국의 영토가 이오타 왕국의 영토로 판정되면서, 바루나의 물기둥이 힘을 발휘해 이 비가 그치게 될 터였다.
“가자.”
오토가 명령했다.
“비, 그치러.”
오토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오타 왕국군 함대가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칼마르가 있는 수도를 향해서.
* * *
체로키 왕국의 피해는 가히 어마어마했지만, 특히나 수도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체로키 왕국의 수도는 지형적으로 분지에 자리하고 있는데다가, 수도 근처에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체로키인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수해에 대비가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어지간한 비에는 피해가 없을 만큼 철저하게 대비되어 있어서, 지난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문제가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 내린 비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작정하고 퍼부어 대었을 뿐 아니라, 그 양이 가히 역대급이었다.
그래서 강은 범람했고, 물은 제방을 넘어 분지 지형인 수도로 쏟아져 들어갔으며, 수도는 그 길로 물에 잠기고 말았다.
칼마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오타 침공을 위해 훈련시킨 군인들?
이 엄청난 수해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아무리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들,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엄청난 물난리에 대응하는 건 불가능했다.
현재 체로키 왕국군의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구명조끼가 있는가? NO.
물과 친한가? NO.
배가 있는가? NO.
수영을 잘하는가? NO.
그 어떤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체로키 왕국군은, 평범한 백성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배라고는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선 몇십 척밖에 없는 내륙국가에서 이만한 대홍수가 나 버렸으니, 대응할 만한 수단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아… 아아아….”
첨탑 위에 선 칼마르는 물에 잠겨 버린 수도를 내려다보며 대성통곡했다.
이제 체로키 왕국은 사실상 망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도 전체가 물에 잠겨 버렸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다.
수도가 이 지경이라면, 다른 지역이 어떨지는 안 봐도 훤했다.
칼마르는 비가 내리는 동안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한 채 그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설리번을 간첩으로 몰아간 걸 후회하는 것도 후회하는 것이었지만, 칼마르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바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사태를 수습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물론, 비가 그치고 난 뒤 해야 할 복구작업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오타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기르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망해 버릴 줄이야.
이제 칼마르는 망국(亡國)의 왕으로서,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할 터였다.
“저, 전하!”
그때.
“저, 저길 보시옵소서!”
한 신하가 저 멀리 물바다가 된 수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칼마르는 썩은 동태눈깔이 된 눈으로 신하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가, 제 눈을 의심했다.
‘이 무슨…?’
검은 함대.
거대한 검은색 군함들이 수천여 척의 구명정들을 이끌고 왕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