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오타 왕국군은 체로키 왕국군이 아닌, 초토화되어 버린 환경과 싸워야만 했다.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체로키 왕국의 몰골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둘 순 없는 노릇.
“지금부터 복구 작전을 실시하겠다. 이 또한 전투다. 대민지원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임할 수 있도록.”
“예! 전하!”
이오타 왕국군은 오토의 명령에 따라 복구작업에 나섰다.
우선 참혹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고,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또한,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도로를 정비하기도 했다.
작업에는 이오타 왕국군만 동원된 게 아니었다.
포로로 붙잡혀 있던 포로들도 복구작업에 투입되었다.
오토는 그들에게 복구작업이 끝나면 군인 신분으로 이오타 왕국에 복무하거나, 혹은 전역 후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약속했다.
포로들은 지난 3개월 동안 이오타 왕국군에서 받았던 좋은 대우와 복지에 매료되어서, 대부분 입대를 신청했다.
삶의 터전이었던 체로키 왕국의 영토가 초토화되는 바람에 먹고살 길도 막막한지라, 이참에 너도나도 입대를 신청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오타 왕국은 따로 모병이나 징집을 할 필요 없이 2만여 명의 군인들을 손쉽게 늘릴 수 있었다.
포로들만 복구작업에 동원된 게 아니었다.
오토의 명령에 따라서, 체로키 왕국의 귀족들도 복구작업에 동원되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해야 했다.
계급?
혹은 신분?
오토는 상관하지 않았다.
칼마르와 함께 있던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복구작업에 참여해야 했다.
설사 그게 공작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런다고 모든 귀족들이 복구작업에 성실하게 임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귀족들은 하인이나 기사를 보내 복구작업을 대신하게끔 했다.
또 다른 귀족들은 복구작업을 설렁설렁 대충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꾀병을 부리는 등 불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귀족으로서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배어서, 복구작업 같은 고된 육체노동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복구작업에 나온 귀족들도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개 같은!!!”
체스터 공작은 복구작업을 하던 도중 삽을 내던지며 분노를 토해내었다.
“왜 내가 이따위 잡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왜!”
그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공작의 신분으로 더러운 복구현장에서 진흙을 뒤집어써 가며 일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박해를 해도 유분수지! 고귀한 우리 귀족들에게까지 천한 것들이나 하는 육체노동을 시키다니! 오토 드 스쿠데리아 전하께선 귀족들에 대한 대우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으신단 말인가!”
체스터 공작은 오토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드러내었다.
아무리 정복자라 하더라도 공작의 신분을 가진 자신에게 육체노동을 강요하는 게 못내 불만이었고, 땀 흘려 일하다 보니 그게 폭발해버린 것이다.
“더 이상 이런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 그대들은 무얼 하는가! 계속 이따위 노동을 할 셈인가?”
체스터 공작이 같은 현장에서 일하던 체로키 왕국 출신의 귀족들에게 소리쳤다.
“우린 사회 지도층으로서 학식과 품위를 갖춘 고귀한 자들이 아닌가! 이런 대우를 받을 순 없다! 전하께서도 이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능력이 필요할 터! 우리를 이리 대우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자 몇몇 귀족들이 체스터 공작의 말에 동조해 부화뇌동했다.
“그렇습니다!”
“어찌 이런 모욕을 주신단 말입니까?”
“이런 빌어먹을!”
귀족들이 너도나도 삽과 곡괭이를 내팽개치고, 오토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지들이 언제까지 귀족이라고.”
한 중년 남성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뭣이?”
체스터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뭐라 했느냐?”
“언제까지 귀족이냐고 했소.”
그 중년 남성은 이번 수해로 인해 아내를 잃었던 사람으로서, 무능한 왕실과 귀족들에 대해 울분이 차 있는 상태였다.
“네놈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뚫린 입이니까 한마디 하는 거요! 다 같이 망해 버렸는데! 언제까지 귀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릴 거요! 이런 x발!”
복구현장에서 일하던 다른 사람들도 체스터 공작과 귀족들을 둘러싸며 너도나도 한 마디씩 던졌다.
“무능한 새끼들!”
“니들이 홍수에만 대비했어도 우리 인생이 이리 비참해지진 않았을 거다!”
“이 개새끼들아! 니들이 그렇게 잘났냐!”
흉흉해진 민심.
“자중하십시오.”
이오타 왕국의 기사 하나가 나서서 체스터 공작과 귀족들을 뜯어말렸다.
“민심이 흉흉합니다. 계속 소란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뭣이?”
체스터 공작이 이오타 왕국의 기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지금 일개 기사 주제에 공작인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그게 아니오라.”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명령하신 복구작업입니다. 작업에 태만하시면 명령 불복종으로….”
짜악!
체스터 공작이 기사의 뺨을 후려쳤다.
“아무리 점령군이라 한들! 일개 말단 기사 주제에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
“그럼, 잘나신 국왕 전하께서는 복구작업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시고 편하게….”
바로 그때.
“국왕 전하 납시오!”
때마침 오토가 카미유를 포함한 수행기사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오토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작업복은 진흙투성이가 된 지 오래라, 진흙이 엉겨 붙은 채 굳어 있었다.
그 잘생긴 얼굴 곳곳에도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신고 있는 장화 역시 더럽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어깨에는 삽과 곡괭이를 짊어지고 있어서, 조금 전까지 어디선가 열심히 복구작업에 임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후.”
오토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채고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저, 전하.”
체스터 공작은 오토의 몰골을 보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국왕이 직접 복구작업을???’
체스터 공작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고귀한 신분인 국왕이 고된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다니…….
“체스터 공작?”
“예, 전하.”
“지금 무슨 상황인지, 어디 한 번 니 주둥이로 직접 지껄여 봐.”
“……!”
“직접 지껄여 보라고.”
체스터 공작을 추궁하는 오토의 말에는 상당한 날이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토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직접 복구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무너진 건물의 보수를 돕는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건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오토는 복구작업이 시작된 날부터 지금까지, 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다.
식사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현장에서 빵, 우유, 염장고기로 간단히 때울 정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루빨리 수습해야 돼. 한 손이라도 더 보태야지.’
오토의 마음은 급했다.
‘딱 체로키 왕국까지다. 이 이상의 영토 확장은 무의미하다.’
체로키 왕국을 점령함으로써, 이오타 왕국은 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내정에 힘쓰면서, 군사력을 길러 다가올 세계대전에 대비해야 할 때였다.
그래서 오토는 급한 마음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복구작업에 나선 터였다.
그런데 체로키 왕국 출신 귀족들이 작업현장에서 특권의식과 불만을 드러내며 분란을 일으키는 꼴을 보니, 오토로서는 화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저, 전하.”
체스터 공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습니다.”
“뭐가 너무한데.”
“그, 그것이.”
“뭐가 너무하냐고.”
“저희는 귀족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의 쓰임새는 따로 있습니다. 저희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고, 지도층으로 갖춰야 할 학식과 교양과 품위를 갖춘 귀족들입니다. 저희의 쓰임새는 따로 있습니다. 어찌 천한 육체노동을….”
“그럼 니 눈엔.”
오토가 체스터 공작의 말을 잘랐다.
“나도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거로 보이겠네?”
“그게 아니오라.”
“내가 딱 하나만 말해 줄게.”
오토가 체스터 공작을 향해 다가섰다.
“니 쓰임새가 뭐나면.”
“……?”
“처맞는 거야.”
다음 순간.
퍼억!
오토의 발길질이 체스터 공작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커헉!”
나가떨어진 체스터 공작.
“꼴에 귀족이랍시고 그딴 개소리를 내 앞에서 지껄여?”
“저, 전하?”
“왕인 나도 열심히 일하는데, 니따위가 뭐라고 삐대?”
“크아아악!”
“공작 주제에 왕 앞에서 개소리 지껄이게 돼 있어?”
“아, 아닙… 으아악!”
오토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보란 듯 체스터 공작을 흠씬 두들겨 팼다.
퍽!
퍼억!
심지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삽으로 체스터 공작의 등판을 내리치기까지 했다.
“끄억… 끄어어어어억!”
납작한 오징어가 된 체스터 공작이 진흙탕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오토는 체스터 공작을 응징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작업에 태만한 사람이 누굽니까.”
“예, 전하.”
현장을 관리·감독하던 기사가 오토의 귓가에 속닥속닥 속삭였다.
기사는 임무에 충실했고, 작업에 열심히 임했던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눈치란 게 있으면 알아서 기어들 나오시지. 직접 끌어내기 전에.”
오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업에 태만했던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딱 대.”
오토가 손짓했다.
“…….”
“…….”
“…….”
귀족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카미유가 준 신호를 알아듣고는 너도나도 엎드려 뻗쳤다.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오토는 몽둥이를 들고 일렬로 엎드려 뻗친 귀족들을 향해 줄빠따를 갈겨 대었다.
퍽! 퍼억! 퍽! 퍽! 퍽!
“으아악!”
“악!”
“자, 잘못했습… 으악!”
귀족들은 눈물, 콧물, 침을 줄줄 흘리며 한동안 줄빠따를 맞아야 했다.
화가 난 오토는 인정사정없이, 그야말로 무자비했던 것이다.
* * *
오토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오토가 귀족들에게 복구작업에 참여할 것을 명령했던 이유는, 다분히 민심 때문이었다.
지배계층인 귀족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대홍수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오토의 깊은 뜻을 모르고, 작업 현장에서 특권의식을 드러내며 분란을 일으킨다?
이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는 행태라, 오토는 칼을 빼 들기로 했다.
여기서 귀족들을 봐줬다간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울 길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매타작이 끝난 후.
“현 시간부로.”
오토가 선언했다.
“작업에 태만했던 놈들을 평민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가진 지위와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라.”
“예! 전하!”
그러자 만신창이가 된 귀족들이 오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했다.
“저, 전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죽을죄를 죄었사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오토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또한.”
오토가 다시 명령했다.
“명령에 불복해 복구작업에 나오지 않았거나 대리인을 대신 보낸 놈들은 지금 즉시 체포하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처형해 본보기를 보여라.”
“예! 전하!”
복구작업에 참여하라고 한 것은, 오토가 체로키 왕국 출신 귀족들에게 준 마지막 기회이자 자비였다.
사회 지도층으로서 백성들을 버리고 왕궁 높은 곳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주제에, 복구작업에까지 나오지 않은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